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문 아우 창흡〔祭文 弟昌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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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 아우 창흡〔祭文 弟昌翕〕
김창흡(金昌翕)
유세차 무자년(숙종34, 1708) 6월 임오삭 5일 병술에 아우 창흡은 삼가 떡과 술을 제물로 중씨(仲氏) 농암 선생의 영전에 공경하며 제사를 올립니다.
아, 가슴 아픕니다. 제가 중씨와 형제로 살아온 지 56년 세월, 두 살 차이로 태어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 날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지나간 세월을 회상해 보면 곧 통곡하거나 허둥대던 날들이 대부분이고 예법을 챙기면서 화락하게 지내던 날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라도 서로 의지하여 산림 속에서 10년 동안 함께 살아 보자고 기약하였습니다. 바로 중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제 몸은 이제 반쪽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하에 애처롭습니다. 우리 형제와 같은 경우가 또 없으나, 그 신세와 운명을 가지고 논하면 더욱 사람들은 중씨를 더 가엽게 여깁니다.
아, 살아서는 남들처럼 살아 보지 못하고 죽을 때는 남들의 죽음보다 더 참혹하였기에 저 길가는 행인도 울먹이고 왕래하던 문객들도 괴로워하는 바이니, 골육지간이야 더 이상 슬품을 말로 하겠습니까.?
대체로 중씨의 인의 도덕에 감복하여 현달하고 번창할 것을 축원했던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도 상응하는 보답을 받지 못했단 말이냐고 하고 가슴속에 쌓은 경륜을 대강 알아 그 문장과 경술(經術)을 애석해 하는 사람은 어찌 한둘이라도 시험해 보지 못했단 말이냐고 하면서 혹은 복이 극에 이르자 다시 깎아 줄인 것이라 하여 천도(天道)에 유감을 표하는가 하면 혹은 국가의 운이 시들어 인물이 죽었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仁)을 좋아하고 재주를 아낀 나머지 대체로 모두 극도로 애통해하는 모습입니다. 중씨 당사자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우의 우매하여 큰 마음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가슴이 훤히 트여 아무런 간격이 없었습니다. 무릇 아름다운 물건과 좋은 일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것을 거부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미 천지간의 한 죄인으로 자처하였으므로 곤궁이 곧 자신의 분수가 되었다. 어찌 복을 받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찍이 유현(儒賢)의 처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중씨께서는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도를 크게 행함에 항상 공자와 맹자 같은 성현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으며, 정자와 주자 같은 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났으나 겨우 환장각(煥章閣)에서 시강(侍講)하거나 행궁 편전(行宮便殿)에서 아뢰는 정도에 불과하다. 곧 현자가 가는 길이 험난하여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의 바른 법을 버리고 수준을 낮추어 곧 업적을 이루거나 임기응변의 수단을 부린다면 구차한 것이다. 더구나 천도를 통달하지 않아 이치에 맞지 않고 문장이 지리를 알지 않아 곱게 꾸며대는 것을 공으로 삼는 경우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이와 같이 논한다면, 곧 무릇 세상에서 중씨를 위해 유감을 표한 것들은 모두 중씨께서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아 보자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처지를 슬퍼한 것이지, 마음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년의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그 득실을 따진 자는 일개 한 사람을 위해 슬퍼하였다. 당대 세상의 재주를 논하면서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해하는 자는 겨우 한 나라를 위해 애도한 것입니다.
오직 이 학문은 유구한 세월 동안 오히려 완전히 밝히지 못하였다. 식자의 마음에 맺힌 한이며 또한 중씨가 눈을 감지 못한 점입니다. 모름지기 요순시절 신하인 직과 설과 같은 업적을 이루는 것이 그의 소임이 아니고, 따로 스스로 짊어진 짐이 매우 컸으며, 왕자교(王子喬)나 적송자(赤松子)와 같은 장수는 그의 기대가 아니고, 늙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끈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그 유감을 말하는 것이 비로소 중씨의 마음을 아는 진정한 눈물이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지는 자연의 도가 있고 성인은 경전의 이치가 있으며 대현(大賢)은 훈고(訓詁)의 의리가 있습니다. 천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성인이 말하니 이것은 천지가 성인을 기다린 셈이 되고, 성인의 경전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것을 대현이 풀이하니 이것은 성인의 경전이 훈고를 기다린 셈이 되며, 훈고로 다 풀이하지 못하고 남겨 둔 것은 후대의 학자가 다뤄 주기를 기다렸으니, 이 또한 주자의 심오한 뜻입니다.
