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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설악산 시문

    관동록(關東錄) 치재집(恥齋集) (2)

    페이지 정보

    조회 307회

    본문

     

    4월 21일, 병신일

      아침이 되자, 황중흡, 이경안은 정양사를 향해 떠났다. 허국선과 남시보는 둘 다 병이 나서 나를 따르지 못하였다. 내일 정도에는 추지령(楸池嶺)으로 향하려 했는데, 마음이 어두워졌다.

    금강산 유람을 떠난 지 보름이 되었다. 우연히 송낙(승려들이 쓰는 모자)을 쓴 승려를 만나 이름을 물으니 성정(性淨)이라고 한다. 비로봉과 구룡연 가는 길을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자, 흔쾌히 대답하며

    “일찍이 조 경양(趙景陽)을 따라 두루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안사와 표훈사의 승려들이 모두 나의 행보를 제지했었는데 성정을 만날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성정과 여강에서 온 승려들을 데리고 다시 만폭동으로 하여 마하연을 거쳐 1리를 가니, 반야암이 나타났다. 또 1리를 가니 거빈굴암(巨彬窟菴)이 보인다. 거빈굴암의 동쪽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성정은 계수나무라고 하였다. 그 잎은 해송과 비슷한데 한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지가 생겨난 것이 마치 바늘이 모여 있는 듯하다. 껍질색깔은 계수나무와 같은데 갈라서 맛을 보니 매우면서도 시큼하여 계수나무와는 다른 것 같았다. 아마 목란(木蘭)일 성싶다.

    또 2리를 가니 지불암(知佛菴)이 나왔다. 지불암 남쪽으로 4, 50 걸음 쯤에 구멍 속에서 솟아나오는 샘이 있었다. 성정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이것은 감로수입니다. 푸른 학이 이 골짜기에 살고 있는데 반드시 이 물만을 마십니다."라고 하였다. 

    가다가 계곡물 하나를 건넜고, 그 계곡물을 따라 동쪽으로 돌다가 올라갔다. 긴 봉우리는 가까이서 감싸고 가로지른 절벽은 굽이굽이 둘러싸고 있었다. 맑은 물과 흰 돌들은 여기에 이르자 더욱 기이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서쪽 사자봉과의 거리는 10리 정도 됨직하다. 그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몇 개의 뿔같은 봉우리들이 앞 봉우리 사이에 보였는데, 마치 사람이 담장에 기대어 엿보는 것 같았다. 이 또한 볼만하였다. 

    외나무다리 하나를 건너 못 옆 너럭바위로 올라갔다. 바위는 깊은 담(潭)에 임하여 있는데 좌우로는 소나무와 회나무가 울창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를 벗어난 흥취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마치 신선이 산다는 적성(赤城)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세계를 떠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담(潭)의 북쪽 바위에는 불상을 새겨 놓았는데 매우 웅장하고 우뚝해 보였으며, 그 불상 앞에는 오래된 탑이 서 있었다.

    동쪽으로 3리쯤 가서 또 계곡물을 건너 한 고개를 넘었다. 고개의 북쪽은 꽉 막힌 깊숙한 골짜기가 있었다. 성정이 말하기를,

    “이곳이 만회암동(萬灰菴洞)인데, 골짜기의 북쪽에는 만경대(萬景臺)와 백운암(白雲菴)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4리쯤 가니 묘길상암(妙吉祥菴)이 나왔다. 암자는 시내 옆에 있었다. 물이 맑고 바위가 넓었다. 그 남쪽으로는 네 개의 봉우리가 있고 북쪽에는 깎아지른 듯 서있는 절벽 하나가 있었다. 

    암자로 들어가 밥을 먹고 있는데, 희칙(希則)이라는 스님이 문수암으로부터 와서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 산에 들어온 지 거의 30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선비님의 혜량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와 함께 이야기를 해보니 불학(佛學)을 대략 섭렵한 듯하였는데, 산중의 즐거움을 그와 마음껏 이야기 하였다. 아! 승려들이 요즈음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소리 높여 부르며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僧科)에 마음을 쏟는데 이 승려는 홀로 고요함을 지키는 듯하니 승려 가운데서 병통에 빠지지 아니한 승려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또 5리를 가니, 두 냇물이 합수하는 곳이 나온다.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가니 돌길이 있는데 낙엽이 무릎까지 차 사람의 발자국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성정이 말하기를,

    “여기가 원적동입니다. 골짜기가 아득하고 깊숙하여 새 한 마리 울지 않을 정도입니다."라고 하였다.

    북쪽으로 3, 4리를 가다가 냇물을 건너니 고원적암(古圓寂菴)과 신원적암(新圓寂菴) 두 암자가 나왔다. 그곳에도 각각 곡식을 먹지 않는 승려들이 있었다. 고원적암의 승려는 마음을 경계하는 수양을 하고 있었고, 신원적암 승려는 ‘인(仁〕’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암자 동쪽의 기이하게 생긴 봉우리는 봉황이 춤추고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둘러있다. 암자 서쪽의 길게 뻗은 봉우리는 웅크린 호랑이와 달리는 용과 같은데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둘러있다. 이곳은 너무도 맑고 깊어 화식(火食)을 하는 인간들이 머무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싶었다. 

    이날 약 25리를 갔다. 원적암에서 하룻밤 묵었다. 원적암동 주변에는 잡목이 없었고 측백나무와 노송 등이 온 산에 어지러이 서 있었다. 


