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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이명준(2)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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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22일(계축), 아침에 허두향은 다시 조정으로 향했다. 우리는 원적임을 출발하여 비로암에서 잤다. 암자는 비로봉을 등지고 일출봉과 월출봉을 마주하고 있고 사찰은 폐허가 되어 승려가 없었다.

      23일(갑인), 일찍 비로암을 출발하여 구룡연으로 가는 길을 향하였다. 길 가의 잣나무에 검은 터럭이 매달린 것을 보았다.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것은 비휴가 가려운 곳을 나무에 대고 긁을 때 빠진 털이 매달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큰 고개를 넘어 20여리 쯤 가서 구룡령으로 들어갔다. 시냇가 바위는 깨끗하고 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다. 짙은 안개가 골짜기 에 가득하여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바위 봉우리고 길이 나있어 곧 바로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 아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가 있었다. 발을 딛기가 너무 어려웠고, 손으로 잡고 오르기에 위태하였다.

      구룡연의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곳을 넘은 후에 들어갈 수 있다. 명로와 두 아들, 그리고 박시창은 모두 잡고 발 끌면서 올랐다. 나는 산아래에서 그들처럼 잡고 오르려  하였으나 왕양이 수레를 돌린 일을 생각하며 마침내 억지로 오르지 않았다. 밥을 물에  말아 먹고 있으니 한참 후 두 아들과 바시창 등이 세 번째 못까지 보고 돌아와 말하기를 “수석이 뛰어남이 이 금강산에서 제일이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명로가 관북지방으로 난 길을 따라 -관북지방의 길은 구룡연을 따라 곧장 고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고성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얼마 후 길을 잃어 어쩔 수 없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서로 끌어주면서 묘길상에 들어갔다, 미륵대를 거쳐 저녁에 마하연에 이르렀다. 뒷쪽에는 중향성이 있고 앞쪽에는 혈망봉, 왼쪽에는 반야대, 오른쪽에는 향로봉이 있었다. 혈망봉 서쪽에 승려가 돌 위에 ㅈ아 있는 모습의 바위가 있는데 담무갈이라 하였다. 나옹이 이 절에 와서 머물 때, 항상 뜰 오른쪽에서 예불을 올려서 지금도 승려들은  감히 그 곳을 밟지 않는다. 그 곳에 갈대가 났는데 많은 승려들이 명당초라 하였다. 이런 것으로 어리석은 속세인을  미혹시키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절 오른쪽에 있는 작은 산기슭이 천축대인데 담갈봉과 바로 마주 하고 있다. 이 날 저녁 비가 내렸다.

      24일(을묘), 아침에 마하연에서 길을 나섰다. 암자 앞의 시내와 수석이 맑고 깨끗하여 볼만하였다. 2리 쯤 가면, 사자암이 있다. 여기 부터 수석이 더욱 기이하다. 화룡담, 선담, 진주담, 벽하담을 지나 보덕굴에 올랐다. 보덕굴은 보살을 봉안한 집이다. 구리기둥과 쇠사슬로 엮어 묶은 것이 매우 기교하고 정교하였다. 벽에는 돌가신 형과 심사경의  이름이 쓰여 있어 옛 감회를 이길 수 없었다. 뒤쪽의 법당도 맑고 깨끗했다. 절구 몇  수가 있다.

      비오는 가운데 꼳 흑룡담으로 내려가 명로와 앉아 이야기 하였다. 잠시 후 다시 세건천을 지나니 절구처럼 오목하게 패인 바위가 있었다. 보살이 머리를 감았다는 곳인데 그 말이 황당하여 믿을 수 없었다. 돌 길이 경사지고 미끄러워 발을 내딛기 어려웠다. 바위를 파서 구멍을 만들고 포고넝쿨로 끝을 묶어 놓으니 오가는 사람들이 잡고 다녔다.

      만폭동에 이르니 바위에 ‘蓬萊風樂 元化洞天’이라는 초서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봉래 양사언이 쓴 것이다. 그 위에 금강대가 있었다. 옛날에는 학의 둥지가 있었다. 학이 날아 오지 않은 지가 벌써 4, 5년 되었다.