주자 이후로 의리가 크게 밝아져 더 이상 강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말은 사람들의 안목을 어둡게 하기 쉽습니다. 만일 이런 설이 맞는다면 주자 이후에 학문하는 자는 과연 예법만 지키고 학문은 널리 닦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주자가 “내가 한 공부를 나와 똑같이 하지 않는다면 나의 경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주자를 모르면서 또 누구를 감히 말하겠습니까. 중씨께서는 매번 이 아우와 이에 관해 언급하면서 세상 유자들의 고루한 식견에 통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 우리의 도는 학통이 우리 동국으로 들어와 황무지가 개척되자 오랑캐의 고루한 풍속이 약간 바뀌었으며, 주자의 학문에 대해 도산(陶山 이황(李滉))이 깊이 연구하고 석담(石潭 이이(李珥))이 드러내 밝힌 일은 바뀐 풍속으로 인해 생긴 뛰어난 경우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리는 무궁하고 문견은 한계가 있는 법이므로 이따금 결함이 미봉한 데서 생기거나 잘 꾸민 것이 도리어 본의를 어둡게 만들기도 하였으니, 도가 밝아지기 어려운 사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인데 비뚤어지거나 올바로 되는 것이 고개를 들거나 숙이는 사이에 좌우되고, 어두워지기 쉬운 것이 눈인데 눈동자를 돌리는 사이에 백태가 낍니다. 이 때문에 혹은 성현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기의 뜻에 맞추는가 하면 혹은 남북의 갈림길을 분간하지 못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다 마음과 눈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다행히 잘못 이해한 오류를 면할 경우에는 또 마음이 흡족하고 입이 무거워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 이는 곧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논변이 회옹(晦翁)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이유이며 자후(子厚 장재(張載))의 필력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경외심을 일으킨 이유입니다. 수레는 일단 꾸며 놓은 다음에 사람이 그것을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널리 배우고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무난히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도학이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실체를 온전히 갖춰야 하는 점이 있고, 인품에는 단점과 장점을 은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고금의 인물을 대상으로 본심을 지켜 보전하고 실천을 독실하게 한 경우를 찾아보면 우리 중씨처럼 뛰어난 자가 사실 없는 것은 아니나, 도리를 묻고 배우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이 아우는 우리 중씨에게만 하늘이 가르쳐 주고 신령이 풀이해 주어 그 능력을 독차지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대체로 하늘로부터 얻은 자질이 사실 총명한 데다 공평한 마음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비범한 논변의 재능을 겸비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다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릇 수면처럼 반듯하여 만물이 기준을 취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고 거울처럼 맑아 사물의 형체를 계속 비추더라도 지치지 않는 것은 밝은 것인데, 대지의 기반이 바르게 자리를 잡고 하늘의 밝은 빛이 내리비추는 가운데 느긋하게 물러서고 여유롭게 전진하면서 그 중앙으로 들어가서는 장차 그대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면서 털끝만큼이라도 노력을 그만두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얕고 깊은 데를 순서대로 경험을 쌓아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았다. 어지러운 이 손에 닿으면 이치가 풀리고 응어리져 뭉친 부분이 칼집이 들어가면 결에 따라 나누어졌습니다. 곧 처음에 그것을 알기 쉽게 하고 나의 마음을 비워 느긋하게 음미하였다. 마지막에 그것을 문장으로 써낼 때는 착오가 없어 시원하였습니다.
대체로 눈이 마음을 따라 밝아져서 이 뜻의 참모습을 보게 되고 붓이 혀와 일치되어 오묘한 풀이가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전달하는 묘리를 논한다면 마음과 눈, 붓과 혀가 하나로 융화되었다. 훤히 통달한 공효를 연구하면 곧 경전의 가르침과 천지의 이치가 모두 기다렸던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주자가 기다리는 그 인물이 곧 우리 중씨가 아닐까 합니다.
