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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시문

    안석경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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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동행기(東行記)』     안석경(安錫儆) 101)


    5월 1일(기해).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환허 대사(喚虛大師) 신규(信奎)가 이별을 고했 는데, 그 말이 자못 정성스러웠다. 유평부(幼平賦) 한 수를 지어주기에 나도 차운하여 화답하였다. 20리를 걸어 간성군의 청사를 지나갔다. 또 남쪽으로 10리를 걸어 선유담(仙遊潭)에 들어간 뒤 가학정(駕鶴亭)에 올랐다.


    선유담은 물결이 잔잔하고 넓게 퍼져 운치가 있었으며, 물고기와 새들이 많았다. 사방을 둘러싼 봉우리들에도 추한 기 상은 없었다. 동쪽으로는 바다와 사이를 두고 있고, 일대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배들이 돛 가득 바람을 안고 가니 구름처럼 높은 파도가 일어난다. 작은 언덕이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갑자기 못의 가운데로 들어간다. 정자는 그 머리 부분에 있다. 그윽하고 조용하며 깨끗하여 매우 마음에 들었다.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6, 7리를 가니 소리포(小梨浦)가 나왔다. 맑고 조용하며 경치가밝은데, 동해와 얕은 모래톱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구경하고 즐길 만하였다. 20리를 가서 청간정에 올랐다. 정자는 왼쪽으로 푸른 바위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 푸른 바다에접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만경루(萬景樓)와 이어져 있다. 만경루는 비교적 높기 때문에 멀리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시판에는 택당 이식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만경루는 서남쪽으로 언덕을 이고 있는데, 그곳에는 운근정(雲根亭)의 옛터가 남아있다. 남쪽으로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깨끗한 구름과 바위들이 보이며, 동쪽은높아 큰 바다를 굽어볼 수 있다. 맑은 계곡을 따라 물이 모여드니 그 경치가 참으로 장엄하다. 아쉽구나! 운근정의 허물어짐이여.


    율촌(律村)에서 잤다. 삼연 김창흡이 운근정을 매우 사랑하여 시를 지었는데, 뒷날에 포부가 큰 선비가 나타나 반드시 다시 세울 것이다.


    5월 2일(경자). 일찍 일어나 만경루에 올랐다. 일출을 기 다렸는데, 이내에 가리어 보지 못하였다. 아쉬웠다. 남쪽으로 20리를 걸어 화암사(華巖寺)로 들어갔다. 화암사는 큰산을 이고 있으니, 바로 금강산 남쪽에 해당된다. 00관은 자못 돌 빛을 띠고 있었다. 앞으로는 계곡물을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화암(禾巖)을 대하고 있는데, 수백 길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위에는 물레방아가 12개가 있다고 한다.

      남쪽으로 5리쯤 올라가서 석인대(石人臺)에 이르렀다. 석인대 위의 돌은 사람의 모습과 같은데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세 개로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활처럼 휘어지고 기다란데, 위에는 절구 같이 뚫려 있어서 5, 6 곳에 물이 고인다. 석인대는 남쪽으로 천후산과 설악산을 마주하고 있는데, 돌 모서리가 뾰쪽하게 솟아 있다. 동쪽으로는 세 개의 호수와 동해의 물을 굽어보고 있다.

      원호(圓湖)는 북쪽에 있고, 영랑호는 가운데에 있으며, 청초호는 남쪽에 있다. 통고(通高)로부터 곤강(袞江)까지 4, 5백 리에 이르는 바다를 볼 수 있다. 듣자니, 명나라의 군대가 동쪽으로 와서 조선을 구할 적에 영랑호에 주둔하였다가 3일 만에 돌아갔는데, 돌아갈 때에 웃으면서, ‘천하의 절경이다. 아아.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은 삼연 김창흡이 계현(契玄)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한다.


    영랑호는 탁 트이고 아늑한데 사방 언덕은 모두 흰 모래로 되어 있으며 기이한 돌이 많다. 동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허공에서 아득하게 출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서쪽으로는 설악산과 천후산, 화암봉과 석인봉이 둘러싸고 있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장군이 연연하여 떠나지 못한 것인가?

      남쪽으로 15리를 가서 양양(襄陽) 땅에 있는 천후산 계조굴(繼祖窟)로 들어갔다. 5리를 내려와 내원(內院)에 갔다. 또 5리를 가서 신흥사(新興寺)에 들어갔다. 모두 옛날에 구경했던 곳이다. 미타전(彌陀殿)에서 잤다. (이하 일부 생략)


    5월 3일(신축). 새벽에 이화정 위로 나아가 일출을 보았다. 구름이 조금 있었지만 바다는 고요하고 바람이 불지 않았다. 붉은 덩어리가 번드치고 들끓으며 출몰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큰 불 수레가 아득한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침 늦게 절문을 나서 몇 리를 걸어 송림으로 들어갔다. 동해묘(東海廟)를 보았는데 묘의 왼쪽은 바다였다. 앞의 시냇물은 자못 조용하고 넓었다. 지켜서 보호하는 것이 엄하지 않은지라 백성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성사를 이루었으니 놀랄 만하였다.


