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문 아우 창흡(祭文 弟昌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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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 아우 창흡(祭文 弟昌翕)
김창흡(金昌翕)
유세차
경인년(숙종36, 1710) 4월 병신삭 7일 임인에 아우 창흡은 중씨 농암 선생이 작고한 지 두 돌이 다가와 자리를 거두게 된 때, 삼가 떡이며 술 등 제물을 준비하여 슬픔을 다해 올리며 글월로 흠향하시기를 권합니다.
아, 보통 사람은 서로 헤어진 지 3년이 되면 한탄을 하게 되지만 성인이 상기(喪期)를 제정한 것은 한번은 무조건 3년으로 하였습니다. 무릇 그리워도 보지 못하면 곧 세월이 지루한 것을 괴로워한다.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 세월이 빠르다고 느낍니다. 일정하게 해와 달이 존재가 어찌 사람 사이에서 감정에 따라 그 속도를 조정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슬픈 자의 마음이 그런 것일 뿐입니다.
선생께서 이 세상을 버린 뒤로 저는 갑자기 미친 듯이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어떤 생각이 있어도 쏟아 낼 데가 없고 의심이 생겨도 물어볼 곳이 없어 답답한 마음이 쌓이고 또 쌓여감에 이르러서는, 거의 잠시 잠깐도 그리움을 이겨낼 수 없어 하루가 삼추 같을 정도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릇 이와 같으니 어찌 세월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리를 설치해 두고 통곡하고 흐느끼었다. 곧 오직 이곳이 슬픈 마음을 붙일 곳이 되었는데, 어느새 철수하여 세월이 빠르기가 뛰는 망아지가 틈새를 스쳐 지나고 작은 공이 어지럽게 허공에서 뛰는 것보다 더 빠릅니다.
사정이 무릇 이와 같으니 어찌 세월이 빠르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살아생전에 헤어졌을 때 오랫동안 소식이 막힌 것을 감내하지 못하여 근심스레 다시 만나 보기를 바라는가 하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유적이 사라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면서 쓸쓸히 끝내 의지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저의 슬픔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 저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선생을 잃은 뒤로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을 길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설악으로 돌아가 가까이 접하는 것은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못이 있고 밝은 달이며 안개, 노을과 어울려 지냄으로써 이것들을 정신이 높고 밝아지게 하는 도구로 삼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또 그런대로 서글픈 심사가 달래질 것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전혀 도움 되는 것은 없고 깊은 계곡이며 높은 산봉우리가 도리어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심사만 야기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였더니 정신이 자나 깨나 중씨와 서로 통하는 것이 비교적 더 분명해졌습니다.
이를테면 지난해 11월 그믐께 꿈속에서 중씨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논어』에 죽고 사는 것이 명이 있다고 하는 부분에 말이 미쳤습니다. 저는 고집스레 주장하기를, 이른바 명이 있다는 말은 소씨(邵氏 송나라 소옹(邵雍))와 이허중의 설처럼 반드시 어느 달 어느 날 죽어 한 시각도 틀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다만 기질을 잘 타고난 자는 장수하기 쉽고 그렇지 못한 자는 요절하기 쉽습니다. 큰 강령은 이와 같습니다. 진실로 이런 식으로 분수가 정해져 있고, 그사이에 어지럽게 약간씩 어긋나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달라진 경우는 그와 같은 사례를 낱낱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인데, 우리 유가에서 말하는 명이란 이런 것일 뿐이라고 하자 선생께서 기쁜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네 말이 옳다고 하였는데, 깨어나자 그 의미가 환히 풀리는 것이 대략 평소에 가르침을 받던 때와 거의 같았습니다.
이는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이 문제를 의심스러워하다가 꿈속에서 끄집어낸 것으로 어찌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 세월이 덧없이 흘렀습니다. 무릇 이 3년 사이에 제 가슴을 가득 메워 답답한 데도 그것을 쓸어내 버리지 못한 것이 어찌 한두 가지 뿐이겠습니까? 문자를 다루는 사이에 마땅히 의논해야 될 것으로 남의 문집 서문이나 무덤의 비문들로 진땀을 흘리며 중씨의 역할과 같으니 대행입니다. 제 스스로 그것이 전혀 근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가르침을 받을 데가 없어 가슴만 더욱 답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힘없이 산을 나와 설악으로 돌아가서 예전과 다름없는 한 채의 텅 빈 집에서 적막하게 장막을 내리고 있노라면 의심나는 문제를 물어볼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리에 나아가 제물을 올리고 앉아 있다가 문밖으로 나오면 중씨의 맑고 고운 목소리와 얼굴빛이 머리 위에 가까이 접해 있고 귀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그 기간이 오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신주를 받들어 사당으로 들여보내 마침내 영원토록 적막해지게 되었으니 제 곡소리도 목 안으로 도로 삼킬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께서 일찍이 왕양명(王陽明)도 좋은 말을 한 것이 있으니 슬픔을 당해 유감없이 곡하는 것이 곧 슬픔 속의 낙이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곡소리를 삼키는 것이 어찌 슬픔 속의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쏟아 내지 못하면 더더욱 슬퍼질 것입니다.
