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록(關東錄) 치재집(恥齋集)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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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록(關東錄) 치재집(恥齋集)
홍인우(洪仁祐)
우리나라의 명산 중 묘향산, 풍악산, 구월산, 지리산 등의 산은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들은 모두 백두산의 지맥(支脈)이다. 그중에 풍악산이 맑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기로는 제일이다.
나는 그곳에 가서 두루 구경하며 언제든 오랜 소망을 풀고 싶었다. 힘든 세파에 시달리는 수십 년 동안, 그 계획을 빼앗기곤 했었고, 뜻이 맞는 벗들과 어울릴 때마다 금강산유람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가정(嘉靖) 계축년(1553년, 명종 8년) 4월, 허국선(許國善), 남시보(南時甫)와 이야기를 하다 옛사람들이 멀리 유람했던 일에 얘기가 미치자 나는,
“옛날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기셨고, 주고정(朱考亭)은 남악에 올라 산하의 장엄함을 보았네. 그러고 보면,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는 즐거움을 얻고 있으니 모두 그 이유가 있다네. 우리가 급하게 여기는 바가 비록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네만 어찌 회포를 풀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유람할 행장을 꾸리면서 《양노서(養老書)》의 기록 내용들을 고쳤다.
4월 9일, 갑신일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동소문(東小門)을 나섰다. 누원(樓院)에 이르러 밥을 먹었다. 관동(關東)의 기이하고 뛰어난 경치를 말하다보니 마음은 벌써 훨훨 날아 무수하게 구름 낀 산의 웅장함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오늘은 회암사에 가서 묵자고 종에게 일러두었다. 연천(漣川)으로 길을 잘못 들어설까 염려되어 농부에게 물어보니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여 그 한길로 들어서 가니 회암사에 이르렀다. 문 앞에는 5, 60주의 느릅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녹음이 매우 짙었다. 이날 밤은 근신당(謹愼堂)에서 묵었다.
4월 10일, 을유일
석문현(石門峴)을 넘었다. 정오에는 양문역(梁文驛) 북천(北川) 냇가에서 쉬었다. 이 시내의 원류는 바로 백운산(白雲山)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옷을 벗고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무더위를 피하였다. 이 산 주변은 물이 맑고 돌이 기이하여 농사를 짓고 살만하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었다. 때문에 여기저기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마침내 그러지 못했다. 땅거미가 질 어스름 녘에 이르러 풍전역(豐田驛)에 이르렀다. 찰방(察訪) 황사문(黃斯文)이 우리를 맞아 환대하였고, 게다가 노자까지 보태주었다.
4월 11일, 병술일
저녁에 이르러서야 가로현(可盧峴)을 넘었고, 동쪽으로 김화(金化) 경계로 향하였다. 허국선, 남시보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땅 또한 천천히 감상할 만하네."라고 하면서 마침내 시냇가에서 쉬었다. 들꽃과 풀들, 그리고 노니는 물고기가 흥취를 더해준다. 이날 밤 김화에서 잤다.
4월 12일, 정해일
더위를 무릅쓰고 가다가 마침내 나무숲 아래에서 오랫동안 쉬었다. 저녁때가 다되어서 큰 하천을 건넜다. 다리가 있었는데 현(縣)에서 몇 리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현 앞에는 산봉우리가 절벽을 휘돌아 감싸고 있었다. 이날 금성(金城)에서 잤다.
4월 13일, 무자일
창도역(昌道驛)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였다. 동쪽으로 가다가 시내 위 다리 하나를 건넜고, 몇 리를 더 가서 또 시내가 나와 이를 건넜다. 그리고 관음천(觀音遷)을 지났다. 천(遷)은 매우 위태위태하게 걸려 있었는데, 잡목을 늘어놓아 목책(木柵)을 만든 것으로 사람과 말의 통행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아래로는 큰 하천이 임하고 있었는데, 바로 두 개의 내가 합류되는 곳이다. 이 천(遷)이 끝나자 다시 산등성이를 넘었고, 또 시내를 건넜다. 다리가 있는 곳이 바로 보리진(菩提津) 하류다. 보리진은 추지령(楸池嶺)의 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회양을 지나 남쪽으로 백여 리를 흘러 양구진(楊口津)과 낭천(狼川)에서 합쳐지는 지점을 말한다. 현 앞을 거쳐 또 60여 리 가면 소양강(昭陽江)에서 합쳐진다. 그리고 50여 리를 더 가서는 용진(龍津)이 되어 동강(東江)과 합류하고 서해로 들어간다.