    서쪽으로 10리를 걸어 태평루(太平樓)에 올랐다. 태평루 편액 안의 글자는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글씨로 문미 밖에 걸려 있고, 큰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문미안에 걸려 있었다.

    서쪽으로 몇 리를 걸어 임천(林泉)의 이씨 농막으로 들어갔다. 상사(上舍) 심보(心甫) 이운일(李運一)과 함께 풍류와 사한(詞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내용이 모두 다른 사람 보다 뛰어난데, 나의 풍악축(楓嶽軸)을 높이 쳐 주었다. 그러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문장을 어찌 감히 학문이 높은 사람 앞에 당돌하게 내 놓겠는가? 이에 몇 편의 시를 외웠다. 이운일이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풍악산을 삼일 동안 유람하면서 이백칠십 수의 시를 얻었는데, 어찌 그대는 이십 일 동안 산중에 있으면서 삼십 수를 채우지 못했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천 리 길을 여행하다 보니 피곤하여 붓을 잘 놀릴 수가 없었으며, 산 또한 매우 아름답고 장엄하여 반드시 그에 합당한 말을 찾으려다 보니 붓을 함부로 놀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 시가 많지 않은 이유이다. 어찌 그대의 훌륭한 솜씨를 나의 졸렬한 솜씨에 비교하여 논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5월 4일(임인). 임천에 머물면서 이운일이 소유한 만석정(萬石亭)을 찾았다. 이운일이찾아와 기문(記文)를 부탁하였는데, 피곤하여 사양하였다. 달계서원(達溪書院)을 구경하 였다. 이유(李維)는 덕을 두터이 쌓아 문행(文行)으로 현달하였는데, 근후한 행동과 문장을 지닌 여러 후진들이 서숙(書塾)으로 찾아와 공부하고 있었다. 선비들이 파도처럼모여드니 공경할 만하였다. 저녁에 이운일의 집으로 가서 차분하게 이야기 를 나누었다.

    5월 5일(계묘). 이운일과 동행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갔다. 말 위에서 시를 지었는데 모두 다섯 수였다. 서림(西林)에 도착하여 헤어졌다. 이운일의 근후한 풍류와 정밀한 학문을 그리워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말을 타고 40리를 가서 갈애(葛厓)에서 잤다.

    5월 6일(갑진). 구룡령(九龍嶺)을 넘어 모두 20리를 갔다. 명지거리(明紙巨里)에서 쉬었다. 10리를 가서 인암(印巖)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바로 강릉 지역이다. 수석이 아름다웠다. 20리를 가서 갈마담(渴馬潭)에 있는 김해운(金海運)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5월 7일(을사). 길을 나서 20리를 갔다. 두일창(斗日倉)을 지나 10리를 가서 덕치(德峙)를 넘었다. 다시 10리를 가서 이치(梨峙)를 넘었다. 홍천의 대올곡(大兀谷)을 내려오니 천석이 아름다웠다. 35리를 가서 검산(劍山)의 합윤(蛤潤)에 있는 서씨의 농막에서유숙하였다. 검산의 동쪽 골짜기에 삼신산 폭포(三神山瀑布)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합윤의 하류에는 대암 폭포(帒巖瀑布)가 있는데, 여름이면 대암에는 고기가 많다. 또 그아래에 옥련동(玉連洞)이 있는데, 수석이 기이하고 장엄하였다. 문수연(文殊淵)과 이어져 있다고 한다. 이곳으로부터 기도(棋檮)로 들어갔는데, 또한 하루의 노정이 걸린다고 한다.

    5월 8일(병오). 험한 길을 지나 모두 30리 길을 왔다. 횡성의 당현(唐峴)에서 쉬었다. 또 10여리를 가서 유곡(柳谷)에 있는 이씨의 농막에서 잤다.