    4월 22일, 정유일

      구룡연으로 향해 갔다. 오늘은 함께 가서 바위 아래에서 자기로 약속했다. 앞에 있는 시내를 따라 3리가량 내려갔다. 동쪽 무성한 숲 사이로 수백 걸음 들어가는데, 감탕나무와 넝쿨, 그리고 측백나무가 길을 막아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안문천 서쪽 시내로 따라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또 수백 걸음을 가니 양쪽으로 갑자기 절벽이 양쪽으로 끊어져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었다. 그 아래로는 깊은 담(潭)이어서 갈 수 없었다. 다시 서쪽 절벽에 난 길을 따라 나뭇가지를 붙잡고 4, 50 걸음을 간 뒤 또 시내로 내려왔다. 물은 맑고 얕았다. 너럭바위가 길게 펼쳐지면서 어떤 곳은 담(潭)이 되고 어떤 곳은 웅덩이가 되기도 하였다. 

    가면 갈수록 이제 절벽은 열리고 골짜기는 트이기 시작했다. 20리 정도 가니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산기운이 축축해지나 싶더니 가랑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니 찬 기운이 살을 에일 듯 춥다. 나무 등걸을 불태워 몸을 따뜻하게 하면서 큰 바위 틈에서 팔베개를 하고 선잠에 들었다. 

    이윽고 날씨가 개려하자 성정이 갑자기 갈 것을 재촉한다. 나는 기꺼워하며 3, 4리를 애써 갔지만 어두운 하늘은 다시 여전해 찬 산기운과 비에 더욱 오한을 느꼈고, 그 사이 옷은 온통 젖어버렸다. 일행들도 모두 비 때문에 추워 갈 수 없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하므로 그들의 뜻에 동의하였다. 이날 걸은 것이 왕복 50여 리가 되었다. 고원적암에서 숙박하였다.

    비로봉(毘盧峰)을 오르면서 조선의 산하(山河)를 논하다.


    4월 23일, 무술일

      새벽 무렵 성정이 나가서 천기를 보고는,

    “오늘은 일기가 맑을 듯하니 비로봉에 올라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밥을 재촉해 먹으니 여명 무렵이 되었다. 길을 나서 절 서쪽 시내를 따라 갔는데, 시내는 말라 있었다. 계곡을 건너 똑바로 북쪽으로 약 15리 정도를 걸으니, 시내 두 개가 합류하는 곳이 나왔다. 다시 동쪽 시내를 따라 7, 8리를 가는데 길이 험하여 가파른 절벽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넝쿨을 의지하여 가다 보니, 행보는 늦어졌다.

    간신히 산허리에 이르렀는데, 바위에서 물이 흘러내려 웅덩이가 된 곳이 있었다. 물이 맑고 차가워 마실 만하였다. 바위틈에 다른 풀은 없고 다만 이미 쇠어버린 산겨자만이 있을 뿐이었지만, 돌아갈 때 무리로 있는 겨자 중에서 살지고 큰 것을 백여 줄기 골라 점심 반찬으로 쓰게 하였다. 

    숲을 슬슬 거닐면서 마음껏 시를 읊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을 먹은 뒤 다시 바위 모퉁이를 잡고 5, 6리 가량을 가자 비로소 영랑재(永郞岾)에 오를 수 있었다.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의 기이한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봉우리와 바위들 중에는 사람이나 새, 짐승 모양도 있었다. 

    사람 모양의 돌들은 앉거나, 일어서 있거나, 쳐다보거나, 내려다보는 등 다채로웠다. 그 형세로는 장군이 진용을 정리하며 명하자 백만 군졸들이 창을 쥐고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일제히 달려가는 듯한 것도 있었다. 또 노승의 공(空)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가사를 어지러이 입고 용맹 정진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소위 새 모양이라고 하는 것들 중에는 날개를 편 것, 부리로 쪼는 것, 새끼를 부르는 것, 꼬리를 숨기는 듯한 것들이 있었다. 그 형세로 어떤 것은 기러기 떼가 행렬을 이루어 가을 하늘에 점점이 벌여있는 듯 하거나, 난새가 외로이 배회하다가 거울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듯한 것도 있었다. 

    이른 바 짐승 모양의 것들 중에는 웅크린 것, 엎드린 것, 달려가는 것, 누워있는 것 등 다양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저녁햇살이 내리비치는 속에 양떼가 흩어져 풀을 뜯는 듯한 것도 있고, 무리를 이룬 사슴들이 험준한 곳을 뛰다가 발을 헛디뎌 놀라 떨어지는 듯한 것도 있었다. 

    이런 것에 취하다보니, 망고봉과 만폭동에서 올려다보며 감탄했던 것들은 모두 어린 아이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영랑재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는 4, 50리 정도였는데, 그 사이는 온통 해송과 측백나무뿐이었다. 나무들은 바람에 견디다 쓰러져 넓게 퍼져 서로 얽혀서 있었는데 짙은 푸른 하늘이 나무의 파란 색깔과 잘 어울려 있었다. 나무들의 높이는 대략 3장(丈) 정도였으므로, 사람이 그 위를 걷는다면 마치 풀로 만든 시렁을 밟고 가는 듯한 느낌이리라. 