10여 리를 가니 마침내 통구현(通溝縣)에 이르렀다. 남시보가 제일 뒤에 도착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암말을 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수말이 갑자기 나타나 바람처럼 달려들어 놀라고 겁이 나 말에서 내려 돌멩이로 그 수말을 쫓느라 늦어졌습니다."라고 하기에 서로를 보면서 한바탕 웃었다.
이날 저녁 우리 세 사람은 통구현의 관아 문밖을 거닐었다. 관청에서 심은 버드나무 몇 그루가 마침 있었는데 그 아래를 거닐다 처음으로 소쩍새 소리를 들었다. 문득 산 깊은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4월 14일. 기축일
동쪽으로 몇 리를 가다가 북쪽으로 꺾어 들었다. 다시 동쪽으로 가다가 작은 고개를 넘으니 동네는 넓고 한가해 보이고 산봉우리는 점점 기이해진다. 민가(民家)가 어쩌다 바위 아래에 얽혀 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들이 모여 저절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황홀하기가 마치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허국선이 약초의 우리 이름을 알고 싶어 했으므로, 내가 약초를 볼 때마다 캐어 기록할 것을 청하며,
“의술은 비록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유자(儒者)가 다루어야 할 범위이다."라고 하였다.
신원(新院)을 지나 십여 리를 가서야 단발령(斷髮嶺)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은 하늘을 가렸고 산길은 구비지면서 허공에 매달려 있는 듯하였다. 단발령을 오르려는데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풍악산을 바라보니 은빛 봉우리와 옥빛 산들이 웅장하게 서리어 우뚝 치솟아 있다. 그 모습이 완연히 한 고조 유방(劉邦)이 대의를 일으키자 삼군(三軍)이 흰 옷을 입은 것처럼 엄숙하다. 그리고 층층의 산과 첩첩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올라 아스라하게 열을 이루고 하늘에 꽂혀 힘차게 떨쳐 일어나는 듯하니, 항우가 적진에 임하니 칼과 창이 서로를 향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면서, '조물주의 솜씨가 어찌 이리도 기묘할까. 맑고 탁한 기운이 나누어지지 않고, 높고 낮은 것들은 서로 이어져 산이 되었다. 물이 될 때는 큰 바다가 키질하듯 흔들려 파도처럼 움직였고, 먼지와 모래는 까불려 흩어져 오직 뼈대 같은 바위만 남아 동해 가에 울퉁불퉁 서 있구나.'라고 느꼈다.
단발령으로부터 동쪽으로 내려가 나무그늘 사이로 20여 리를 갔다. 큰 내를 건넜다. 푸르게 물이 오른 버드나무와 흰 모래는 걸을 때마다 밝게 빛나며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고, 산짐승과 물새는 울며 날 때도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신선의 세계가 이러하랴!
이윽고 시냇가에서 쉬었다. 이 시내는 바로 쇄령(瑣嶺)의 하류 쪽에 있는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이 흥에 겨워할 때 산사람 한 분을 만났다. 앞길의 행도(行途)를 물어보니 장안사에 도착하면 해가 떨어질 것이라 한다.
이에 걸음을 재촉하여 4, 5리를 가니 철이령(鐵伊嶺)이 나와 이를 넘었다. 동쪽으로 산허리를 돌아서는 다시 북으로 방향을 꺾어 길을 갔다. 산을 돌고 길이 구비 져 매 구비마다 내를 건너야 했다. 이 시내의 이름은 만폭동 하류였다. 아홉 번을 건너서야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장안사 계곡의 시냇물은 거의 말라있었고, 소나무와 회나무는 모두 죽어 붉었다. 예전 들었던 것과는 너무 달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에 허국선이 말하기를,
“사람을 논하고 사물을 살필 때에 다만 겉면만을 보고는 그 이면을 알 수 없는 것이니 그 깊은 내막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장안사에 도착하여 승려에게,
“여기가 어찌 이렇게 대머리처럼 헐벗었는가?" 라고 물었더니, 승려가,
“이 절에는 지난 기해년(1539년, 중종 34년)에 화재가 났었습니다. 그 나무들을 잘라 절을 짓느라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서울과의 거리는 390여 리이다. 우리 세 사람은 월대(月臺)에 앉아 뭇 봉우리를 올려다보니 종횡으로 늘어선 것이 제각기 기이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북쪽 봉우리는 관음봉이라 하고 그 다음 동쪽 봉우리는 지장봉이라 하는데, 모두 망고봉의 남쪽 지맥이다. 다음의 남쪽 봉우리 보현봉은 설응봉의 서쪽 지맥이다.
