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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해정 처사 구공의 사실기(蹈海亭處士具公事實記)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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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도해정 처사 구공의 사실기(蹈海亭處士具公事實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대명(大明) 말엽에 북쪽 오랑캐가 중국에 들어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천하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우리나라도 신하의 모욕을 받았다. 당시 처사(處士) 구방준(具邦俊)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왕족과 가까운 친척으로 하루아침에 처자를 데리고 도성을 나가 동해 바닷가 통천군의 금란굴(金幱窟)에 살며 끝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정자 하나를 지어 슬픈 노래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도해정(蹈海亭)이라고 하고 세상에서 그를 도해정처사(蹈海亭處士)라고 말했다.

     구씨는 고려의 대광검교상장군(大匡檢校上將軍) 구존유(具存裕)를 대조(大祖)로 삼고, 대대로 능성(綾城)에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은 중종대왕의 딸 숙정옹주(淑靜翁主)에게 장가들어 승훈랑(承訓郞) 구사인(具思認)을 낳고, 구사인이 충의위(忠義衛) 구옹(具㝘)을 낳았다.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완산 이씨 증판서(贈判書) 복록(福祿)의 딸로 만력(萬曆) 병오년(선조9, 160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점잖아 어른의 태도가 있었다. 비록 미친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이라도 감히 업신여기지 않았다. 평소에 독서 하기를 좋아하여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여 깨끗한 이름과 굳은 절개에 스스로 힘써 입으로 공(功)과 이익을 말하지 않았다. 일찍이 삼고초려부(三顧草廬賦)를 지어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의리를 중시하였다. 바닷가에 있으면서도 『춘추(春秋)』를 품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함으로써 뜻을 편안히 하였다. 

     바닷가의 풍속에 어두워 상제(祥祭)에도 반드시 손님을 초대하고, 대상 후에야 음악을 연주하고 잔치를 열었다. 공이 이것은 오랑캐의 천한 풍속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을 위하여 상례(喪禮)를 설명하고 또 그것을 넓혀 관례, 혼례, 제사에까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도입하였다. 온 고을이 따라서 교화되어 눈부시게 모습을 바꾸었다. 마을의 자제가 옛날에는 글공부를 몰랐는데 공이 이르러 비로소 처음으로 깨뜨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모두 학문하는 방법과 몸을 닦는 요점을 알았다. 

     공이 생활이 어려워 때로는 직접 호미나 쟁기를 들고 농부들과 함께 들에서 노인과 함께 일했는데, 지나가던 관리가 그의 오두막에 갔다가 만나지 못하면 감히 청하여 부르지 않고 몸소 밭에 가서 만나서 이야기하였다. 물러나서 내가 오늘 군자다운 어른을 만나보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의 비속함이 저절로 사라졌다고 말하였다. 

     나이 팔십이 되어 의지와 기개가 신(神)과 같고 누추한 집에서 옷깃을 여미고 책상 앞에 앉아 날마다 이치를 연구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죽음을 앞두고 함께 노닐던 마을 사람들을 불러 경계시키는 가르침을 제각기 주었다. 자손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충효와 예의로써 권면하고 과거와 벼슬을 생각하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여러 부인과 딸을 절하여 작별하고 물러난 북정(北征)시를 길게 읊은 후 초연히 서거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 7월 13일이었다. 모든 아들이 영구(靈柩)를 모시고 돌아와 영평(永平 포천 지역에 있던 고을)의 백운산에 장사 지냈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평생 슬퍼하고 그리워하여 입에는 기름진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몸에는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았다. 두 형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맏형 부사(府使) 구수준(具秀俊)이 먼저 죽고, 형수 유씨(柳氏)가 홀로 남겨지자 공과 중형 구정준(具廷俊)이 새벽과 저녁에 정해진 시간에 예로 보살폈다. 정성으로 봉양하여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외삼촌 이원충(李元忠)이 동학(東學:사부학당)의 유생으로서 상소하여 폐모(廢母:인목대비 서궁유폐)를 간하였다. 양근(楊根)이 늙어 귀향하였다. 양근이 통천에서 오백 리인데 공과 중형이 매년 한 번 문안하러 가고, 중형은 말을 타고 공은 항상 고삐를 잡았다. 그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처음 파평 윤하(尹河)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소생이 없었다. 

     재취로 안동 권덕홍(權德洪)의 여식이다. 권씨는 성격이 엄정하고 자손을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다. 아들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밥을 물리치고 들지 않고 재삼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해야 비로소 말과 안색을 약간 풀었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신창(新昌)으로 피난 갔다가 갑자기 적을 만났다. 몸을 보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칼로 목을 찔러 거의 죽었다가 소생했다. 공보다 한 해 뒤에 나서 공보다 넉 달 후에 죽었다. 공의 무덤 왼쪽에 합장했다. 