    5월 9일(정미). 아침 일찍 유곡의 입구를 나왔다. 비를 피하여 초현(草峴)으로 들어갔다. 잠시 피하니 곧 날이 개었다. 율동(栗洞)을 나와 동현(銅峴)을 지나 개곡창(介谷倉) 을 거쳐 중금(中金)에 있는 진씨(陳氏)의 농막에서 쉬었다. 수백(水白)을 지나 횡성 읍내에 있는 이처사 집으로 갔다. 계암(階巖)을 향하여 출발했다. 이유평과 군자당(君子堂) 에서 함께 잤다. 환린(喚獜) 또한 같이 밤을 보냈다. 함께 산수를 유람하고 먼 길을 고생한 뒤에 이별하여 각각 동서로 떠나야 했으니, 그 아쉬운 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월 10일(무신). 이유평이 먼저 떠나고, 환린도 이별하고 떠났다. 여관에 앉아 있었는데, 무료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월 11일( 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원주의 계암을 지났다. 먼저 출발한 이유평이 10리를 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암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보통리(普通里) 에 도착하였다.

      5월 12일(경술). 일찍 길을 나서 흥원(興元)에 도착하였다.


      5월 13일(신해). 안산(安山)에 들어갔다.

    금강산의 둘레는 1,200리며, 그 석봉의 둘레는 360-370리이다. 큰 산줄기 동쪽을 외금강 이라고 하는데, 그 길이는 160여 리이다. 서쪽을 내금강이라고 부르는데, 그 길이는 100여 리이다. 토산(土山)과 석산(石山)을 합쳐 큰 봉우리만 헤아려도 일만 이천 개가 되며, 석산에 있어서도 크고 작은 봉우리를 합쳐 세어보면 또한 일만 이천 개가 된다. 12라는 숫자는 지방(地方)의 큰 수이다. 그런 까닭에 불가의 책에 ‘금강’이란 말을 실어놓고, 또한 절로 부합하게 한 것인가!


      금강산에는 바위가 서 있는 것이 열에 아홉이나 된다. 그러므로 땅이 이루어진 초기에 성대한 양의 기운이 엉겨 모여서, 뜨거운 것이 곧바로 올라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금강산의 동쪽 산기슭은 바다로 들어가 있는데, 모두 아름답고 기이하며 아득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가 없다. 땅을 차지하고 있는 근저를 헤아려 보면, 또한 아름다운 것은 비교할 것이 없고 심후한 것은 끝이 없다. 그 겉으로 드러나 볼 수 있어서 천하에서 경동(驚動)하는 것들은, 주머니 밖으로 드러난 송곳 끝에 불과하다. 복희씨는 괘를 그려 예를 분별하였고, 요 임금은 정사를 잘하였으며, 공자는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그 온축된 바를 가지고 논한다면, 또한 천만에한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 중에 구구한 재덕을 가지고 일에 적용하여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자들은, 성급하고 망령됨이 심하도다.


    『霅橋集』「東行記」




    己亥. 早發喚虛. 大師信奎拜別. 辭頗款. 曲㓜平賦一詩先贈. 余亦次之. 行二十里過扞城郡治. 又南十里入仙遊潭. 登驚亭. 潭澹蕩窃窕. 而紆回有致. 饒菱篿魚鳥. 回面峰巒無麁頑之 氣. 東與海水只隔. 一帶松林. 風帆雲濤. 漂搖蕩洋於莙華之上. 小皐蜿蜒. 斗入於潭中. 亭在 其頭. 幽閒備灑. 甚可愛. 遵海而南六七里. 見小梨浦. 澄㵛昭映. 與東海隔淺沙洲. 可賞二十 餘里. 登淸澗亭. 亭左夾蒼巖. 而東臨碧海. 右聯萬景樓. 樓較高所覽益遠. 板刻澤堂詩. 樓所 負西南皐. 有雲根亭墟. 西南見雪嶽天吼山雲石淸. 東峻俯大海水. 陪簁於淸磵之面. 其賞甚壯. 惜平基廢也. 宿律村. 淵翁甚愛雲根有詩. 後有曠士. 必復立之.

    庚子. 晨起升萬景樓. 俟日出. 海霞掩蔽可恨. 西南行二十里. 入華巖寺. 所負大山. 卽金剛之南爲也者. 00官. 頗有石色. 前臨磵水. 東對禾巖磈磊. 特立數百何. 上有水臼十二云. 南陟五里許. 上石人臺. 臺上石如人. 並立者. 三處. 全體石也. 窿然而長. 上穿如臼鑊. 而水積之者. 五六. 卽臺南. 挹天孔雪岳. 石角峭拔. 東俯三湖大海水. 圓湖在北. 永郞在中. 靑草在南海. 自通高至袞江. 四五百里可見. 聞天兵. 東救朝鮮時. 天將屯水. 卽湖三日歸. 歸時大笑而曰. 天下絶境. 嗚呼奈有何. 此語. 三淵聞之契玄云. 永郞. 旣醖藉曠潤. 而四岸. 皆白沙皐. 多竒石. 東接碧海渺漾空明. 西擁雪嶽天吼禾巖石人壞瑋之賞. 此所以天將之戀戀. 不能捨者乎. 南行十五里. 入襄陽天吼山繼祖窟. 下五里入內院. 又五里入新興寺. 皆舊賞也. 宿彌陀殿.