      또 2-3리를 가서 표훈사에 도착했다. 오현봉에 둘러쌓여 혹자는 다섯 마리 용이 여의 주를 다투는 형상이라고 하였다. 중당에 반야전이 있는데 멋있는 구름속에 부처가 있었다. 왼쪽으로는 3-4척 높이의 구리탑이 있다. 뒤에는 나한전이 있다. 왼쪽에는 옥으로  만든 불상 16구가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로 만든 불상 16구가 있다. 모두 기이하다. 중간에 커다란 금불상이 합장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 동쪽 윗방에는 요월헌, 석쪽 윗방에는 세심헌이 있었다. 선당은 적조라고 이름하고 승당은 정려라고 하였다. 앞에는 작은 누각이 있어 자녁에 올라가니 우레가 치고 우박이 많이 내렸다. 기 기 암, 삼장암, 신림암, 청련암 등이 모두 가까이 있었다.

      처음에는 두루 보려고 했으나 비가 내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녁 무렵 날씨가 조금 좋아져 가까스로 정양사에 이르러 헐성루에서 잤다. 날이 어두워져 많이 볼 시간이 없었다. 중국 승려 태준이 찾아왔다.

    25일(병진), 아침 불전으로 올라가 나옹의 의발과 사리를 보았다. 사리는 푸른 구슬 한 알인데 좁쌉 크기였다. 유리통에 보관되어 있었다. 통의 크기는 개암나무 열매만  하였다. 금으로 된 통을 곽에 넣어 솜으로 채우고 오색문양의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로 많이 싸서 검은 함에 넣어 두었다. 불전 앞에는 육각형 전각이 있다. 그 안에는 돌로  만든 약사여래상을 봉인했다. 사장 벽에는 천왕과 신승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당나라 승려 오도자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승려가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이 돌부처가 갑자기 땀을 흘립니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시 모두 그랬다.”고 한다. 불전 뒤에 나옹의 영당이 있고 영당 뒤에는 부도가 있으며 오른쪽에 나한전이 있다. 사찰 밖이 바로  진헐대이다. 지금은 채소밭이 되어 버렸다.

      밥을 먹은 후 천일대에 올랐다. 정송강이 “여산의 진면목이 모두 이곳에 있다.” 고 한 곳이다. 산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10여리를 가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 대송라암과 소송라암에 도착했는데 두 암자는 서로 나란히 가까이 있었다. 소송라암에는 승려 신감이  곡식을 먹지 않고 혼자 살았다. 형색은 매우 파리했지만 얼굴에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방으로 들어가니 불상의 오른 쪽에 지공의 영정이 있고 무학과 나옹이 좌우에서 모시고 있었다. 나옹의 모습은 정양사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지공은 관을 쓰고 두 조사는 모두 삭발하고 무학의 오른쪽 눈에 하얀 점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망고대로 향하였다. 고개 하나를 올라 쇠사슬을 잡고 도착해 보니 또 쇠사슬아래 드리운 것이 두 곳 이였다. 선기와 박시창이 먼저 올라가고 명로가 뒤따라 올랐다. 현기도 잡고 올라가다가 쇠사슬 하나도 미처 다 오르지 못하고 다시 내려와 말하기 를 “이 길은 비로봉보다 더 위험한데 보이는 것은 정양사의 천일대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올라가지 말라도 하였다. 얼마 후 선기가 뒤에 와서 역사 말렸다.

      비가 오려고 하여 남쪽의 상운암으로 내려왔고, 명로와 박시창도 뒤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비를 피하고 남쪽 대에 올랐다. 동쪽, 서쪽, 남쪽에 봉우리가 다투어 솟아 있고 골짜기는 밝고 깊었다. 그 경관은 은선대, 천일대와 서로 경쟁할만 했고 불정대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망고대의 명성만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가 보았다. 하지만 끝내 기이한 경관은 없었다. 이 남쪽 대의 뛰어난 경치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서로 탄식하면 의아해 했는데 그 이름이 오선암이라고 했다. 내려와 백탑동 길을 따라  넝쿨을 잡고 오르는데 박을 딛지 못하였다. 줄을 내려 매달은 곳이 10여 곳이고 그 아래 천길 낭떨어지였다.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뼈가 부셔저 죽게 될 것이다. 비로봉, 구룡령의 위험은 이에 비하면 마무 것도 아니다. 훗날 이 산을 유람하는 우리 자손들은  삼가 이 길을 지나가지 말아야 한다. 아주 긴 폭포가 있는데 가장 절경이었다. 나머지  아름다운 곳도 완상할 만 하다. 이어 영원동으로 들어갔다. 시내와 바위의 경치와 붕우리의 기이함이 풍악산에서 최고였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갈 길도 바빠 스치듯 지나서  영원암에 도착하였다. 뜻 앞에 한련, 작약, 목향, 등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암자는 그윽하고 깨끗했다. 또한 도승 보주가 5년째 곡식을 먹지 않고 겨우 숨만 이어가고 있었다. 선기가 위로하며 “도를 깨우치는 일의 성패는 곡기를 끊었는데 있지 않고 오직 부지런히 공부하는데 있습니다. 어찌 곡기를 끊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승려가 합장하고 사례하였다.

