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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김상헌

    페이지 정보

    조회 419회

    본문

     

    ○ 권운경(權雲卿)이 양양(襄陽)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5수. 이름은 권진(權縉)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이름난 절 낙산사가 지어진 건 고려 때로 洛山名刹創前朝 

    형승 보면 가팔라서 특별하게 드높다네 形勝岧嶤特地高 

    말 듣기로 오경에는 일출 볼 수 있다 하니 聞說五更看日出

    백운단의 단상에서 붉은 물결 굽어보소 白雲壇上俯紅濤


    신선의 땅 한 해 내내 시끄러운 일 없는데 仙區終歲絶喧煩

    외로이 선 납호정은 유월에도 추우리라 納灝孤亭六月寒

    찬 자리서 졸다 깨자 오궤안은 고요한데 氷簟睡醒烏几靜 

    바닷바람 불어와서 죽피관을 떨구리라 海風吹落竹皮冠


    습가지의 누관에는 먼지 오래 쌓였는데 習家池館久生塵

    현수산의 깨진 빗돌 몇몇 봄을 지내었나 峴首殘碑閱幾春

    강한의 풍류 놀이 모두 헛일 되었으니 江漢風流秪虛事 

    녹문에서 모름지기 방씨나 찾아보소 鹿門須覓姓龐人


    철에 따라 나는 진미 고을에다 올리나니 時羞簇案進官廚

    입 큰 농어 꼬리 붉은 방어 팔대어도 있네 巨口赬魴八帶魚 

    좋은 시절 수연 열기 어느 곳이 젤 좋은가 佳節壽筵何處好

    양양의 꽃과 버들 반여 끌고 가보시게  大堤花柳引潘輿


    어린 시절 노닐 적엔 모두 머리 검었는데 童丱相隨各髩蒼

    순식간에 흐른 세월 몇몇 해가 지나갔나 轉頭時序幾炎凉

    근년 들어 만사 모두 맘 식은 지 오래건만 年來萬事休心久 

    이별 정만 남아 있어 늙어서도 맘 상하네


    『淸陰集』




    ○ 양양 부사 이효숙의 아내에 대한 만사(李襄陽孝叔妻挽詞)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00)


    문헌 타고 길에 올라 끄는 말이 엄했으니 文軒戒路儼驂騑 

    지난날에 일이 홀연 잘못될 줄 뉘 알았나 宿昔那知事忽非

    맺은 약속 맘에 걸려 괜히 절로 생각나나 成說關心空自憶

    다른 생은 꿈과 같아 기약하기어렵다네 他生如夢杳難期 

    상자 속의 옛 수건엔 좀과 거미 모여들고 篋中故帨蟲絲集 

    문밖의 슬픈 노래 속에 해로 마르누나 門外哀歌薤露晞 

    머리 허연 낭군 보니 살고 싶은 뜻 없나니 白首郞君生意盡

    세간에서 누가 죽음 슬퍼할 만하다 하나 世間誰道死堪悲


    『淸陰先生集』





    ○ 승지(承旨) 이경용(李景容)이 외직으로 나가 양양(襄陽)에 보임되어 가는 것을 전송하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구한 것이다.

    [送李承旨景容出補襄陽. 爲養乞外]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협로에서 당음 직에 한 해 넘게 있었는데 陜路棠陰閱歲廻

    성은 내려 은대에서 입시함을 허락했네 聖恩重許入銀臺

    서쪽 해가 엄자산에 가까워짐 겁이 나서 怕看西日崦嵫迫

    바닷가의 양양 고을 수령 자리 간청했네 乞得東州嶺海隈

    현수산에 올라서는 숙자 자취 쫓아가고 峴首登臨追叔子

    반여 타고 즐기 는 일 남쪽 둑서 이어 하리 潘輿娛樂繼南陔

    풍수 슬픔 미칠 수가 없는 내가 불쌍커니 自怜風樹嗟無及

    흰머리의 이 늙은이 만 생각이 다 식었네 頭白人間萬念灰


    『淸陰先生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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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김상헌(1570,선조3∼1652,효종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이다. 1590년(선조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 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뒤 교리·응교(應敎)·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4) 동부승지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대제학, 이조 판서, 예조 판서, 공조 판서, 병조 판서를 지냈다. 저서에 『野人談錄』·『豐岳問答』 따위가 있고, 『청구영언』 따위의 가곡집에 시조 4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