    여강 지능(志能)이 발을 헛디뎌 4, 50 걸음 정도를 굴렀으나 천만다행하게도 아래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4, 5백 걸음을 가서야 비로봉에 올랐다. 시원스레 두루 사방을 보니 넓고 아득함이 끝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 오르자, 천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듯 시원하였다. 비록 날줄 아는 새라도 내 위로 솟구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날 천지는 맑게 개어 사방에 작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성정에게,

    “물을 보면 반드시 그 근원을 찾아야 하고 산에 오르면 반드시 제일 높은 곳을 올라야 하니, 거기에는 달리 방편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우리나라 산천에 대해 다 설명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성정이 소상히 설명하기를,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거의 2천 리가 되면 회양(淮陽)에 이르러 철관령(鐵關嶺)이 됩니다. 동쪽으로 불끈 솟아서는 추지령이 되었고, 다시 웅장하게 백여 리를 뻗어 고성(高城)에 이르러 비로소 금강산이 되었습니다. 비로봉에 이르러 우뚝 솟음으로써 동쪽으로 서린 끝을 맺었습니다. 여기에서 갈라진 봉우리들과 거기에서 또 이어져 만들어진 골짜기들이 서로 뛰어남을 자랑하며 다투어 달려가니,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북쪽에는 긴 고개가 두루 얽혀 있는데, 곧게 솟아 구름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육진(六鎭)의 산일 것입니다. 험하고 가파른 산이 특히 빼어나기 마련인데 다만 뾰족한 정상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묘향산(妙香山)의 정상의 봉우리일 것입니다. 제가 지도를 본 적이 있었는데, 함경도의 군과 읍은 모두 바닷가를 따라 곧바로 벌여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면, 두만강 이남의 모든 진(鎭)들은 서쪽으로부터 시작되어 동해로 곧추 들어갑니다. 동쪽은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끝이 없습니다. 

    영동 지역의 모든 군(郡)은 흰모래와 큰 호수 사이에 가려져 있습니다. 남쪽으로 푸른 산들이 비스듬히 실처럼 이어져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안개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여 더더욱 변별하기 어렵습니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저녁 햇살은 오히려 푸르스름하며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로 물드니 그 산과 바다를 가히 알 수 없습니다.


    꼽을 만한 산으로는 검산(劍山, 영흥), 오도산(五道山), 황룡산(黃龍山, 이상 안변), 설악산(雪嶽山, 양양), 오대산(五臺山, 강릉), 치악산(雉岳山, 원주), 두타산(頭陀山, 삼척), 저산(猪山, 양구), 청평산(淸平山, 춘천), 용문산(龍門山, 지평), 백운산(白雲山, 영평), 천보산(天寶山, 양주),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 보개산(寶蓋山, 철원), 수양산(首陽山, 해주), 구월산(九月山, 장연) 등이 있습니다만, 어떤 것은 언덕처럼 완만하고 어떤 것은 칼끝처럼 날카롭습니다. 오직 치악산만이 약간 솟아 우묵할 뿐이고 그 남쪽으로 구름에 가려 하늘로 솟구쳐 있는 산이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말합니다만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이 봉우리(금강산 비로봉)는 네 군데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동쪽으로 뻗어 일출봉(日出峰)과 월출봉(月出峰), 구정봉(九井峰) 등이 되었습니다. 구룡연의 서쪽입니다. 월출봉에서 남쪽으로 꺾어지면서는 안문봉, 미륵봉, 설응봉 등이 되었고, 미륵봉에서 서쪽으로 돌면서는 시왕봉, 망고봉, 혈망봉 등 여러 봉우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만폭동의 동쪽입니다. 또 하나는 남쪽으로 달려 원적봉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북쪽으로 내달려 영랑재가 되었습니다. 이 재는 다시 흩어지면서 서남쪽 내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를 이루었으니 바로 정양사의 동쪽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따르는 종에게 성정의 이러한 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바위에 홀로 기대어 호연(浩然)한 마음으로 시를 읊조렸다. 그리고는 흥이 일어 마침내 바위 사이에 시를 써놓았다. 그리고는 유람을 마치고 올라왔던 길을 따라 내려와 원적암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었다. 

    남쪽으로 3리를 갔다. 다시 안문천을 건너 푸른 등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숲속을 지나갔는데,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또 10리를 갔다. 길은 매우 힘들고 높았다. 뒷사람은 앞사람의 신발창을 보면서 가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면서 가는 것 같았다. 우거진 나무를 부여잡고 오르고서야 비로소 안문봉에 다다랐다. 다리가 너무 아파 풀을 깔고 누워 시를 읊조려봤다. 그렇지만 아픈 다리는 쉬 풀리지 않았다. 안문봉으로부터는 내금강과 외금강이 나누어진다. 내금강은 모두 바위였다.

    이 봉우리를 넘어서야 비로소 흙을 밟았다. 동쪽으로 5리쯤 내려와 상원사(上院寺)에서 유숙하였다. 이날 걸은 것이 80여 리 정도 되었다.


    4월 24일, 기해일

    아침이 되어, 성정을 불러 그에게 말하기를,

    “우뚝 솟아 고요히 있는 것은 산일세. 나는 그것이 산으로 여겨지는 까닭을 아네. 그 움직이지 아니하는 이치를 몸으로 익히게 되면 두텁고 무거워 한군데 머물러도 흔들리지 않는 인(仁)을 세울 수 있을 것이네. 물결을 잔잔히 일으키며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물일세. 나는 그것이 물로 여겨지는 까닭을 아네. 물의 흐름을 관찰하면 역시 두루 흘러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지혜를 깨우칠 수 있을 것이네. 하물며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에 오르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는 것이 학자의 일임에랴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만약 땅 끝까지도 좇을 수 있다고 여긴 뒤 있는 힘을 다해 몸소 그곳을 밟으려는 용기를 갖게 된다면 나도 옛사람에 미칠 수 있으리라. 자네 불가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있는가. 어제 등정에서 그대는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동쪽으로 산허리를 돌아 구곡재(九曲岾)를 지나서 거의 5, 6리를 갔다. 대장암동(大藏巖洞)이 나왔는데, 바위는 깨끗하고 희며 시냇물은 맑고 넓어서 안문동과 비슷하였다.