이날 밤 장안사 서쪽 요사채에서 묵었는데, 요사채의 승려 지준(智濬)이 앞으로의 산행에서 돌고 꺾이는 곳을 아주 자세하게 말해주어서 기뻤다.
백천동(百川洞) 계곡에서 표훈사(表訓寺)까지
4월 15일, 경인일
가볍게 행장을 꾸렸다. 사미승 행사(行思)와 동쪽으로 만폭동 하류를 건너 몇 리를 갔다. 행사가,
“여기서부터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입니다."라고 한다.
나무숲과 덤불, 참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내가 먼저 가고 이어서 남시보가 따라왔는데, 숲을 헤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허국선은 미타암으로 곧장 향했다
한 바위에 이르러 맑은 못의 깊은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못의 동쪽에는 오래된 성이 있고, 성의 북쪽엔 지장봉이 있었다. 지장봉의 높이는 수천 길이나 되고 넓이는 4, 50장(丈) 정도 되어 보인다. 우뚝 솟아 허공에 꽂혀 있었는데, 봉우리의 아래가 그리 둥글고 넓지 않아 넘어질 듯 위태하다.
우리 두 사람은 각기 하나의 바위 굽이를 차지하고 노송(老松)의 뿌리에 걸터앉아 곡조를 달리하여 길게 시를 읊조렸다. 이윽고 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시내를 따라 골짜기를 올라갔고 때로는 바위를 넘었다. 피로도 잊은 채 계속 걸었다. 이 골짜기에는 흰 돌이 삐죽삐죽 솟아올라 있었고, 날카로운 봉우리들은 우뚝함을 다투고 있었다.
봉우리들은, 긴 산등성이나 가로지른 고갯마루가 좌우로 둘러싸고 있는 다른 봉우리들과는 달랐다. 모두 길고 큰 창처럼 날카롭게 끝이 깎이고, 묶음으로 묶여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그 끝부분들은 각각 떨어져 따로 서 있다. 봉우리 뒤에 있는 또 다른 봉우리들은 묶어 벌여놓은 듯한 봉우리 사이로 아스라이 보인다. 곧바로 1리 정도를 바라보니 더 나아갈 데가 없는 것 같았다.
바라보았던 곳에 이르니 다시 한 골짜기가 있었다. 골짜기는 가면 갈수록 더욱 괴이하고 깊다. 행사가,
“여기서부터 40리쯤 가면 영원사(靈源寺)에 이르는데, 초식하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 골짜기와 봉우리들이 이렇게 기이하고 아름다운 줄 알지 못하여 깊이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다시 행장을 꾸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돌아왔다.
북쪽으로 미타암(彌陀菴)을 돌아보고 산허리를 돌아 안양암(安養菴)을 굽어보았다. 헤어졌던 허국선이 피곤한지 암자 앞 기둥에 누워있었다. 내가 그를 부르면서,
“그대는 홀로 길을 잃고 신선 세계로 들어갔나 했더니, 들어가지 못했는가 보네. 아직 속세의 때를 매미 허물 벗듯 벗어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네." 하고 말하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안양암 약간 남쪽에 법당과 함께 얽어놓은 굴이 있었다. 그 아래쪽은 약간 트인 곳이어서 굴 앞에서 함께 쉬었다. 안양암 뒤쪽 골짜기로 하여 삼일암(三日菴)으로 가서 망고봉(望高峯)에 올라가고 싶었는데, 여기 사는 승려들은 오르기 험하다며 아무도 길을 안내해주려 하지 않는다.
마침내 서쪽으로 수백 걸음을 내려오니 명연(嗚淵)에 이르렀다. 고인물이 깊고 맑고 푸르렀다. 바위가 약간 움푹 파인 곳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려 폭포가 되었는데, 그 높이는 여러 장(丈)이 된다. 그 남쪽으로 평평한 바위가 있었는데 수백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곳에 앉거나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골짜기가 금방 어두워지자 푸른 빛 산기운이 옷에 축축하게 젖어든다. 안양암의 지변(智卞) 승려가,
길을 따라 곧장 가면서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딜까하는 마음에 곁눈질도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백 걸음쯤 갔더니 커다란 바위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맑은 계곡물이 그 사이를 잔잔히 흘렀다. 그 동쪽으로는 봉우리들이 가로지르고 그 봉우리와 첩첩한 산봉우리들이 아스라이 이어져 웅장하였다. 바로 삼일암의 서쪽 지맥이다.