장차 사방으로 방황하며 중씨가 머물렀던 자취를 두루 찾아 나선다면 삼주(三洲)는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할 것이고 영평(永平) 골짜기는 타버린 재만 남을 것이니, 머뭇거리고 맴돌아 짝을 잃은 새나 짐승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답답한 마음을 무슨 수로 참고 일생을 마칠 수 있겠습니까.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오늘 저녁은 바로 곡을 할 수 있기에 정성껏 떡이며 술을 올리고 유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합니다.
아, 애통합니다.
『農巖集』
「祭文」 [弟昌翕]
維歲次庚寅四月丙申朔初七日壬寅. 弟昌翕. 以仲氏農巖先生再朞之迫. 筵几將撤也. 謹備餠酒之奠. 罄哀一薦. 而侑以文字曰. 嗚呼. 凡人相別. 至於三年則爲嘆. 聖人制喪. 一以三年爲斷. 夫思而不見. 則苦其遲久. 存而欲留. 則覺其悤忽. 日月居諸. 豈有進退於其間哉. 特悲者之爲心爾. 自先生之棄背也. 余之忽忽倀倀. 蓋有未召之神. 而至於有懷莫攄. 有疑莫質. 伊鬱襞積. 殆不堪於須臾. 一日三秋之不翅. 夫如是. 焉得不以爲遲久乎. 筵几之設. 哭泣之洩. 獨此爲哀之所寄. 而俄焉收撤. 殆隙駟跳丸之不翅. 夫如是. 焉得不以爲悤忽乎
蓋以爲生別. 不堪貽阻之久. 判其終天. 不忍遺迹之閟. 悒悒乎將冀其再覿. 落落乎竟無所憑依. 以此言哀. 其情理可知已. 自余之失先生也. 師資道絶. 其歸處雪岳. 所親近者. 崇峰溥淵而雪月烟霞之與相周旋. 以爲高明之具. 可以助道. 亦庶幾遣瀉悲悁. 而畢竟了無所益. 獨覺幽峭之境. 反惹滯思. 惟以處靜而體寧也. 神期之通乎寤寐. 則較益分明. 若在客歲仲冬晦. 夢奉談誨. 語及乎魯論. 死生有命. 余則硬判曰. 所謂有命. 不必某月某日. 不差一刻. 如邵氏李虛中之爲說也. 只稟厚者易壽. 稟薄者易夭. 大綱如此. 是固分定. 而若其間紛綸參差. 隨行而流轉者. 則有不暇擧. 吾儒所談命. 如斯已矣. 先生欣然點頭曰. 汝言是也. 覺來意味融釋.
大略如平日受誨時. 豈幽明彼此之間. 以是爲疑. 團而發之有以耶. 嗚呼悠哉. 凡此三年之間. 余之塡胸塞肚. 鬱而未決者. 何止一二. 而至於文字間. 所合商量. 若文稿之弁卷. 墓石之著記. 汗顏承乏. 自知其不似. 而斤正無地. 益增抑塞. 芒芒出山而來. 歸到岳麓. 依舊一空宇. 闃然下帷. 更何稟質之有所乎. 然而進而奉奠. 周旋出戶. 髣髴乎金聲玉色之在上. 神理伊邇. 德音若存. 而是又不可以久矣. 數日之後. 奉主入廟. 遂判爲萬古闃寂. 余哭亦呑矣. 先生嘗謂王陽明亦有好說. 當哀而哭盡情. 便是哀中之樂. 然則余之呑哭. 豈非哀中之哀者乎. 哀之莫洩. 所以益哀. 如將彷徉四走. 遍求杖屨之迹. 則三洲鞠草矣. 永峽灰燼矣. 躑躅徘徊. 余其大鳥獸矣. 顧此寸心結轖. 其何能忍而終古乎. 日已盡矣. 今夕則哭. 薦誠餠醪. 竭此聲淚. 嗚呼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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