    또 5리를 가다가 북쪽으로 꺾어 올라갔다. 계조굴암(繼祖窟菴)이 나왔고, 다시 이 암자의 동북쪽으로 5, 6리를 가서는 구정봉(九井峰)에 올랐다. 구정봉의 봉우리는 거대한 암반이 우뚝 솟아오른 것이었다. 봉우리 남쪽으로 있는 나무 사다리는 그리 높지 않았다. 바위의 구석구석에는 웅덩이가 있는데 우물과 같은 것이 아홉 개를 넘는다. 옛날에 두타산 오십정봉(五十井峰)을 오른 적이 있었는데 이에 비해 훨씬 기이해 보인다. 거빈굴 앞에는 계수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에 이르자 다른 잡목은 보이지 않았고 그 나무들뿐이었다.

    이윽고 동쪽으로 우거진 숲속을 3리쯤 가니 상초막(上草幕)이 있고, 서쪽 계곡을 5리쯤 내려가니 하초막(下草幕)이 있었는데, 두 곳 모두 승려는 없었다. 

    4, 5리를 더 가니 운서굴암(雲栖窟菴)이 있고 운서굴암의 서쪽으로는 외개심암(外開心菴)이 있었다. 외금강의 물들이 모두 이 암자 앞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십이폭(十二瀑)이었다. 운서암 앞으로는 너럭바위가 길게 펼쳐져 있는데 맑은 계곡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에 너무 취하여서 바위 위에 고요히 앉아 있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성정이 일어나기를 재촉하고 나서야 알았다. 

    동쪽으로 5리를 가니 적멸암이 나왔는데, 이 암자는 십이폭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암자의 주지 지희(智熙)는 산중 음식을 갖추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가다가 백전암(栢田菴)에서 쉬었다.

    동쪽으로 세 개의 작은 고개를 넘어갔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환희재(歡喜岾)에 올랐다. 지팡이를 짚고 홀로 서 있자니 바다와 하늘은 희미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동쪽 바위 봉우리들이 묶인 듯 솟아있고, 남쪽의 삼나무와 회나무들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평생의 가졌던 훌륭한 느낌이 이곳에서 모두 나왔다. 서쪽으로는 산허리와 나란히 나있는 돌길이 험준하였다. 짚고 있는 지팡이가 없었다면 의지할 것이 없었으리라.

    남쪽으로 길을 바꿔 다시 10리쯤 갔다. 다시 산등성으로 올라보니, 동서쪽이 모두 아득한 절벽 골짜기인데, 만약 한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면 떨어질 듯 위태하다. 이곳이 이른 바 소인곶(小人串)이다. 어렵고 위험한 곳을 힘써 지나면서 성정에게 말하기를,

    “이 고개가 이처럼 험하니 정말 소인일세. 만물의 이름들이 그 이름을 헛되이 얻은 것만은 아니로군."라고 하였더니 성정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다.

    소인곶에서 부터 l5리를 가는 사이에는 봉우리가 여덟 개나 있었다. 가면 갈수록 험하였다. 소인곶의 서쪽으로는 원통곶(圓通串)이 있는데 그곳에서 십이폭천(十二瀑川)을 건널 수 있었다. 십이폭천의 서쪽에는 성불암(成佛菴), 불정암(佛頂菴) 등이 있다. 이때 성정이 묻기를,

    “유점사(楡岾寺)는 외금강산의 거찰인데 어째서 가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산수를 즐기기 위하여 멀리 유람 와 맑은 계곡으로는 샘물과 돌이 아름다운 만폭동에서 모두 즐겼네. 높이 올라 조망하는 것이라면 비로봉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네. 하물며 땅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경치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음에랴.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요, 큰 것은 작은 것이 극대화된 것일세. 높고 큰 것을 이미 직접 목도하였으니 작고 낮은 것으로 어찌 내 발을 고생시키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이어 말하기를

    “높고 낮고, 크고 작은 것은 모두 사물의 형세일세. 만 가지가 다르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사물의 움직임과 고요함은 나의 그것과는 다르나 근본이 하나라는 입장에서 보면 사물 또한 나일세. 이처럼 각각의 눈으로 보면 산의 푸름과 물의 아득함은 다만 그들의 형체와 색깔이 내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네. 하지만 사물이 곧 나이고, 내가 사물이라고 볼 때 푸름과 아득함은 모두 내 성정(性情) 가운데의 하나일세. 도(道)에는 나와 사물의 구분이 없고 이치에는 저것과 이것의 구분이 없지. 큰 것을 보아 작은 것을 살피는 것, 높은 것을 거론하여 낮은 것을 비유하는 것은 진실로 도에 어떤 해도 없다네. 내가 유점사를 완상하지 아니하는 뜻은 이것일세."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시내 하나를 건너 발연사(鉢淵寺)이 이르렀다. 이날 걸은 것이 대략 60여 리였다.