무릇 고상하고 트인 자질로 겸허하게 각고의 공을 들였다. 이는 곧 우연한 가지이다. 또 천리를 받든 자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조정에 두지 못하고 적막한 임야에 내던진 것은 아마도 총명을 더욱 배양하여 크게 키울 만한 업적을 이루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대체로 한 글자의 분명한 뜻을 가지고 한 세상의 이상 정치를 얻어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당대의 조정이 유능한 보좌를 잃어 주자에게 충신이 없게 할 수는 없다. 또한 한번 세상에 파견한 뜻이 있지 않았다.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주자가 한가로운 가운데 학업을 닦는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역시 옛날이 지금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은근히 중씨의 뜻을 헤아리고 보면 중씨 또한 하늘이 부여한 책무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더욱 정진을 거듭하여 질병을 이유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건강을 주어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여유 있게 은근히 일신과 세상의 성쇠를 다 잊고서 학문을 즐겨 근심 걱정을 몰랐으니, 또 어찌 그 수명이 이 정도에서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아, 애통합니다.
평생에 진정으로 주자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원하였으나 그 소원을 이룬 것은 겨우 몇 권의 상소문 목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 경전에서 보완하지 못하여 삼례(三禮)의 많은 내용과 『주역(周易)』의 심오한 의미에 관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슴속에 처량하게 나열되어 있으면서 오늘을 교화하고 후대에 전수하려 한 것들이 장차 이 세상을 하직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후학의 귓전에 넘쳐흐르는 그 고명한 말씀과 오묘한 논리는 아직도 여운이 감돌고 있는데 마침내 날로 멀어지고 날로 잊혀 가게 되었습니다.
살펴보다가 이것저것 기록해 놓은 문자를 열람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66세 때 지은 시를 기록하고 있다.
나이 십 년만 되돌린다면 使我却十年
또한 큰일을 이루겠구나 亦可少集事
어찌 무심한 천지 간에 如何天地間
세월 다시 돌아올 이치 없구나 日無再中理
또한 밑에 주를 달기를, 내 나이가 지금 52세로 견주어 볼 때 13년이 더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것을 기뻐하며 앞을 향해 한층 더 노력하면서 단지 늙기 전에 집중하여 늙은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려 하였다. 그 뜻이 장대하다.
만일 수명을 더 늘려 소옹(邵翁)의 나이 정도에 이르러 본디의 소원을 이루었더라면 한가로이 음양의 이치를 음미하며 장차 번개를 채질하고 바람을 잡아 올라타는 조화를 부리는 영역으로 들어가 그 수준이 여유로웠을 것입니다. 오직 이 8, 9년을 하늘은 장차 누구에게 주려고 중씨에게서 떼어냈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중씨는 이 유학에 대해 정관(靜觀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단서가 열렸고, 중간에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문정에 출입하여 거의 문장을 가지고 세상에 표방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문이 화를 당해 자신을 폐기한 뒤로 화려한 것을 줄이고 또 줄임으로써 숙련된 것은 생소해지고 생소한 것은 숙련이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돌아보면 이 아우가 스승을 얻은 일은 마치 자유(子由 소철(蘇轍))가 자첨(子瞻 소식(蘇軾))에게 배운 경우와 같았습니다. 처음에 절차탁마한 것은 다만 문자를 가지고 하면서 밝은 식견과 민첩한 재주를 내심 견주어 보기도 하였으나 중씨가 진보하는 속도는 말 10필을 몰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았다. 참으로 이른바 내가 걸으면 걸어가고 달리면 달려가다가 내 수레를 앞질러 가는데 발에 흙먼지도 묻지 않고 저 멀리 달려감에 이르러서는 뒤쪽에서 눈이 놀랐다.
성장하여 뜻이 전하지 못할 때 시를 평하고 문장을 논하면서 중씨가 두보, 이백을 말하면서 내가 두보, 이백을 거론하고 시대를 거슬러 포조(鮑照), 사조(謝脁), 조식(曹植), 유정(劉楨)까지 올라가 함께 즐겼고, 중씨가 한퇴지(韓退之), 구양수(歐陽脩)를 거론하면 제가 한퇴지, 구양수를 거론하고 시대를 거슬러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 『좌전(左傳)』, 『국어(國語)』까지 올라가 중씨를 따라 좋아하였습니다.
