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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시문

    유경시

    페이지 정보

    조회 412회

    본문

     

    ○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함벽당(涵碧堂) 유경시(柳敬時) 116)


    우리나라에는 이름난 산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유독 금강산을 으뜸이다. 중국 사람들도 심지어 ‘고려(高麗)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외국 사람도 금강산의 이름을 듣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도 금강산을 한번 보지 못한다면 어찌 평생에 한이 되지 않겠는가.

    금강산은 영동(嶺東)의 고성(高城)과 회양(淮陽) 사이에 있다. 내가 영남(嶺南)의 안동 (安東) 땅에 살고 있으니, 서로 간의 거리가 거의 700 리나 된다. 그러나 한번 벼슬길에 올라 그 사이에 세속에 푹 빠져 있던 것을 생각하여 가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침 정미년(1727) 가을을 맞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양양과 이 산은 불과 3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업무 중 한가한 시간에 정신을 차려 절기(節氣)를 살펴보니 이미 늦어 단풍잎이 지고 눈도 너무 일찍 쌓여 가고 싶어도 또한 갈 수 없었기때문에 초봄을 기약하였다가 올 봄에 이른 것이다.

    고령(高靈) 신척(申滌)이 본도 좌막(佐幕) 으로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 나와 함께 유람하면서 경치를 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우선 설악(雪嶽)으로부터 시작하여 3월 9일 신흥사(神興寺)에서 모였는데, 신흥사는 양양부의 경내에 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고 도착하여 보니 부장(副將) 일행은 이미 화암사(華巖寺)로부터 천후산(天吼山) 꼭대기에 올라와 옛 이야기를 몇 마디 늘어놓고 있었다. 산의모든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호응할 겨를이 없었다. 산의 사면은 모두 바위로 둘려져 있는데 마치 하나의 병풍처럼 깎여져 있고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조화상(祖和尙)이 거처하던 곳이라 하여 계조굴(繼祖窟) 이 되었다고 한다. 굴 가운데에는 몇 개의 시렁이 엮어져 있고 좌우에는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문승(門僧) 수도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다고 한다. 절구 한수를 지어 읊었다.


    벽옥을 둘러 병풍을 만들었는데 碧玉環爲障

    누가 능히 깎아 만들 수 있겠는가 誰能削得成 

    선사의 자취 이미 멀어졌는데 仙師迹已遠 

    석굴이 다만 이름을 남아있구나 石窟但留名


    굴 가운데에 돌이 있는데 자연적으로 평평하게 깔려 있고, 그 넓이가 수백 여 척이나 되어 수백 사람이 모여 앉을 수 있다. 비가 올 듯하여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곧장 산을 내려와 내원암(內院庵)에서 잠시 쉬었다가 본사(本寺)에 도착하였다. 땅의 형세가 비록 내려와도 경내는 좀 널찍하지만 앞뒤 산봉우리의 험준하고 매우 수려함이 모두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날, 낙산(洛山)으로 향하려다 비의 기세가 꺾이지 않아 결국 머물러 묵으면서 아사(亞使)와 함께 나란히 누워 조용한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새벽, 견여(肩輿)로 서쪽 골짜기로 들어오는데 맑은 물과 흰 돌 사이로 잡초와 바위 꽃이 모두 볼만하였다. 와선대(臥仙臺)에 도착하니 개울 위에 평평하고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마치 자리를 깔아놓은 듯하였다. 그런데 물이 콸콸 내려가며 맑은 못에 이르는데 앉았다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이미 속세를 떠난 생각을 갖게 한다. 조금 위로 백 여 걸음쯤 올라가면 비선대(飛仙臺)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계곡 위에 역시 돌이 있는데 아주 깨끗한 감색 활석(滑石)으로 와선(臥仙)보다 더 위험하였다. 관청 하인에게 태평소(太平簫)를 불게하기도 하고 소관(小管)을 불게 하여 번갈아 서로 소리를 내고, 한잔 술을 올리게 하며 대화를 하였다. 돌 위에서 오랫동안 그냥 있을 수가 없어 먼저 한 절구 읊었다.


    한가로이 누워있는 부사인데 閒臥黃堂是

    누워있는 신선은 날아오를 것 같도다 臥仙如飛乘

    역참(驛站)은 비선대요 馹是飛仙臺

    명예가 신표와 짝하여 함께 노닐거니 名偶符同遊 

    나그네는 비선이로다 客子是飛仙


    내가 와선이라 하니 아사가 대응하여 말하기를, “와선이 먼저 머무르고 또한 비선이선경(仙境)에서 함께 노닐고 있으니 역시 한 신선입니다. 와선이 비선과 같지 않고 더 잘 나르는 것이 진짜 신선이니 누워 있는 것이 어찌 신선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즉각 놀리며 답하기를, “위에 비선이 있고 아래에 와선이 있는데 누가 장차 날을 것인가?