    발연(鉢淵)에서 구룡추(九龍湫)로


    4월 25일, 경자일

    아침 늦은 시간이었다. 발연사 주지 성공(性空)이 절 뒤의 바위로 안내했다. 바위 위에 비석이 있는데 바로 신라 승려인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사리를 묻은 비석이라 한다. 고려의 승려 형잠(瑩岑)이 비문의 글을 지은 뒤 승안(承安) 5년(1200년, 고려 신종 3년) 5월에 세워진 것이었다. 비석 옆으로 마른 소나무가 있는데 뿌리 하나에 두 개의 줄기가 났다. 가지 하나는 말라 죽었고 하나는 살아있었다.

    성정, 그리고 주지 성공과 함께 절의 서쪽에 있는 폭포수를 보러 갔다. 하나의 절벽이 하나의 바위로 이어지고 그것이 길게 쪼개져서 횡으로 퍼져 있었다. 돌의 희고 매끄럽기는 마치 은과 같았다. 폭포가 치면서 물이 쏟아지고 이로 인해 밑은 절구처럼 파여 깊은 못을 만들고 있었다. 물은 얕고 넓게 퍼져 흐르고 있었다. 그 중 어떤 곳은 맷돌로 갈아낸 듯 긴 도랑이 되었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만든 듯 정묘했다.

    승려들이 재미있는 놀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풀을 꺾어 묶은 뒤 그 위에 앉아서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 내려가면 빠르기가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한다. 이 물놀이에 익숙한 사람은 물길을 따라 교묘하게 돌아 내려가곤 하지만, 처음 타는 사람은 제멋대로 가다가 머리와 발이 옆으로 굴러 못의 바닥으로 완전히 빠져버린다고 전한다. 한 번 해보라고 성정에게 권유했다. 그는 타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과연 머리는 거꾸로 향하고 몸은 가로로 돌아간 채로 내려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 물놀이를 해도 몸이나 피부를 다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놀이에 싫증을 내지 않고 재미있어 한다고 하였다.


    4월 26일, 신축일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느지막이 날이 개자, 주지 성공의 말을 빌려 배낭을 싣고 탔다. 절이 속한 골짜기를 나서 1리가량을 가니 물이 고인 담(潭)이 있었는데, 흰 돌이 절구처럼 푹 파였고 그 둘레는 수백 척이나 됨직하였다. 위에 물이 있어 그리로 흐르는데 그 물이 넘쳐흘러 다시 담(潭)이 되었다. 그 아름다움은 만폭동과 가히 다툴 만하였다. 성정이 안내하기를,

    “이곳이 구담(臼潭)으로 구룡추(九龍湫)와 그 아름다움을 다툽니다."라고 했다.

    동쪽으로 15리쯤을 더 가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평평한 암반이 넓게 펼쳐졌고, 또 한 고개를 넘으니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성정을 불러 말하기를,

    “띠풀을 엮어 집을 지을만 하고 닭, 개, 소를 키우고 살만 하네. 자네는 산 속의 외로운 수행자이지만 이곳을 함께 찾아왔으니, 세속을 벗어나 사는 즐거움을 생각해 보겠는가?"라고 농담을 했다.

    2리쯤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구룡추의 하류이다. 여기서부터 구룡추까지의 거리는 약 10여 리쯤 된다고 한다. 하지만 허국선과 남시보가 통천(通川)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결국은 가지 못했다.

    3리를 가니 바닷길이 나왔다. 바로 영진곶(靈律串)이다. 작은 호수 하나를 지나 30리쯤 가니 바다에 임한 옹천(瓮遷)이 나왔는데, 몹시 아득했다. 조진역(朝珍驛)을 지나 10리쯤 가니 통천에서 말 탄 군사가 달려왔다. 

    또 25, 6리가량을 가서는 등로역(登路驛)의 종 김여석(金呂碩)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이날은 산길 20리와 바닷길 60리를 간 셈이었다.

    총석(叢石)을 둘러보다.


    4월 27일, 임인일

    해가 뜰 무렵이 되자, 출발하여서는 바다를 따라 20리를 갔다. 양쪽 길옆으로는 푸른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는데, 소나무 밖은 흰모래이고, 모래 저편은 드넓은 바다였다. 채찍으로는 푸른빛 나귀를 희롱하였고, 두 승려는 앞길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행색(行色)은 그윽하고 한가로워서 동정호(洞庭湖)를 날아 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통천까지는 다시 7, 8리쯤을 더 가야 했고, 마침내 청허당(淸虛堂)에서 허국선과 남시보 두 사람을 만났다. 청허당 앞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이 심어져 있어 자못 즐길 만하였다. 우리는 여기 통천에서 18리 떨어져 있는 총석정(叢石亭)으로 유람을 하기로 약속하곤 출발하였다.

    북으로 작은 고개를 넘은 뒤 다시 동쪽으로 길을 꺾었다. 10여 리를 가니 바다를 따라 긴 산이 꾸불꾸불 이어지면서 바다 입구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 정자가 불쑥 솟아 깎아지른 절벽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끼었고, 북쪽으로는 사선봉(四仙峰)을 굽어보고 있었다.