일을 하면서 게을러지고 마음이 주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 데다 한번 죄인이 되어 온갖 인연이 모두 허무해진 뒤에는 서리가 내리고 물이 줄어들어 근본을 돌아보는 때가 되었습니다.
중씨가 수(洙), 사(泗), 염(濂), 낙(洛)을 거론하면 제가 수, 사, 염, 낙을 거론하여 즐기는 취향이야 변했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념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두보, 이백, 한퇴지, 구양수가 이제는 수, 사, 염, 낙으로 변하였고 이전에 미산(眉山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가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아름다운 전례를 뒤따라 이루어 보려 했던 것이 이제는 하남(河南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함께 도학을 강론했던 전례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서로 다정하게 학문을 연마하여 무한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세상길은 험난하고 사우(師友)의 도가 닫혀서 문밖을 나가더라도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간혹 한번 나가 뜻에 맞는 벗을 찾아보면 가는 곳마다 생소하여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결국 서글픈 심정으로 돌아와 중씨를 모시고 소리를 길게 뽑아 시가를 읊조리노라면 고저장단의 가락이 잘 들어맞는 상대가 곧 여기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곤 하였습니다.
오경(五經) 백가(百家)와 삼재(三才) 만상(萬象)에서부터 구주(九州) 오악(五岳)의 온갖 기괴한 것까지 거론할 대상으로 삼아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에 관해 토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토론을 시작하면 반드시 끝까지 하여 온종일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등불 아래에서 첫닭이 울 때까지 계속하면서 지친 줄 몰랐습니다.
때때로 헤어져 따로 지내더라도 만나면 반드시 새로운 강론이 있고 운치도 있었습니다. 산이며 강물로 인해 서로를 향한 우리 형제의 정신은 막히지 않았으니, 우뚝 솟은 설악산의 백연(百淵 백담(百潭))이며 넘실대는 미호(渼湖)의 삼주(三洲) 사이에 높은 허공의 솔개와 깊은 물속의 고기가 서로 오가는 데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산 위의 밝은 달과 물가의 맑은 바람을 한가로이 읊조리고 즐기는 데에 흉금이 쏠려 있었기에 이처럼 속세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다만 저 한계령(寒溪嶺) 한 구역은 일찍이 중씨가 발자취를 남겼으나 백연은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백연 곁에 나의 정사(精舍)가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학문을 익히는 낙을 중씨와 함께 누릴 생각이었고, 중씨도 이곳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조만간에 중씨의 건강이 회복되면 중씨를 모시고 흰 구름, 밝은 달과 어울려 고사리를 캐던 절사(節士)의 옛터를 더듬고 계수나무 숲에 노닐던 은자의 여운을 찾으면서 한두 명의 선비를 모아 시를 짓던 고사를 함께 따라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에서 늘 떠나지 않았으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씨가 강석(講席)을 펼 만한 산속의 새 절에서 삼례(三禮)와 『주역(周易)』에 관한 연구를 곧 마무리할 생각이었으나 만년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사가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겨울 백연에서 제에게 편지 한 통을 써서 깊은 산속 얼음과 눈 덮인 가운데 반가운 벗이 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렸더니 중씨가 기뻐하며 보내 준 답장에 너무도 부러워하는 말씀이 있었고 끝에는 또 서글퍼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중씨의 마지막 글이 되었습니다. 서로 헤어진 뒤로 6, 7개월 동안 남을 가르치면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알고 가슴에 가득 쌓인 의문과 멀리 돌아다니며 산수를 보고 느낀 감정들을 돌아가는 날을 기다렸다가 모두 낱낱이 토로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중씨의 병상 아래에 당도해서는 삼키고 뱉어내지 못하여 답답한 가슴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있을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 답답한 가슴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게으른 이 아우가 조금이나마 올바로 서고 약간의 도리를 알게 된 것은 중씨의 가르침 덕분이었으며, 그 때문에 오늘의 이 아우가 있는 것입니다. 흉변을 만나고부터는 간담이 다 뭉개지고 살아갈 맛이 뚝 떨어지니 지금 이와 같은 의식으로 어찌 다시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학업에 힘을 쏟을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보면 이제부터 중단되어 마침내 평소에 권장해 주던 뜻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 점이 또 슬퍼지는 부분입니다. 저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산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합니다만, 따져보면 이것은 제 속마음을 알아주는 말이 아닙니다.