여기서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갔다. 나는 아름답고 고운 산천이 너무도 좋아 누워서 갑자기 길게 시를 읊조렸다. 잠시 후 산비가 구름도 없는데 부슬부슬 내린다. 허국선과 남시보는 잰걸음으로 회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갔지만, 이미 의관은 모두 젖어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표훈사(表訓寺)로 들어가 자기로 했다. 절의 문 안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지원(至元) 4년(1338년, 고려 충숙왕 복위 7년) 무인년 2월에 건립한 것이었다. 원나라 임금의 명을 받들고 온 중국 사신 양재(梁載)가 비문을 지었고 고려의 정승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바로 원나라 영종황제(英宗皇帝)가 만 명에게 시주를 하고 세운 비석이었다. 아! 원나라는 오랑캐로서 중화(中華)의 정통을 얻었으나 명분과 교화에는 힘쓰지 않고 불교와 같은 이단의 헛된 학설을 외국에까지 두루 퍼지도록 하였으니 안타깝다. 표훈사 주지는 석희(釋熙)였는데, 어느 정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날 밤 그와 함께 산중 생활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우리 세 사람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면서, 혹은 자리를 나란히 하면서 함께 앉아 질의 토론하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중용(中庸)》에 나오는 '성기성물(成己成物, 자기를 이루는 것은 인(仁)이요, 남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지(知)이다.)에 관한 논의에서 허국선과 내가 의견을 말하면 남시보가 따랐고,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 벼슬을 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에 관한 논의는 남시보와 내가 기치를 세우면 허국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사물이라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에 대해 허국선과 남시보가 의견을 내세우면 내가 그렇다고 말하였다.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멀리까지 유람을 하는 것은 비단 산수를 보기 위함만은 아닐세. 옛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바람을 수레로 삼고 우레를 채찍질하여 하늘을 두루 살펴보아, 어떤 사람은 마음이 툭 트여서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아졌다고 하니, 어찌하면 자연의 정신을 얻어 함께 이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라고 했다.
이날 약 20리를 갔다. 이보다 앞서 도사(都事) 황백온(黃伯溫)에게 함께 유람할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백온은 내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이미 내금강과 외금강을 모두 관람하고 정양사로부터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산행의 괴로움을 서로 위로했다.
4월 16일, 신묘일
백온과 함께 북쪽으로 의의암(欹欹菴), 삼장암(三藏菴), 수선암(修善菴) 등을 둘러보고 곧장 위로 올라갔다. 이날 처음으로 험한 곳을 올랐는데, 열 걸음을 걷고 한 번 쉴 정도였다. 5, 6리를 가 정양사에 이르렀다. 정양사의 서쪽에는 진헐대(眞歇臺)가 있고, 진헐대의 남북으로는 백여 그루의 회나무가 산을 덮은 채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그 아래를 천천히 걸으니 늦가을처럼 날씨가 상쾌하다.
절 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산을 뒤로 대(臺)를 만들었는데 담장이 없는 상태여서 매우 탁 트였다. 오래된 느릅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머물러 쉴 만하였다. 주지가 나와서 맞이하고 포단(방석)을 내놓는다. 우리 네 사람은 앉거나 눕기도 하면서 피로가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눈을 비벼 두루 사방을 보았다.