    여기 총석(叢石)은 바다 속에 뚝 잘려 서 있는데 그 높이는 수백 척이나 되는 듯했다. 한 묶음은 백 개의 장대를 뭉쳐 놓은 듯한데 기둥마다 여섯 면이었다. 그 기둥들은 마치 먹줄로 재어 정교하게 깎아 놓은 듯 고르고 곧았다. 매 꼭대기마다에는 여섯 면의 둥근 돌이 올려져 있었는데, 그 형세는 비스듬히 서 있는 것, 반쯤 쓰러진 것들이 종횡으로 몇 리에 걸쳐 있어 다 둘러보기 어려웠다. 삼면의 절벽도 모두 육면체의 돌기둥을 묶어 놓은 것 같았다. 헤쳐 보아도 이들은 모두 하나로 묶인 돌 줄기였다. 만약 바람이 갑자기 쌀을 일 듯 흔들흔들 불어서는 언덕을 가르고 벼랑을 무너뜨려 또 몇 개의 총석을 만들지 짐작키 어려웠다. 남시보가 말하기를,

    “어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동북을 중심으로 절벽으로 둘린 바다를 10리 가량 두루 찾아보았습니다. 또 천도(穿島)를 완상하였는데 더욱 기괴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도 해보고 싶었지만, 바닷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이 나빠서 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해보지 못하였다. 

    일찍이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를 읽으니 국도(國島)가 이 봉우리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였다. 조화옹의 조화가 어찌 여기에 이르러 이처럼 지극하게 되었을까?

    저녁 무렵이 되자,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파도가 달려드는 것이 눈보라 몰아치듯 하였는데, 어떤 것은 수백 척이나 되었다. 정말 장관이었다. 잠시 후 바다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도롱이를 쓰고 돌아왔다. 이날 이동한 거리는 바닷길 45, 6리, 물길 30리였다.


    4월 28일, 계묘일

    아침, 윤 군수(郡守)가 위로의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우리 세 사람은 취해서 춤을 추다가 자리를 마쳤다. 늦게 출발하여 10리가량을 갔다. 나는 말을 타고 동쪽 바다 갯벌을 행해 달려갔다. 금란굴(金幱窟)을 보고 싶어서였는데, 아마도 두 사람은 손가락질하면서,

    “필시 취했으리라."라고 말하며 웃었을 것이다. 마침내 금란산(金幱山) 아래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부는,

    "반드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바람이 세서 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모래 언덕에 앉아 금란굴 쪽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시를 읊조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문암(門岩)은 남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바위가 마치 문처럼 마주하고 있었다. 홀연 파도 머리에 엄청나게 큰 물건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죽은 고래였는데, 그 길이는 50여 척이나 되었다. 그 뱃속은 작은 배를 삼킬 만할 정도였고, 아래 턱에는 아래턱에는 수염이 있었다. 어떤 바닷사람이 말하기를,

    “고래에는 대, 중, 소가 있는데, 이 고래는 그 중 작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날은 조진역(朝珍驛)에서 묵었다. 이날 이동 거리는 바닷길 60리였다.

    고성(高城)에 도착하다


    4월 29일, 갑진일

    15, 6리쯤을 달려 영진곶(靈律串)에서 쉬었다. 이곳에는 호수가 있었는데 그 둘레는 5, 6리가량이었다. 어부의 가게에 머무르면서 밥을 먹었다. 어부가 산 전복, 문어, 바닷조개 등속을 가지고 왔는데, 점심으로 충분하였다.

    다시 13, 4리를 가서 양진역(養律驛)을 지나 용추(龍湫) 하류를 건넜다. 이날 고성에 도착하여 묵었다. 이날의 이동 거리는 바닷길 30여 리, 뭍길 30여 리였다.

    삼일포(三日浦)에서


    4월 30일, 을사일

    고성 동쪽으로 7, 8리를 가서 삼일포(三日浦)에 이르렀는데, 그 둘레는 6, 7리쯤 되었다. 봉우리들이 멀고 가깝게 겹쳐 은은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36봉’라 한다. 호수 가운데 소석도(小石島) 위에는 띠풀로 엮은 정자 한 채가 있었다. 정자 주변으로는 오래된 소나무 예닐곱 그루가 있는데 모두 꾸불꾸불 서려 있었고, 그 그림자는 호수 가운데에 잠겨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냈다. 

    동쪽 언덕 몽천암(夢泉菴)에 이르러, 어부에게 황어(黃魚) 몇 마리를 낚게 하여 회와 구이를 하도록 하였다. 가벼운 바람과 가랑비가 또 흥취를 돋웠으므로, 술을 몇 순배 돌렸다.

    이어 섬의 북쪽 소석봉(小石峰) 아래에 배를 정박시킨 뒤 바위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매향비(梅香碑)가 있었다. 원나라 지대(至大) 2년(1309년, 고려 충선왕 1년) 기유년에 건립한 것이었다. 매향비 옆쪽에서 동쪽으로 약 10여 걸음 되는 남쪽 석벽 아래에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고 쓴 붉은 글자(丹書)가 있었다. 옛사람들은 이를 네 분의 신선이 쓴 것이라고 여겼다.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글자의 획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여서 세상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어떤 호사가가 슬며시 붉은 칠을 해서 장난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붉은 글자 아래 ‘삼일 밤이라는 말 들을까 두렵다(恐聞三夜)’는 글자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이재(伊齋)의 글씨이다. 그 곁에 남계(南溪), 동촌(東村)이라는 호를 적어 놓았다.

    이윽고 천천히 노를 저어 나아가면서, 삼일포사(三日浦辭)와 율시(律詩) 두 편을 지었다. 천천히 지나치는 경물은 진정 절경이었다.

    이날의 여정은 15, 6리 정도 되었다. 


