박홍암께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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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홍암께 답함 신사년(1881, 고종18) 11월 10일(答朴弘庵 辛巳十一月十日)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일전에 답장에서 주신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스러웠고, 덕으로 저를 사랑해주셔서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마음에 없어 반복해 생각해도 부족합니다. 마침내 이번 길에 면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좁고 융통성이 없는 성질이 침체되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선비가 학문에 비록 기술은 많지만, 그 큰 요점은 품성을 받아 온전히 구함에 불과합니다. 사변(事變)이 나서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데도 타파하지 못하면 때때로 비상적인 대책을 해서라도 그 본성이 편안하게 구하게 되는데 대개 또한 부득이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도가 음사(淫邪)에 조금씩 잠식됨이 참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 이르러 더 보탤 것도 없습니다. 곧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죽을 수 있는 마음을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문도들이 세상에 용납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처참한 적은 여태 없었습니다. 문도를 한결같은 의리를 같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죄를 함께 받아 함께 폐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것은 본성이 항상 그러한 것이니 그 마음을 두드리고 그 말을 들을 것도 없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시국은 영예와 명성을 그 몸에 더하여 그리고 무마시키고자 하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조정에서 도대체 인간된 도리로서 사람을 처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또한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절대로 설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움을 안고 죄를 덮어 쓰고 이 세상을 구차스럽게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외진 산으로 행적을 감추고 내가 사도(斯道)와 더불어 같이 움추리고 사우(師友)와 함께 폐하는 솔직한 마음을 이룸이 낫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금강산이나 설악산으로 가고자 하는 목표로 삼은 것은 제가 이 세상 사람에게 이미 의지할 곳이 없으니 반드시 산에서 고대광명(高大光明)하여 명망자를 만나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합니다. 설악산을 우선으로 한 것은 멀고 가까운 순서 때문이다. 감히 두 산 사이에서 우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삼연(三淵) 선생의 지극함은 곧 이 산의 주인입니다. 또한 역사에 남는 작은 기상이 있어 욕심 많은 자는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우게 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특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과 행적은 참으로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삼연선생은 부친 김수항(1689년 기사환국으로 진도 유배 후 사망) 비명(非命)에 돌아가심을 애통해하여 남은 여생은 사면하고 용서하여 세상 밖에 의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임금도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사면하고 용서를 함이 잠깐 사이에 일어났으니 저승에서라도 유감이 없습니다. 곧 그가 종신의 한이라고 말한 것은 또한 분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천지의 도가 옳음을 잃고 사람과 짐승이 자리를 바꾸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춘추』의 존왕양이 뜻과 맹씨(孟氏)의 위정척사지론(衛正斥邪之論)을 온 세상에 이르러도 놓을 장소가 없으니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삼연은 슬픈 노래를 불렀다면 곧 우리들은 당연히 통곡을 해야 하고 삼연이 통곡했다 하면 우리들은 당연히 발광하며 크게 절규해야 합니다. 다만 방랑이라고 하는 것은 삼연은 지팡이와 짚신을 신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서럽고 비장하고 우울한 마음을 한결 같이 시로 표현하여 당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였다. 마치 신선 세계 속의 사람과 같았습니다.
저는 풍채와 기상이 이전 사람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외진 산과 깊은 계곡에서 나의 능력이 닿는 대로 도착하여 단지 궤안(几案)을 빌려 두고 다람쥐‧사슴과 더불어서 시서(詩書)를 암송하고 충효를 논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면서 옛날 모습 의지하여 그대로 썩은 유자로 살아가는 것을 계책으로 삼았으나 그와 같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른바 중도를 행하는 것을 감히 바랄 수 없음도 역시 같은 말입니다. 중도를 실천하는 선비라면 곧 인의도덕이 진실로 한 나라에 뚜렷하게 나타나서 지금 사람들이 무마책을 능히 쓸 수 없으니 이것이 내가 중도에 미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또 만약 중도를 행하는 선비라면 설혹 외부에서 오는 것이 크게 나의 마음에 거슬려도 그 응대하는 것이 이처럼 성질로 이르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중도에서 지나치는 까닭입니다. 대개 오직 앞에서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뒤에서 지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노(魯)나라 남자(男子)가 유하혜(柳下惠)를 배우려고 한 까닭과 같으니 그가 중도를 구하는데 아마도 중에서 모두 멀리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다시 가르침을 받기를 부탁드립니다.