이날 천지는 새로 개인 듯하여 아침 햇살은 고요하게 빛났고, 뭇 봉우리들은 빼어남을 드러냈으며, 여러 골짜기들은 이슬로 반짝였다. 계곡의 물은 가득 차 깊고 넓게 흘렀는데 마치 수많은 고래들이 서로 싸우는 듯 눈같이 흰 물보라를 하늘에 뿌렸다. 산은 어지럽게 이리저리 높이 솟아 마치 만 마리의 말이 말갈기를 떨치며 마구 돌진하는 듯 떨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선녀가 하늘을 나는 듯 푸른 옷자락이 펄럭이는 듯했고, 어떤 것은 여러 제후들이 조회할 때 옷에 찬 패옥(佩玉)이 서로 부딪쳐 쟁쟁거리는 듯했다. 나는 너무 놀라면서도 한편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한참 그런 감흥에 잠긴 뒤에야 그것이 기이한 봉우리와 뛰어난 골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정양사는 바로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산의 여러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금강산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라 할만하다. 지팡이를 짚고 다시 바라보았다. 동북쪽에 자리를 잡고 웅장 존엄한 모습으로 있어 가까이 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은 비로봉(昆盧峯)이다. 뿔이 날카롭게 솟은 듯 두 봉우리가 마주서 우뚝 솟구쳐 있는 것이 향로봉(香爐峯)이다. 향로봉 서쪽에 기이한 바위가 불쑥 솟아올라 마치 누워있는 용과 같은 형상을 한 것은 금강대(金剛臺)의 봉우리이다. 향로봉의 북쪽으로는 새하얀 벽이 길게 둘렀는데 어떤 것은 흩어져 길게 가로지른 봉우리가 되었고 어떤 것은 대머리처럼 벗겨져 뾰족하였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 가운데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비로봉 서북쪽에 있는 중향성(衆香城)이었다. 중향성의 북쪽에는 영랑재(永郞岾), 영랑재의 서쪽에는 수정봉(水精峯)이 있다. 수정봉의 남쪽으로 큰 봉우리 일곱 개가 있었다. 선암봉(船菴峯), 가섭봉(迦葉峯), 원통봉(圓通峰), 사자봉(獅子峰), 마하연봉(摩訶衍峰), 운봉(雲峰), 만회봉(萬灰峰), 원적봉(圓寂峰)이다. 마하연봉 남쪽으로 혈망봉(穴網峰)이 있고, 또 그 남쪽에 망고봉(望高峰)이 있는데, 망고봉의 서쪽 어깨 부분에는 돌매봉(石鷹峰)과 승상봉(僧床峰)이 서 있다. 그 모습이 매와 침대를 너무 닮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동쪽으로부터 서쪽, 남쪽 삼면은 완연히 병풍을 펼쳐놓은 것처럼 바위봉우리들이 비록 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흡사 가로 놓인 봉우리처럼 보인다.
이날 저녁, 구름을 쓸어낸 듯 하늘이 걷혀 떨어지는 저녁햇살이 온천지에 넘치면서 봉우리들을 비추었다. 향로봉 이북은 눈으로 만든 병풍을 옆으로 펼쳐놓은 듯하고, 혈망봉 동쪽의 일출봉(日出峰), 월출봉(月出峰) 등 모든 봉우리들이 마치 은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날 밤, 달빛이 산속 사방을 비추고 온 천지는 고요하여 마음과 뼈골이 서늘하고 맑아졌다. 문을 열고 고요히 앉으니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무릇 밤의 맑고 밝은 기상을 기를 수 있다면 인욕(人欲)은 깨끗하게 제거되어 하늘의 순정한 기운이 모든 곳에 넘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인가 억지로 하려고 하는 사람도 하늘의 순수를 회복하여 맑고 깨끗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나 같은 사람도 어찌 그리 되지 않으랴?
개심암(開心菴)에서 마하연(摩訶衍)까지
4월 17일, 임진일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앞에 있는 대(臺) 위에 홀로 서성거리며 가만히 완상하였다. 잠시 후 아침 해가 점차 솟아오르는데, 봉우리들은 빛을 내고 골짜기는 그 아름다움을 다툰다. 마치 화려한 궁궐이 눈앞에 펼쳐진 듯 경탄스럽다. 오나라의 장사꾼과 월나라의 상인이 시장 통에 서서 기이한 재화에 눈이 어지러워 황홀해 하는 듯, 또는 목수, 장인, 바퀴제작자, 수레 만드는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자 소나무와 가래나무 등 좋은 재목감들이 눈앞에 가득하여 그 기이한 모습들을 눈으로 보는 듯, 만 천 가지의 기상에 황홀지경에 빠졌다.
이날 아침, 백온은 마침내 절의 동쪽 문으로 나가 흡곡(歙谷)을 향하였다. 우리는 산허리를 2리쯤 따라 가다 꺾어 돌아 북쪽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갔다. 다시 5리쯤을 가자 보현재(普賢岾)가 나와 여기서 잠시 쉬었다. 안변(安邊)의 승려 보명(普明)도 쉬었다. 함께 3리를 더 가니 개심암(開心菴)에 도착했다.
개심암의 서쪽에 대(臺)가 있어 올라가니 땅의 형세가 높아서 내금강의 서남쪽 모든 봉우리가 아래로 보인다. 어제 정양사에서 올려 보았던 봉우리들이 모두 내 지팡이 아래에 있었다. 개심암의 동쪽을 돌아보고 남쪽 나무 그늘을 걸어 1리쯤 내려가니 천덕암(天德菴)과 묘덕암(妙德菴)이 있다.