    5월 1일, 병오일

    아침이 되자, 함께 여행하였던 성정(性淨)은 유점사를 향해 떠났고 우리는 남쪽으로 갔다. 3리를 가니 남강(南江)이 나왔다. 이 강의 원류는 셋이라 한다.

    하나는 비로봉의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구룡추(九龍湫)를 만들고 일출봉, 월출봉, 구정봉 세 봉우리를 감싸 안으면서 대병암(大明菴)을 지나 온정(溫井)을 거쳐 20여 리를 흘러 발연천(鉢淵川)과 합쳐지니, 이른바 세존백천(世尊百川)이 이것이다. 또 하나의 원류는 환희점(歡喜岾)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소인곶을 거쳐 발연사를 지나 15, 6리를 흘러서 용추천과 합류한다. 다른 하나는 고정봉 서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운서굴(雲栖窟)과 외개심암(外開心菴)을 지나 십이폭이 된다. 10여 리를 흘러서는 유점사천과 합류되니 이른 바 성문[성문(城門)은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성문(聲聞)이라고 써야 하며, 이는 부처의 명호"라고 하였다.] 백천(城門百川)이 이것이다. 백천은 대개 동남쪽으로 흘러 주연(舟淵)을 이루고, 또 남쪽으로 흘러서는 흑연(黑淵)이 되며, 감돌아 북으로 흘러서는 전탄(箭灘)이 된다고 한다. 이들 세 원류는 모두 이곳에 이르러 남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고성포(高城浦)로 들어간다.

    마침내 누선(樓船)에 올라 강을 건넜다. 이날 구름이 짙게 끼고 안개로 앞이 어둑하여 풍악산(금강산)의 동쪽 지맥을 장쾌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귀신이 시기를 해서인가 싶었다.

    60여 리 떨어진 명파역(明波驛)까지 가서 쉬었다. 밥을 먹고는 다시 10여 리를 가서 열산현(烈山縣)을 지났다. 열산현의 북쪽 2리 무렵에는 큰 호수가 있었는데, 그 둘레는 수십 리나 되는 듯 넓었다. 언덕과 골짜기[陸谷]가 호수를 감싸고 있었는데 물이 가득하여 넘실거렸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큰 홍수로 인해 옛날 한 현이 물속에 잠겼는데, 하늘이 맑아지고 물결이 잔잔할 때에는 그 현에 있던 집들과 담장이 그대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거탄천(巨呑川)을 건너서 간성군(杆城郡)의 한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날 여정은 바닷길 100리였다.


    간성(杆城)에서 청간정(淸澗亭)으로

    5월 2일, 정미일

    아침이 되자, 군수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초청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관아로 가서 그를 잠깐 만났다. 

    그리고는 출발하여 11리를 가니 선유담(仙遊潭)에 이르렀다. 산과 나무들이 어지러이 두루 둘러싸면서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고 그 안에는 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남쪽으로 호수물에 반쯤 잠긴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큰 소나무 아래로 작은 그늘이 있어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보니 순채(蓴菜)가 호수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출발하여 7, 8리쯤 갔다. 눈과 같은 하얀 모래가 밝히고 있었는데, 사람과 말이 밟을 때마다 쟁쟁 소리가 났다. 바로 명사(嗚沙)였다. 영동 지방의 바닷길은 모두 그러한데,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의 모래소리는 더욱 맑았다. 또 해당화가 있어 어떤 것은 어지러이 피어있고 이미 열매를 맺은 것도 있었는데, 자못 기이하여 아름답다.

    능파도(凌波島) 부근에 이르렀다가 이 섬에 올랐는데, 섬의 서쪽은 모랫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빼어난 봉우리가 바다 어귀까지 솟아 있는데, 기암괴석들이 종횡으로 섞여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각기 한 봉우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서 바다의 경치를 즐겼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또 끝없어 보이는 푸른 바다는 탁 트인 채 그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었다. 잠시 후 갑자기 동풍이 불자 성난 파도가 해안을 들이쳤다. 마치 천군만마가 마구 달려오는 듯하였다.

    또 호수 하나를 지나 소나무 숲길 20리를 가서 청간역(淸澗驛)에 이르렀다. 역에 있는 정자는 바다와 겨우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약간 동쪽으로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그 높이는 수십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아래로는 흩어진 돌들이 바닷가에 어지러이 꽂혀 있었다. 바닷물의 맑기는 청동 거울 같았다. 간혹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사방으로 흩날렸다. 동쪽으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햇살이 너무 밝고 고왔다. 하지만 서쪽으로 설악산을 바라보니 비 기운을 머금은 구름이 먹을 뿌려놓은 듯 검었다. 

    해부(海夫) 네댓 명이 천 길 파도 속을 들락날락하면서 전복을 채취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날 여행길은 바닷길 45리였다. 


    5월 3일, 무신일

    새벽, 안개가 잔뜩 끼어 어둑해 기대했던 일출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하늘이 장쾌한 감상거리를 주려하지 않는가 싶었다.

    일출 보기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서 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5리를 가니 넓은 호수가 나왔다. 그리고 또 10리를 가니 영랑호(永郞湖)가 있었는데, 그 둘레는 20여 리나 됨직하다. 굽이져 도는 호수의 물가에는 온통 기암괴석이다. 호수 동쪽의 뚝 잘린 작은 봉우리는 호수 속에 잠겨 있었다. 바닷길 곳곳에는 방풍(防風)이 어지러이 나 있어, 하인을 시켜서 수백 뿌리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영랑호에서 5리를 가서 쌍성호(雙城湖)를 지났다. 쌍성호 서쪽 10여 리 되는 곳에 석봉(石峰) 하나가 보였는데, 마치 울타리처럼 꼿꼿하게 비껴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산(籬山)으로, 속언으로는 읍산(泣山)이라 한다고 하였다. 호수 동쪽으로 또 바위산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육지와는 실 같은 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비선대(秘仙臺)였다.