    누워 게으름 피우다가 신선이 되기 를 경쟁하는데 빠른 자는 잘 날지만 한가한 자는 누워 있다. 세간에 한가로이 누워 있는 자가 곧 진짜 신선이라네.”라고 하였다 아사가 또 놀리며 답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자진(子晉)이 날아 신선이 되었으나 극락세계에서는 누워서 신선이되어 날거나 누워서 저절로 응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진위(眞僞)의 구별을 앞으로 꼭 여러 신선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조금도 떠들 일이 아니네. 신선의 신분도 아닌데 어찌 이 땅의 주인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곧 절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함께 낙산에 이르렀다. 아사는 경치를 구경하다가 혼자 머물고, 나는 이미 익히 본데다 또한 산에 돌아가 묵을 도구를 챙겨야 했기 때문에 오후에 관아로 돌아왔다.


    『遊金剛山錄』




    東國素稱多名山. 而獨以金剛爲第一. 中華人. 至有願生高麗一見金剛之語. 夫以外國之人而聞名. 傾想猶如此. 則況生於國內而不得一見. 豈非平生之所可恨者乎. 金剛在嶺東高淮之間. 余居嶺南之安東地之相距也. 蓋七百餘里. 思一致身. 於其間而汨沒塵冗. 願莫之. 遂偶於丁未秋. 分竹於襄陽. 襄之距此山. 不過三宿而可至. 朱墨餘閒. 倍覺馳神. 而屬節序已晩. 楓葉 衰盡. 積雪太早. 欲往而又不可得要. 以開春爲期. 及今年春. 

    高靈申君滌. 爲本道佐幕. 馳書告我約與同遊而探勝. 先自雪嶽始. 三月初九邀會于神興寺. 神興在府境. 余卽蓐食赴之. 亞使行自華嶽寺已在天吼山上頭. 敍舊才數語. 山之諸景. 湊目前. 應接不暇矣. 山四面皆石環立如削宛然一屛障. 有石窟. 其深不測. 世傳. 祖和尙. 住錫之 處. 仍名爲繼祖窟. 窟中結數架. 左右繚以奇巖斵石. 爲門僧修道者居之云. 爲吟一絶曰. 碧玉環爲障. 誰能削得成. 仙師迹已遠. 石窟但留名. 窟中有石. 天然平鋪. 廣袤數百餘尺. 上可坐百餘人會. 有雨意. 不可久留. 卽下山. 少憩于內院庵. 到本寺. 地勢雖下. 而境稍寬. 前後峯巒峭拔奇秀. 皆在目前.

    是日欲向洛山. 而雨勢不止. 遂留宿. 與亞使聯枕穩話. 翼曉. 肩輿入西洞. 淸泉白石間. 以雜卉巖花. 皆可賞. 至臥仙臺. 有石盤於溪上. 如布席. 然水㶁㶁下爲澄潭. 坐移時. 令人已有出塵之想稍上百許武. 有所謂飛仙臺者. 溪上亦有石. 潔淨紺滑. 殆勝於臥仙. 使官僮或吹太平簫或吹小管. 與相響. 命進一觴對話. 石上久之不能去. 先吟一絶曰. 閒臥黃堂是臥仙如飛乘. 馹是飛仙臺. 名偶符同遊. 客子是飛仙. 我臥仙. 亞使應曰. 臥仙先着. 又飛仙仙境同遊. 亦一仙臥仙不若飛仙. 勝飛是眞仙. 臥豈仙. 余卽戱答曰. 上有飛仙下臥仙. 誰將飛. 臥漫爭仙. 疾者善飛. 閒者臥. 世間閒臥卽眞仙. 亞使又戱答曰. 曾聞. 子晉飛爲仙. 不說靑蓮. 臥作仙飛. 臥自應. 眞僞別. 須將此語問諸仙. 余笑曰. 不須呶呶. 非仙分. 安得爲此地主人.


    『遊金剛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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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유경시(1666,현종7∼1737,영조13)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흠약(欽若), 호(號) 함벽당(涵碧堂)이다.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생이고, 1694년(숙종20)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복위를 계기로 실시된 별시에서 유학(幼學)으로 병과 12인에 급제하여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냈다. 1727년(영조3)에 양양부사(襄陽府使)가 되니 대관령에는 도적의 소굴이 있었다. 그 적도에 부종(附從)하든 산맹(山氓)을 통해 탐지하여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處刑)하니 부내(府內)가 안도 하였다. 이로 인해 양양은 산과 바다의 물산이 풍족하여 공물(貢物)을 진상할 때 봉하고 나머지는 백성(百姓)에게돌려주었다. 한번은 갈은 고향사람이 국유림을 살피는 황장경차관(黃腸敬差官)으로 양양에 왔는데 진봉 (進封) 하고 남은 나무로 관재를 마련하라고 했는데 公은 이를 거절하자, 그 아들에게 주었으나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고 역시 거절(拒絶)하였다. 문한관(文翰官)과 외직을 거쳐 1732년(영조8) 사헌부장령에 올라김정, 김시발의 옥사를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청백이(淸白吏)에 들었다. 저서 『涵碧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