천덕문(天德門)은 영천(靈川) 신간성(申杆城)의 기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3리를 가서 원통암(圓通菴)에 이르렀다. 천덕암과 원통암은 그윽하면서도 탁 트여있어서 머물러 유숙하고 싶었지만 병든 스님이 있어 그러하지 못했다. 이에 시내 하나를 건너 2리쯤을 가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불지암(佛知菴)에 이르렀다. 정오가 되었는데, 절에 스님은 없었다. 깨끗이 청소하고 불을 지피게 했다.
밤새도록 조용히 쉬며 맑고 고요함을 즐겼다. 한밤중에 멀리서 여러 암자의 종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또 서쪽 봉우리 쪽을 보니, 별빛이 멀리서 비치는 듯 반짝거린다. 원통암을 떠나 이곳에 머물고 있는 승려에게 그 별빛 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하였더니 개심암의 불등(佛燈)이라고 한다.
4월 18일, 계사일
느지막하게 불지암 북쪽 돌길로 올라가 나무 그늘을 통과하였다. 작은 고개 두 개를 넘어 동쪽으로 약 5리 정도 가니 사자암(獅子菴)과 묘봉암(妙峰菴)에 이르렀다. 뜰에는 7, 8그루의 적목(赤木)이 암자를 잘 감싸고 있어서 좋은 느낌을 주었다. 목련을 따서는 그 향기를 서로 맡아보았다.
2리를 더 가니 마하연암 앞에 이르렀다. 마하연암 앞 대(臺)에는 담무갈(曇無羯)의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었다. 암자에 들어갈 무렵 날은 저물려고 하였다. 혜능(惠能)이 나와 우리를 맞이하며 마하연암 사적기를 보여주었다.
산비둘기가 들보에 앉으면서도 사람을 피해 날아가지 않는다. 비둘기는 무릇 보잘 것 없는 작은 새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기색을 살펴 기쁘게 해줄 줄 아니, 사람으로서 어찌 새만도 못하겠는가. 마하연암의 서남쪽에는 해송, 적목, 단풍나무, 회나무 등이 빙 둘러싸여 짙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불당이 몹시 맑고 그윽하여 이리저리 다니며 둘러보았다. 동쪽으로 여덟 개의 봉우리, 북쪽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이 양쪽 사이에는 뾰족한 봉우리들이 수도 없는데 어떤 것은 완전히 그 모습이 보이고 어떤 것은 반쯤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혈망봉이다. 암자의 앞 기둥에서 이 봉우리를 바라보면 항아리 주둥이 같은 굴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이는데, 혈망봉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금강산에는 곳곳에 오가피, 목련, 적목, 감탕나무, 측백나무 등이 있었다. 이곳에 이르러 보니 바위 사이나 절벽 꼭대기에는 해송이 많았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단풍나무다. 이 산을 풍악(楓嶽)이라 한 것이 아마도 헛된 말은 아니었다. 만약 서리가 깊은 물에 잠긴 산에 내리고, 가을이 골짜기마다 깊어지면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계곡은 붉은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낙엽마저 지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더욱 맑고, 나뭇잎 떨어진 땅은 차가워질 것이다. 봉우리는 그 기이함을 더욱 드러내고, 돌은 그 괴이함을 드러낼 것이다. 그 와중에 바람을 맞이하여 가고, 달빛 아래에서는 잠자곤 하며 노닐기를 즐겨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북해(北海)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창오산(蒼梧山)에서 저녁을 맞는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념은 하염없이 계속되었다.
오늘의 유람을 마치고 《심경(心經)》의 야기장(夜氣章)을 읽었다. 혜능 승려는 낟알을 먹지 않았는데, 그와 함께 밤이 다하도록 등불을 밝히었다.
만폭동(萬瀑洞)을 둘러보다
4월 19일,
남시보와 만폭동을 유람하기로 약속을 하였지만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절은 쉴 만하니 수십 일 머물고 싶습니다."라고 하며 일어나지 않는다.
때는 정오에 가까워갔다. 묘봉암을 1리쯤 지나니 사자봉 정상에 다다랐다. 짐승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다. 그 아래로 화룡연(火龍淵)이 있는데 못 중에서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다 한다. 또 1리를 가니 바윗길이 비스듬히 나 있어 등나무 덩굴을 움켜잡고 내려갔다. 서쪽으로 네 개의 봉우리가 보였다. 각기 윤필봉(潤筆峯), 소향로봉, 금강대라 한다. 동쪽에 있는 세 봉우리는 모두 혈망봉의 북쪽 가지가 된다.