백원(百源)과 나부(羅浮)에서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으니, 제가 어찌 시끄럽고 어지러운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세월을 보낼 일거리는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품에 안고 나의 옛 은거지로 돌아가 심력을 다해 연구하되, 중씨가 편찬한 차목(箚目)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막힘없이 알게 된다면, 그런대로 정신이 중씨와 서로 가까워져 생사가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태만해지는 때가 있으면 그때마다 중씨의 고명한 영혼이 자나 깨나 통하는 때에 일깨워 주어 공부가 퇴보하지 않도록 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가족 형제들의 슬퍼하는 심정과 정각에 쌓인 서적을 처리하는 문제와 자리에서 곡하는 부녀들이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학의 영원한 아픔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이를 위하여 끝없이 하소연하고 눈물이 흘림이 다 같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農巖集』
「祭文」 [弟昌翕]
維歲次戊子六月壬午朔初五日丙戌. 弟昌翕. 謹以餠酒之奠. 敬祭于仲氏農巖先生之靈. 嗚呼痛哉. 吾於仲氏. 忝爲兄弟. 五十有六歲矣. 二齒以差. 迄玆斑白. 追算其過去光陰. 則號咷蒼黃之日. 多占分數. 籩豆湛樂之時. 一何稀罕. 所欲補踦於未來者. 若將以林下十年爲期焉. 則仲氏逝矣. 吾其半體矣. 天下可哀者. 莫如吾兄弟. 而就其身命而論之人. 尤以仲氏爲可哀焉. 嗚呼. 生而不如人生. 死而有甚於人死. 行路之所於邑. 門客之所煩冤. 骨肉更何述哀哉. 蓋感服仁德. 所祝以顯融蕃衍者則曰. 何其報施之舛乎. 槪悉蘊抱. 所惜其文章經術者則曰. 胡不一二之試乎. 或以福極豐嗇. 致憾於天道
或以邦家殄瘁. 太息乎人亡. 是其好仁而惜才. 要皆百身之恫. 而未知於仲氏分上. 只可如此說否. 以弟之愚. 雅知其大心所存矣. 廓然一胞. 靡復間膜. 凡於美物好事. 有吾已擠之之意矣. 況旣自處以天地一罪人. 則窮爲吾分. 其肯安於致福乎否. 抑嘗奉敎於儒賢出處矣. 伊周之大行. 尙矣. 孔孟亦云棲棲. 卽如程朱際遇. 僅有煥章之講. 行宮之奏. 則賢路崎嶇. 知其已矣. 然捨吾正法而降. 就夫隨時事功. 副急手段則苟矣. 況經非通天而傅會是事. 文非緯地而藻賁爲功. 又其靡者乎. 今以此論之. 則凡世之爲仲氏所致歉者. 皆其已擠之福. 其欲裨益於邦家者. 不過爲救得一半計耳. 其相悲也. 謂之相悉則未也. 然則談百年之命. 而較其得失者. 是爲一人而悲也