     아들이 다섯인데 구징(具徵)은 부사(府使)가되어 대를 이었고, 그다음이 구철(具徹)과 구휘(具徽)고, 그 다음 구행(具行)은 구두의 우두머리로 대를 이었고, 그 다음이 구형(具衡)이다. 측실도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구미(具微), 구율(具律), 구복(具復), 구순(具循), 구득(具得)이다. 구징(具徵)은 양모(養母)를 잘 모셔 뛰어난 행실이 있었으며, 아홉 아우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살아 집안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또 경학(經學)으로 공의 미덕을 이어 향읍(鄕邑)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통천 사람들이 공의 절행을 행장에 써서 감영과 고을에 여러 번 올리고 경기도의 사류(士流)도 그를 위하여 임금께 글을 올렸으나 끝내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이 없자 여론이 누차 억울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고 정승 이서구(李書九) 공이 임금의 하교(下敎)를 받들어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며 공의 도해(蹈海)의 행적을 크게 썼는데, 이것으로도 후세에 환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대개 들으니 대명(大明)이 망하고 천지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모였다. 조정에서 척화를 주장한 사람은 김청음(김상헌:金尙憲), 정동계(정온:鄭蘊)), 윤팔송(윤황:尹煌) 등 여러 공이고, 성이 함락되자 순절한 사람으로는 김선원(김상용:金尙容), 이충숙(이상길:李尙吉) 등 여러 공이 있다.

     오랑캐의 조정에 가서 면전에서 욕하고 죽은 사람으로는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가 있고, 산림(山林)에서 『춘추(春秋)』를 공부하여 위로 임금께 고하고 아래로 백성을 깨우침으로써 천하와 만세에 대의(大義)를 밝힌 사람으로는 또 우리 화양(華陽) 송문정(宋文正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있다. 

     대개 모두 인륜을 세우고 우주를 유지하여 일월과 더불어 빛남을 함께하고 천지와 더불어 그 장구함을 함께했다. 이 밖에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여 의리를 지켜 스스로 안정함으로써 천하의 둑을 지킨 사람으로는 태백산의 정양(鄭瀁), 강강흡(姜洽) 등 여러 공과 조종암(朝宗巖)의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 여러 공과 우리 도해처사(蹈海處士) 가 있다. 또한 당당하게 셀 수 있다. 

     위의 몇몇 군자와는 표리와 경위하여 풍문으로 서로 응하였다. 이른바 인륜을 세우고 우주를 유지하는 공을 함께 성취했다. 후세에 옛사람을 논하는 자가 그 행적의 미미함과 드러남, 일의 큼과 작음으로써 그들을 달리 보아서는 옳지 않다.

     지난해 다시 중교가 시대의 변화에 대한 느낌이 있어, 경기도를 떠나 관동에 들어가 처음으로 금강산과 설악산 사이에 몸을 맡겼다. 고개를 넘으니 공이 있던 통천은 동쪽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될 정도로 가깝다. 오랜 세월이 후에 맑은 바람은 여전히 사람을 쇄락하게 만들었다. 한두 문도와 벗과 더불어 날을 잡아 한 번 가서 그 유적을 봉심(奉審)할 생각이었다. 얼마 후 요양 때문에 다른 산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이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음을 중교가 사모한다는 것을 공의 손자 구병상(具秉常)이 알고, 얼마 남지 않은 공의 유적을 모아 중교에게 이 글을 부탁했다. 중교가 사양하지 않고 그를 위하여 이렇게 쓴다. 공의 큰 절조가 어찌 남의 손을 거쳐야만 썩지 않겠는가. 이 글로 인하여 공의 이름이 후세에 남으면, 그것이 후생의 영광이다.

     숭정(崇禎) 후 다섯 번째 임오년(1882, 고종19) 가을 8월에 고흥 유중교(柳重敎)가 삼가 쓰다.