시내를 건너 동쪽으로 가는 중에 구름사다리에 의지하였는데 돌 비탈길이 허공에 걸린 듯 아스라하게 보인다. 돌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34개의 계단이 있고, 계단의 북쪽 절벽에는 암자가 있었다. 절벽 바위에 두 칸짜리 승방(增房)이 있었다. 그것은 약간 서쪽에 높이가 백 척은 될 듯한 두 개의 구리기둥과 그 기둥 꼭대기에 반 칸을 얽고, 그 안에 관음보살상을 봉안한 것이었다. 암자를 두 개의 쇠사슬로 고정시켰는데, 한쪽 끝은 구리기둥에 묶었고 하나는 그 암자를 둘러 바위에 고정시켰다. 그 북쪽에는 향로봉과 마주하고 있는 보덕대(普德臺)가 있다. 이것이 보덕굴의 개요이다.
구름다리로부터 동쪽 절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냇가에 이르니 흰 돌이 평평하게 퍼져있는데 수백 명이 앉을 정도이다. 우리들은 손으로 물을 움켜 장난하기도 하고 시를 읊조리기도 하면서 가는 것을 잊었다. 하인을 시켜 밥을 짓도록 하였다. 바위 서쪽에는 한 그루 큰 해송이 말라 죽어 있었는데, 백룡이 등천하는 듯한 모습이다. 장난삼아 여덟 편의 절구(絶句)를 지어 그 나무에 쓰니 허국선과 남시보도 이어서 내 시에 화답을 하였다.
서쪽으로 1리 정도 내려와서는 바위 아래에서 사제(舍弟) 응휴(應休)의 《정미춘운유록(丁未春雲遊錄)》을 보았다. 저녁 무렵 바위 골짜기를 기어오르는데, 흰 바위가 미끄러웠지만 맨발로 가는데도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3, 4리 가니 금강대 아래에 이르게 되어 지팡이를 세우고 조금 쉬었다. 보덕암의 스님이 서쪽 절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기서 푸른 학이 새끼를 항상 길렀습니다만 올해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골짜기는 만폭동(萬瀑洞)이라고 불리는데 대체로 큰 바위 하나가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화룡담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흑룡담(黑龍潭)이 되고, 또 그 아래로 내려오면 응벽담(凝碧潭)이 되고, 또 그 아래로 내려와서는 벽하담(碧霞潭)이 되었다. 이곳은 물이 고여 담(潭)이 되고, 물이 흘러 내(川)가 되고, 쏟아져 폭포가 된다 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물이 고이고 흐르고 쏟아지는 것이 하도 많아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모든 골짜기의 물은 반드시 내가 되고, 그 물에는 반드시 근원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그것을 간략히 기록하여 본다. 폭포의 근원으로는 다섯 군데가 있다. 하나는 비로봉의 동쪽에서 시작되고 있었고, 하나는 비로봉의 남쪽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기 안문천(雁門川)과 원적천(圓寂川)이 그것이다. 안문봉 아래에서 합류한다. 하나는 만회봉의 남쪽에서 출발하며, 하나는 마하연의 동쪽에서 나와 혈망봉 아래에서 합류한다. 선암(船菴)의 서쪽에서 비롯된 것이 하나 있다. 망고봉의 북쪽에서 합친다. 대개 내금강의 물은 명연으로 모두 모인다. 그리고 이것은 백천동(百川洞)과 장안사의 남쪽 100여 리 되는 곳에서 합류하여 양구진(楊口律)으로 들어간 뒤 낭천진(狼川津)과 합류된다.
이날 밤 다시 표훈사 동쪽 방에서 묵었다.
4월 20일, 을미일
망고봉을 오르려 하는데, 경기도 여강벽사(驪江甓寺)의 지능(知能)과 혜보(惠普)가 오대산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면서 흐르는 물과 떠도는 구름처럼 이곳을 다니는 중에 우연히 조우하였다. 여강은 나의 장원(莊園)이 있는 곳이기에 이 승려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두 승려와 함께 절 앞 시내를 건너 남쪽 회나무 숲으로 1리를 갔다. 또 동쪽으로 길을 꺾어 건천(乾川)에 이르렀는데, 길이 너무 험난하였다. 한걸음 가다 멈추고 한걸음 가다 쉬면서 하길 5리나 되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여기서 남쪽으로는 삼일암(三日菴)으로 갈 수 있다.
또 동북쪽으로 산허리를 나란히 하고 5, 6리 갔더니 대송라암(大松蘿菴)과 소송라암(小松蘿菴)이 나타났다. 두 곳에는 모두 낱알을 먹지 않는 승려들이 있었다. 그 이름을 물어보았는데, 서좌한 이는 행수(行修)고, 동좌한 이는 법련(法蓮)이라고 하였다. 모두 무자생(戊子生)으로 기상과 모습이 꽤 맑고 깨끗해 함께 논할 만하였다.