論當世之才而惜此淪沒者. 是爲一邦而恫也. 惟斯文千古. 猶有未究之事. 是識者之所結轖. 亦仲氏之難瞑處. 須知稷契之業. 非其所任而別自擔荷者甚大. 喬松之壽. 非其所冀而欲用桑楡. 則有在如是說. 恨方爲知己之淚耳. 竊謂有天地自然之道. 有聖人經典之理. 有大賢訓詁之義. 天地之所不言. 聖人言之. 是爲天地待聖人也. 聖經之所未晣. 大賢釋之. 是爲聖經待訓誥也. 訓誥之所留蘊. 千古是待. 亦朱子無窮之意. 有謂朱子以後. 義理大明. 無待講硏. 此言易瞎人眼目. 若如是說. 則爲學於朱子後者. 其將有約而無博乎. 無某工夫看 . 某底不出. 又誰說也. 仲氏每與弟言此. 未嘗不痛惋於世儒之陋也. 噫. 武夷邈矣. 吾道其東. 天荒旣破. 夷陋稍革. 陶山之沈潛. 石潭之開發. 由此其選也. 然義理無窮. 聞見有局. 往往罅漏. 從補苴而生出張皇. 反使之幽曖. 道之難明. 豈有了期乎. 抑又有難者. 難平者心. 欹正在於俯仰. 易眚者目. 障翳生於眄睞. 或驅脅聖賢之言. 以從己意. 或迷錯朔南之歧. 以爲到頭. 此皆心目爲咎. 幸而得免其錯解. 則又意滿口重. 不能明白說出. 此延平辨論. 所以被短於晦翁. 子厚筆力. 所以見畏於明道者也. 輪轅飾然後人用其車不其信歟. 以此知博學而詳說之. 亦非易事. 除是有間世周才. 可以與此. 且道學有博約全體. 人稟有短長難掩. 今上下尙論. 求其操存之密. 踐履之篤. 勝如我仲氏者. 固亦有之. 至於問學一事. 愚竊以爲天授神解. 使獨專其能也. 蓋得乎天者. 固恁地聰明. 本之乎公平心量. 加之以發脫辨才. 此之謂咸備. 夫水平而萬物取準者. 公也. 鏡瑩而屢照不疲者. 明也. 地盤正矣. 天光注矣. 從容退步. 優游徐趨. 入其中焉. 若將沒身. 於此不參以一毫欲了之意. 於是淺深. 以序堅瑕. 靡擇棼然. 亂絲之綸. 到手. 則理. 砉然肯綮之會. 迎刃其解. 始則觀其會通. 吾與之虛而委蛇. 終焉命辭無差. 吾乃沛然. 蓋眼隨心透
而眞見斯立. 筆與舌謀. 而妙解乃出. 論其傳送之妙. 則心眼筆舌. 融爲一致. 究其貫通之功. 則經訓天地之理. 咸得其所待. 向所謂朱子所待者. 我仲氏豈其當機歟. 夫以高朗通透之資. 著虛遜刻苦之功. 是則偶一間値. 可見天奉者大. 又所置其身. 不于巖廊. 而投之於林野寂寞之地者. 殆將培積聰明. 用究可大之業. 夫不以一字明訓. 博一世善治. 寧可 聖朝失賢輔. 不可朱子無忠臣. 亦一差遣之意. 南軒以朱子閒中究業. 爲殆天意者. 亦可謂古猶今矣. 隱度仲氏之意. 亦知其天責有歸. 則益復精進. 不以疾病自怠. 健天之以. 高山之仰. 悠然身世之兩忘. 憤樂之相循. 又豈知年數之止於此乎
嗚呼痛矣. 嗚呼痛矣. 平生血願所欲效忠於朱子者. 成就箇幾卷箚目耳. 其餘逋債於經典. 若三禮之藪. 大易之蘊. 所待夫剔抉發揮者. 則炯炯意到. 而手未下矣. 其胸中草本. 慘憺排鋪. 所欲化今與傳後者. 將隨大化而冥沒矣. 其至言妙論. 洋溢後學之耳者. 猶有餘韻. 而終歸於日遠日忘矣. 比檢遺篋. 閱其雜識而掩涕矣. 其錄康節六十六之詩曰. 使我却十年. 亦可少集事. 如何天地間. 日無再中理. 亦註其下曰. 吾今五十二矣. 距彼猶十三年云. 而方喜新知. 益勉向前. 只欲未老而集事. 不欲旣老而作悔. 其志可謂壯矣. 果使其進滿其數