    23, 4리를 가니 낙산동(洛山洞)이 나왔다. 서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쪽 숲길로 들어갔더니 낙산사(洛山寺)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낙산사의 동쪽은 큰 바다와 접해 있어 경관과 흥취가 완상할 만했다. 시 구절 하나를 지어 동행에게 보여 주었다.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지의감로천부수(地疑甘露天浮水) 땅은 감로 땅인 듯한데 하늘은 물 위에 떠있다. 

    경승고소해작린(境勝姑蘇海作隣) 고소산 보다 나은 경치, 바다와 이웃했기 때문이다.

    이날 바닷길 60여 리를 갔다. 낙산사 동쪽 별채에서 묵으면서,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홀연 고래 떼가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5월 4일, 기유일

    새벽이 되었지만, 구름으로 일출을 볼 수 없어 하늘에 안타까움만 토로하였다. 아침이 되어서는 동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었다. 끝없이 퍼져있는 대나무를 헤치면서 1리쯤 가니 절 2칸이 굴 위에 얽힌 듯 있다. 파도가 그 아래로 들락거리며 바위에 부딪치면서 우렁차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낙산사 주지 휴정(休靜)은 불학(佛學)에 상당히 통달해 있었지만 약간 교만하여 그와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날 정오에 7, 8리쯤을 가서 대포(大浦)를 지났다. 대포는 만호(萬戶)의 군영이 있는 곳이었다. 다시 5리쯤 가니 큰 시내가 있기에 시냇가에서 쉬면서 밥을 먹었다. 저녁 무렵 양양(陽陽)에 도착했다.


    5월 5일, 경술일

    비가 왔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는 김기복(金基福)의 만류로 머물면서, 고을 원님인 남사문(南斯文)의 술대접을 받았다.


    5월 6일, 신해일

    비가 왔다. 앞강이 너무 불어나 건널 수 없었다.


    5월 7일, 임자일

    날이 개지 않았다. 또 술에 취해 다시 쓰러져 잤다


    5월 8일, 계축일

    김기복은 풍악산을 향해 떠났다. 우리 세 사람도 남사문과 이별을 고했다. 찰방(察訪) 박자정(朴子正)과 함께 배를 타고 남천(南川)을 건넜다. 25리를 가서 상운역(祥雲驛)에 묵게 되었는데, 박자정은 바로 이곳의 주인이었다. 또 술에 몹시 취했다.

    양양(襄陽)에서 경포호(鏡浦湖)를 거쳐 강릉(江陵)으로 가다.


    5월 9일, 갑인일

    15, 6리를 가서 관란정(觀瀾亭)에서 쉬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관란정 주변으로는 만 그루의 큰 소나무들이 정자의 동남쪽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정자의 서쪽 2리에 동산관(銅山館)이 있었다

    다시 출발하여 연곡현(連谷縣)의 경계에 이르렀다. 바다가 물을 끼고 도는 굽이마다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정도였다. 모래는 희고 바다는 푸르니 맑은 흥취가 저절로 일어 갑자기 말에서 내려 모래 위에 몸을 던져 미친 사람처럼 뒹굴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곡에서 다시 15, 6리를 가니 소나무 사이로 큰 호수가 은은히 비친다. 허국선과 남시보가,

    “이것이 경포(鏡浦)가 아닌지요?"라고 물었는데, 거짓으로 아니라고 말하였다. 수백 보를 걸어 소나무 숲을 막 벗어나자마자 밝은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수면은 막 닦아놓은 거울 같았다. 산봉우리가 호수 굽이의 물가로 둘러쳐 있었는데, 그 둘레는 20여 리나 되었다. 허국선과 남시보가 그제야

    “정말 경포로군요."라고 말하기에 내가 손뼉을 치면서 한바탕 웃었다. 

    함께 말에서 내려 강문교(江門橋)를 산보했다. 조금 있자니 하늘에 남아있던 조각달이 소나무 사이를 헤집고 바다에 은은히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둠을 타고 강릉으로 가서 숙소를 잡았다.

    이날 바닷길 90여 리를 갔고, 물길 10여 리를 갔다.


    5월 10일, 을묘일

    부사 김사문(金斯文)이 우리를 위문하고는 떠나는 것을 만류하였다.


    5월 11일, 병진일

    부사 김사문과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먼저 나가서 척번대(滌煩臺)를 구경했다. 척번대는 강릉객관(江陸客館)의 북쪽에 있었다. 잠시 후 허국선과 남시보가 경포를 향해 떠났고, 나도 뒤따라가서 함께 즐겼다. 두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다녀본 못이 한둘이 아니지만 숲 우거진 봉우리가 아름답게 주위를 두르고 석양의 무지개다리로 사람이 지나가 그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것은 이 호수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일세. 하물며 곧바로 동쪽으로 바라보면 호수가 바다와 서로 이어져 그 사이로 흰모래가 비단 펼쳐 놓은 듯함에 있어서야.”라고 하였다.

    저녁 무렵 서북쪽으로 20여 리를 가서는 구산역(丘山驛)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