소송라암 북쪽 대(臺)에서는 만폭동을 바로 굽어볼 수 있었다. 잠시 쉬면서 법련으로 하여금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대송라암에서 동쪽으로부터 꺾어져 위로 3리를 가다가 다시 서쪽 절벽으로 갔다. 겨우 두 발만을 붙이고 갈 정도로 좁았다. 여기서부터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는 측백나무가 뒤엉켜 자라고 있어 어떤 곳은 가지를 잡고, 어떤 곳은 뿌리를 붙들고 갔다. 한 1리쯤 가서 작은 고개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보니,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골짜기가 아득하여 아찔아찔하였다.
한참 뒤, 나란히 서 있는 바위를 몸을 옆으로 하여 배와 등으로 비벼대면서 통과하였는데, 수십 걸음동안 겨우 발 한쪽 정도에 불과하였다. 또 바위가 도랑처럼 갈라진 곳이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몸을 돌려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바위에 박아놓은 쇠사슬은 붙잡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아래 동남쪽에는 한줄기 길이 있는데 상운재(上雲岾)를 향해 가는 길이다. 또 수백 걸음을 가니 쇠사슬이 바위 가운데에 늘어져 있는데 앞서의 쇠사슬들에 비해 가장 길다. 먼저 붙잡고 올라가면서 두 승려로 하여금 발을 받치도록 하여 겨우 올라갔다. 다시 열 걸음 정도 가니 쇠사슬이 있었지만 올라가는 길은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 서쪽으로 승상(僧床) 바위와 돌매(石鷹) 바위가 있었다. 혜보가 갑자기 승상 바위 위에 오르려고 해 그만두게 하였다.
수백 걸음을 또 가니 망고봉에 마침내 이르렀다. 망고봉은 깎아지른 듯 매우 가팔랐지만 그 위는 10여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나는 바위 모퉁이를 안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탁 트여있는 것이 마음과 눈이 모두 상쾌해졌다.
대(臺)가 있는 봉우리는 세 개의 뿔이 곧추 서 있기는 하나 여전히 하나의 봉우리였다. 북쪽으로는 가파른 봉우리 하나를 마주하면서 조금 낮아졌다가 서쪽으로 긴 산줄기를 달리면서 세 개의 지봉(支峰)으로 흩어졌다. 남쪽 두 개의 봉우리는 백천동의 북쪽 봉우리에 해당하며 서쪽 한 봉우리는 표훈사의 남쪽 고개였다. 이 봉우리들은 내금강산과 외금강산의 가운데 지점, 백천동 여러 봉우리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개심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겠다. 비로봉은 그 북쪽에 있고, 일출봉, 월출봉, 안문봉은 그 동쪽에 있으며, 미륵봉, 백응봉(白鷹峰)은 그 남쪽에 있고, 그 동남쪽에 수점(水岾)이 있다. 수점에서 북쪽으로 10여 리 가량이 이어지면서는 혈망봉이 되고, 미륵봉 서쪽에서 갈라져서는 시왕봉(十王峰), 남쪽으로 갈라져서는 설응봉(雪鷹峰), 곧바로 백탑동을 감싸 안으면서는 장안사의 남쪽 기슭이 된다.
유람을 마친 뒤 내려오다가 착 달라붙어 오르던 곳에 이르러서는 사이 길로 바위 꼭대기를 넘었는데 위험하지는 않았다. 송라암으로 내려오니 법련이 이미 밥을 준비해 놓았다. 함께 옷을 푼 뒤 식사를 했다. 송라암의 동쪽 굴 안에는 얼음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날씨가 아직도 차가운 지라 내가 사는 남쪽 지방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이 저물 무렵이 되자, 골짜기는 어둑어둑해지고 산은 푸르고 아득한 기운을 더해졌다. 마침내 우리는 아까 오른 길을 따라 내려와서 표훈사로 돌아오니, 왕복 40여 리 길이 되었다. 얼마 있자니 찰방(察訪) 황중흡(黃仲洽), 도사(都事) 이경안(李景安)이 이날 아침에 장안사에서 와서 만폭동에서 노닐다가 이곳으로 와 유숙하였으므로 서로 산행의 수고를 위로하면서 선당(禪堂)에 앉아 술 몇 순배를 돌렸다.
묘길상(妙吉祥)에서 원적암(圓寂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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