恰如邵翁之年. 以充其本願. 則餘暇弄丸. 將躡其鞭霆駕風之軌. 而地步有餘矣. 惟此八九年. 天何愛於仲氏. 而將以畀誰乎. 竊惟仲氏於此學. 自在靜觀門館. 已有發端. 而中間出入乎韓歐門庭. 幾作因文規模矣. 逮夫家禍自廢. 損之又損. 以至熟其生而生其熟矣. 抑弟之得師天倫. 猶子由之學於子贍自始磨礱. 只在於文墨間事. 亦嘗以通蔽敏鈍. 竊相方比. 而知其十駕不及也. 眞所謂步亦步趨亦趨. 及至超軼絶塵. 則瞠乎後矣. 其在年盛志不專之時. 其評詩其論文. 兄曰甫白. 弟亦曰甫白. 溯而至乎鮑, 謝, 曹, 劉而有同嗜焉. 兄曰韓, 歐. 弟亦曰韓, 歐. 溯而至於班, 馬, 左國而有隨喜焉. 及至所之旣倦. 情隨事遷. 而一爲僇民. 萬緣都灰. 則霜降水落. 政其返本之時. 兄曰洙泗濂洛. 弟亦曰洙泗濂洛. 嗜好雖轉. 其念頭斆學. 只仍其步武. 向之甫白韓歐. 今則爲洙泗濂洛矣. 向之所欲追眉山競爽之美者. 今轉爲河南講道之慕矣. 自是以來. 相爲偲切. 蓋有無窮之樂. 於是世路薄阨. 師友道閉. 出門而無可適矣. 間亦一出而有嚶鳴之求. 則到處謨面. 有言不契. 畢竟惆悵而返. 嘯詠棠棣之下
則宮商相宣. 始覺在是. 五經百家. 三才萬象. 以至九州五岳. 千奇萬怪. 凡一理之所合散. 靡事不論. 論必到底. 亹亹晨夕. 或至燈灺鷄鳴而不知倦. 往往散而各處. 合必有新. 講論亦有神韻. 不以山河而隔塞. 峨峨乎雪山百淵. 洋洋乎渼湖三洲. 高鳶深魚. 往來何拘. 朗月淸風. 吟弄有餘. 是其心期所存. 脫然於塵外者如此. 惟彼寒雪一域. 曾經仲氏留躅. 而獨有欠債於百淵. 百淵之側. 成我精舍. 則藏修之趣. 思與仲氏共之. 雖仲氏亦於此馳神矣. 早晩蘇健有日. 準擬奉陪巾屨. 追逐雲月. 訪採薇之遺墟. 理叢桂之餘韻. 仍集一二士子. 共修拂牌古事. 固所耿耿於中者. 卽遠計莫遂. 亦有翠微新寺
可布講席. 所欲了事於三禮大易者. 庶其在此. 而晩功未圓. 存沒遽如許矣. 去冬百淵. 弟有一書. 報以萬山氷雪. 有朋遠來. 則仲氏喜而賜答. 有分外企羡之言. 結辭却又悽惋. 嗚呼. 其爲絶筆矣. 相離六七月. 敎人知困而疑晦滿腹. 遠游看山而意思流動者. 倂俟歸日. 一一吐露. 而稅及病牀之下. 呑不復宣. 只此伊鬱. 已覺難耐. 從今以往. 未死者日月. 未知其幾. 則抱此悶悶. 何以爲生耶. 以弟頹惰. 稍得扶豎. 識些道理. 繄仲氏惠訓是賴. 以有今日. 自遭凶變. 心膽破碎. 風味隕墜. 看此神志. 豈可復致力於溫故知新之業乎. 計將自此擔閣. 遂孤平素相勉之意. 是又自悼處也. 親愛憂我者. 勸勿還山. 而要非知己之說. 百源羅浮. 自有事在. 吾何能久於膠擾乎
此後調度. 只得抱朱子全書. 還我舊隱. 極意鑽硏. 參互以仲氏箚目. 有以融通之. 則庶幾神情相近. 不爲存沒所隔. 猶有惰時. 亦望高靈. 數賜驚醒於寤寐感通之際. 俾不退轉否. 言之及此. 腸肚潰裂. 若復家人昆弟. 喪威孔懷. 亭閣書籍之所區處. 筵几婦女之所歸宿. 提起不忍. 覼縷難盡. 終是斯文千古之痛. 爲其大者. 竭此聲淚. 都在此矣. 嗚呼痛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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