밤에 부청역(夫靑驛)에서 자는데 산 달빛이 창문에 가득합니다. 병든 몸으로 침상에서 이리저리 뒤적이니 감회를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동행하는 사람을 불러 대필 시키는데 반은 신음 소리로 서신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제발 보중하시어 멀리 있는 저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거듭 생각합니다.
『省齋集』
「答朴弘庵」 辛巳十一月十日
日前覆誨始終眷眷. 深感以德之愛. 然於鄙意. 有未釋然處. 反覆思量. 竟不免成此行. 甚矣其狷滯之性也. 愚聞士之爲學雖多術. 其大要不過求全其所受之性而已. 事變之來. 有拂乎吾之性而莫可打過. 則時或爲非常之擧. 以求卽乎其性之所安. 盖亦不得已焉爾. 吾道之爲淫邪所薄蝕. 固非一日. 而至於今日. 無以復加矣. 則凡冠儒服儒者. 合有以身殉之之心矣. 吾徒之不見容於世. 亦非一日. 而未有若今日之慘矣. 則爲其徒而同守一義者. 又安能無引罪共廢之心耶. 此常性所同然. 不待叩其中聽其說而後可知也. 于斯時也. 乃以榮名加諸其身 而示之以撫摩之意. 是 朝家絶不以人理處人也. 我亦將以何面目立於天地之間乎. 與其包羞蒙累. 苟活此世間. 無寧遯迹窮山. 以遂吾與斯道同屈. 與師友共廢之本情耶. 其必以金剛雪岳爲向者. 吾於斯世之人. 旣無所依仰焉. 則必欲於山而得高大光明. 負天下重望者. 以自托其身也. 其以雪岳爲先者. 遠近之序然也. 非敢有軒輊於其間也. 至若三淵先生. 則乃此山之舊主. 且其百世淸風. 有足以廉頑立懦者 故特有慕焉. 其情與迹則誠有不同者. 三淵是慟先人之非命. 托餘生於物外. 然當時日月之更. 雷雨之解. 曾不旋踵. 幽明無憾焉. 則其所謂終身之恨者. 亦有分數矣. 吾輩則目見天地蔑貞. 人獸倒位. 春秋尊攘之義. 孟氏衛斥之論. 薄海內外. 將無地而可寓焉. 則其情爲如何哉. 三淵而悲歌則吾當慟哭. 三淵而慟哭則吾當發狂大叫矣. 但其所謂放迹者. 三淵以竹杖芒鞋. 踏編八路江山. 慷慨壹鬱. 一於詩而發之. 使時人仰之. 若神仙中人. 吾則風神氣格. 大不及前人. 竆山絶壑. 隨吾力之可到. 只得措置几案. 與猱鼯麋鹿之輩. 誦詩書談忠孝以爲樂依舊是腐儒家計. 此其所以不同也. 所謂不敢望中行者. 亦有其說. 若是中行之士. 則其仁義道德. 固已彰著一國. 時人不能以撫摩之術. 加之於其身矣. 此吾所以不及於中也. 且若是中行之士. 則設有自外至者. 大拂乎吾心. 其所以應之者. 或不至若是之悻悻. 此吾所以過於中也. 盖惟其不及於前. 所以不能不過於後. 正猶魯男子之所以學柳下惠. 其於求中乎. 庶不至大相遠矣. 愚見如此. 不審高明以爲如何. 更請見敎焉. 夜宿夫靑驛. 山月滿牎. 病枕轉輾. 不勝感懷. 呼行伴倩此. 呻吟半之. 不成書儀. 更祝千萬保重. 以慰遐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