    『省齋集』




    「蹈海亭處士具公事實記」


    大明之末. 北虜入據大位. 天下被髮. 吾東受臣妾之辱. 時有具處士邦俊者. 以儀賓近屬. 一朝挈妻子. 出城就東海上. 居通川之郡金幱之窟. 終身不出. 構一亭爲悲歌長嘯之所. 命曰蹈海亭. 世所稱蹈海亭處士是也. 具氏以高麗大匡檢校上將軍存裕爲大祖. 世貫綾城籍. 入我 朝. 簪纓蟬娟. 綾昌尉澣尙 中宗大王淑靜翁主. 生承訓郞思認. 是生忠義衛㝘. 卽公之考也. 妣完山李氏.  贈判書福祿之女. 以 萬曆丙午生公. 自幼儼然有長者態. 雖狂夫醉人不敢慢. 平居好讀書. 專心聖贒之學. 以淸名直節自勵. 口不言功利. 嘗著三顧草廬賦 以寓出處之義. 其在海上. 抱春秋究終始以自靖. 海俗貿貿. 祥祭必致客. 禫日張樂燕樂. 公曰此夷陋也. 爲陳喪禮. 又推及冠昏祭祀. 一以朱子家禮導之. 一鄕從而化之. 蔚然改觀. 鄕人子弟舊不識文業. 公至始破荒. 誦聲洋洋. 皆知爲學之方修身之要. 生事剝落. 或親執鋤犂. 與田夫野老爲伍. 搢紳大夫過者. 造其廬而不遇. 則不敢請致之. 身詣田疇. 傾盖與語. 退則曰. 吾得見君子長者. 不覺胷中鄙吝自銷也. 行年八十. 志氣如神. 蓽門甕牖. 整襟對案. 日以析理爲事. 臨沒. 招洞中諸同遊. 各有警訓. 命子孫進前. 勉以忠孝禮義. 戒勿以科宦爲念. 旣而令諸婦女拜辭而退. 長吟杜子北征詩 翛然而逝. 己巳七月十三日也. 諸子奉柩歸葬于永平之白雲山. 公早喪二親. 終身慟慕. 口不近滋腴. 身不加華麗. 事二兄如嚴父. 伯兄府使秀俊先沒. 嫂柳氏獨存. 公與仲兄廷俊. 晨夕行定省禮. 奉養之誠. 到老不衰. 李舅元忠當昏朝. 以東學生. 上䟽諫廢母. 歸老楊根. 楊距通川五百里. 公與仲兄. 歲一往省. 仲兄跨馬. 公常爲之執靮而行. 其孝友至性. 盖如此. 公初娶坡平尹河女無育. 再娶安東權德洪女. 權氏性嚴正. 敎子孫有法度. 諸子有過差. 輒却食不御. 至再三叩謝. 始略降辭色. 丙子. 避兵于新昌. 猝遇賊. 度不能全. 以刀剚頸. 旣死而甦. 後公一年生. 沒後公四朔. 祔左穴. 五男. 曰徵爲府使後. 曰徹曰徽. 曰行爲族父後 曰衡. 側出亦五男. 微, 律, 復, 循, 得也. 徵事所後母. 有卓行. 與九弟同産而居. 門闌無間言. 又能以經學趾公美. 爲鄕邑所宗仰. 通之人狀公節行. 累呈營邑. 畿輔士流. 亦爲之上言 蹕路. 竟無旌表之典. 物論頻齎鬱. 然於公亦何有哉. 故承相李公書九奉敎撰尊周彙編. 大書公蹈海之行. 此足以昭示於來世矣. 盖聞 大明之亡. 天地正氣萃於吾東. 在朝斥和. 有金淸陰, 鄭桐溪, 尹八松諸公. 城陷殉節. 有金仙源, 李忠肅諸公. 往虜庭面罵致死. 有洪, 尹, 吳三學士. 在山林講春秋. 上告下諭. 以明大義於天下萬世. 又有我華陽宋文正先生. 是皆樹立人極. 維持宇宙. 旣與日月同其光顯. 天地同其久長矣 此外有遺世長往. 守義自靖. 以存天下之防. 如太白山之鄭, 姜諸公. 朝宗巖之許, 白諸公及我蹈海處士者. 又磊落可數. 盖與上數君子者. 表裹經緯. 風聲相應. 以共就其所謂樹立人極維持宇宙之功. 後之尙論者. 不可以跡之微著. 事之大小而異視之也. 往歲重敎竊有感於時變. 離畿甸入關東. 始甞托身於金剛雪嶽之間. 東距公之通川. 纔踰一嶺而近. 百世之下. 淸凮猶灑人. 盖將與一二徒友. 選日一往. 奉審其遺躅. 未幾因養疾移寓他山. 至今未就志. 公之孫秉常. 知重敎慕公有異於人者. 間取公斷爛遺蹟見托焉. 重敎不辭而爲之撰次如此. 公之大節. 豈待人而不朽哉. 因此得托名於下凮. 是後生之光也.  崇禎五壬午秋八月. 高興柳重敎敬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