    辛丑. 晨出梨花亭上. 觀日出. 微有雲氣. 海靜無風. 不見飜紅沸赤出沒屢浴之狀. 而但覩大火輪踊出濛澒之上. 晩出寺門數界南. 入松林. 見東海廟. 廟左海而前溪水. 頗幽曠. 顧守護不嚴. 祈甿日集. 便成叢祠. 可駭. 西行十里. 登太平樓. 樓扁中字. 安平大君筆也. 懸楣外. 大字華陽先生筆也. 懸楣內. 西數里. 入林泉李氏庄. 李上舍心甫運一. 會話風流詞翰. 皆過 絶於人. 而索余楓岳軸. 余顧寂寥數章. 何敢唐突於大至之前耶. 乃誦傳若干篇. 運一曰. 昔吾遊楓岳三日之間. 得二百七十首. 何子之二十日山中. 顧不滿三十首也. 余曰. 千里氣頗疲倦. 不能縱筆. 山又甚奇且壯. 必欲爲相稱之語. 故不能肆筆. 此詩之所以無多也. 抑子之健筆. 以余之拙而何可比論耶.

    壬寅. 留林泉. 訪運一萬石亭. 運一求記. 辭以神疲. 見達溪書塾. 李氏維. 以厚德精基. 以文 行顕達. 而諸俊進. 皆謹厚有文采. 方聚講於書塾. 音衿濟濟可敬. 夕就心甫. 從容語.

    癸卯. 西行運一同行三十里. 馬上呼韻. 皆賦五詩. 至西林. 相別. 戀其篤厚風流. 煥爛文章. 徘徊憫悵不忍遽. 上馬行四十里. 宿葛産.

    甲辰. 踰九龍嶺. 凡行二十里. 憇明紙巨里. 十里至印嚴. 卽江陵地也. 頗有水石之勝. 二十里宿渴馬潭金海達家.

    乙巳. 發行二十里. 過斗日倉. 十里踰德峙. 十里踰梨峙. 下洪川大兀谷. 時有泉石. 行三十五 里. 宿劍山之蛤洞徐氏庄. 聞劍山之東谷有三神山瀑布. 蛤洞洞下流. 有帒嚴瀑布. 魚於夏. 又其下有玉連洞. 水石奇壯. 連文殊淵云. 自此. 入棋檮. 亦檮一日之程云.

    丙午. 踰遠入峙. 凡三十里. 憇橫城之唐峴. 又十餘里. 宿柳谷李氏庄.

    丁未. 早出柳谷水口. 逢雨入草峴. 少避旣霽. 出栗洞. 過銅峴. 歷介谷倉. 憇中金陳氏庄. 歷水白. 抵橫城邑治李處士庄. 向階嚴. 㓜平同宿於君子堂. 喚獜亦同夜. 而山水同賞. 遠道同苦之餘. 將分袂而西東. 其悵然. 可知.

    戊申. 㓜平先去. 喚麟辭退. 坐旅店無聊. 可知.

    己酉. 晨發歷原州階嚴. 聞㓜平新發. 不過失十里云. 朝飯階巖. 夕抵寶通里.

    庚戌. 早發到興原.

    辛亥. 入安山.

    大抵金剛之山. 周回可千二百里. 而伅石峰嶂. 周回可二百六七十里. 大脊以東. 謂之外山. 其長. 可一百六十餘里. 以西謂之內山. 其長. 百餘里. 合土山石山而數其大峭. 可修一萬二 千峯. 執石山而合大小峭而數之. 亦可得一萬二千. 盖十二者. 地方之大數也. 故釋氏書. 懸揣金剛之言. 亦能自合也歟.

    金剛山. 其石之立者. 十蓋八九. 豈非地成之初. 其盛陽之氣. 團聚而炎炎直上而然歟. 金剛之山. 其東麓入海者. 皆竒怪而磅礴. 不知其蟠據據所竟. 料其根柢之入地者. 亦皆瑰瑋. 無 比深厚無窮. 則其標之可見. 而驚動於天下者. 恐不過囊錐之末耳. 伏義之畫卦制禮. 大堯之政事. 孔子之著述. 其見於人者. 就所蘊而言之. 亦當爲千萬之一二矣. 今人抱區區之才德. 而欲其悉展於事. 盡見於世者. 嗚呼其躁妄之甚乎.


    『霅橋集』「東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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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안석경(1718,숙종44∼1774,영조50)의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이다. 부친 중관(重觀)의 임소(任所)를 따라 홍천·제천·원주 등지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부친은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이다.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 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였다. 저서로 『삽교집』·『삽교만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