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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이정암

    페이지 정보

    조회 421회

    본문

     

    ○ 낙산사(洛山寺)      사류재(四留齋) 이정암(李廷馣) 132)


    어쩌다 꿈같이 낙산사에서 신선처럼 노니 一夢仙遊豈化城 

    하늘 끝에 은은히 저녁 종소리 들리네 雲端隱隱暮鐘聲

    늦가을 여기 온 것은 나는 한하네 我行恨値秋風晩

    달빛아래 배꽃을 볼 수 없 에 不見梨花夜月明


    풍경소리 맑게 들리는 등불 아래 一聲淸磬一龕燈 

    고요히 참선하는 스님 坐對跏趺人定僧

    세상에 괴로움 어느 날 그칠 것인가 自笑勞生何日己

    파돗소리 여음은 근심만 더하네 海濤聲裏旅愁增


    시름 걱정 아직 끊이지 않고 多病相如味解消

    갈 길은 멀어서 힘에 겹구나 不堪鞍馬去經遙

    동창을 활 짝 열고 두 눈을 들어 보니 東窓拓盡擡隻眼 

    보일 듯한 삼신산 아득히 바라보네 隱釣三山八望過


    『四留齋集』


    ---------------------

    132) (중종 36)~1600(선조 3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아버지는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이며, 동생은 이조참판 정형(廷馨)이다. 1561년 (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기용된 후 승정원주서·공조좌랑·예조좌랑·전라도도사·경기도도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1571년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이 된 후 춘추관의 직책을 겸하여 〈명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1572년 연안부사, 1576년 장단부사 등을 역임한 후 1578년 양주목사로 나갔다. 이때 향교와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증수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후 장령·사성·장악원정 등을 거쳐 1587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이어 대사간·승지·이조참의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개성유수로 있던 아우 정형과 함께 개성을 지키려 했으나 임진강의 방어 선이 무너져 실패, 황해도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수천 명의 군사를 연안(延安)에서 대파하여 왜군의 북진을 저지하고 해서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의주에 있던 행재소(行在所)와 기호지방은 강화(江華)와 연안을 통하여 연결됨으로써 전쟁을 원활히수행할 수 있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으며 1593년 병조참판·전주부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594년 당시 유성룡(柳成龍)·성혼(成渾) 등이 제기한 명나라 군사의 철병에 맞추어 일본과 화해하자는 주장에 동조했다가 주전파(主戰派)들로부터 크게 공격당했다.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 (李夢鶴)의 난을 평정했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지중추부사로 재기용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서 해주를 수비했다. 난이 끝난 후 은퇴하여 풍덕(豊德)에 거처하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상례초 喪禮抄〉· 〈독역고 讀易攷〉·〈왜변록 倭變錄〉·〈서정일록 西征日錄〉·〈사류재집〉 등이 있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낙산사는 예부터 배꽃이 아름답다. 특히, 달빛 아래 배꽃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꿈에 그리던 낙산사를 찾아 신선처럼 즐기는데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하늘가에서 들려오지만 달빛 아래 배꽃을 볼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두 번째 수에서는 풍경소리 맑게 들리는 등불아래 고요히 참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며 세상의 괴로움을 언제 다 할지 근심하는데 파돗소리는 더 근심하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수는 깨달음을 위해 절을 찾았지만 시름과 걱정을 버리지 못하는데 갈 길이 멀어 더 힘겹다.

    이에 동창을 열자 삼신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