      26일(정사), 일찍  일어나  둘러보니  시왕본가  사자봉이  늘어서서  뛰어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막 개어 산 빛이 매우 깨끗하였다. 밥을 먹은 후 1-2리 쯤 가니 시내와 바위가 매우 아름답고 운치가 있었다. 영원동에서 나와 5리쯤 가니 현붕람에 도착하여 이름을 쓰고 서쪽 대에 올라가니 산세가 띠어나 골짜기가 깊었다. 바위에 파선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관찰사 숙우공[오숙]의 호이다. 명로가  관청의 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그와 작별하였다. 골짜기를 벗어나 다시 5리 쯤 가니  대궐터가 있었다. 을사년[1605]의 수해로 그 위에 돌이 어지럽게 쌓여서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또 지옥문이 있는데 소위 지옥문은 성문처럼 생겼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태자가 간언하였는데 왕이 듣지 않아 달아나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다. 고려 사람들이 태자를 위해 성문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성문이 지금까지 훼손되지 않아 불가에서 억지로 이름 한 것이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큰 화살촉을 세워 놓은 것처럼 구름  끝에 뽀족하게 솟아  있는 것이 명경암이다. 그 아래 맑은 못은 황천강이다. 시냇가의 큰 바위는 업경대이다.  업경대 앞에 지장봉이 있다. 이 모두가 상식을 벗어난 말로 이름 하여 무지한 백성을 현옥시킨다.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이른바 시왕백천동이다.

      또 5리를 가서 시내를 건너니 그 시내를 따라 내려가니 바위 빛이 푸른 옥과 같았다. 위에 작은 폭포가 있다. 그 아래 맑은 못을 이루었다. 물과 바위가 매우 아름다웠다. 길 옆 외진곳이라 사람들이 이런 경관이 있는 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우연히 발견하고 마침내 그 못을 벽옥담이라 이름 지었다. 장안사 입구까지 1리쯤 되었다.

      장안사에 들어가니 이층전각이 있다. 그 위에 편액이 있다.‘대웅지전’이라고 하였다.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전각 안에는 감실 3칸이 있고 위에는 금빛 용이 그려져 있는데 솜씨가 정말 뛰어나다. 중간에는 일곱 불상을 진열했고 그 사이에 작은 불상이 놓여 있었다. 불상 앞을 꾸며놓은 장식 또한 모두 화려했다. 화로와 바리는 구리재질에 은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양식이 고상했다. 무진등이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공교로웠다. 모두 일찍이 보지 못한 것들로 세상에 없는 기 이한 볼 것이다.

     대웅지전의 왼쪽에 사성전이 있는데 이층으로 아라한을 봉안한 곳이다. 좌우에 각각 불상 8구를 봉안 했고 그 모습은 모두 달랐다. 기이하고 괴상하여 아름답고 추한 형상은 오묘함을 모두 표현하였다. 이것은 승려 신여가 만든 것이다. 사찰의 문에는 또 천왕 4구가 있었다. 사찰의 경치는 금강산 여러 사찰 중에 가장 미흡하지만 만들어 놓은  불상은 여러 사찰 중에 정교해서 감상하기에 최고이다. 그러나 요사채가 무너져 승려가  적은 것이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나니 소나기가 내려 곧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잠시  뒤 비가 개어 동쪽으로 2-3리 쯤 가서 명연을 지나 안양암에 들어갔다. 이ㅡ사찰은 벼랑에 바위를 깎아 불상 세 구를 새기고 벼랑에 의지해 불전을 지었다. 그 아래 요사채인데 폐사되어 승려가 없었다. 적벽에 돌아가신 형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슬픈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오른쪽에 내 이름을 썼다.

     다시 삼일암에 올랐다. 옛날에 한 승려가 사흘 머물고 있다가 문득 스스로 도를 깨우쳐 암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고개 하나를 넘어 운지암에 들렸다. 암자가 고요하고 깨끗하고 경치가 그윽하여 삼일암과 비슷하였다. 3, 4리를 가서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앞쪽에는 훤히 보였는데 바위 봉우리가 빽빽이 늘어서서 그 자태들을 자랑하였다. 풍악산의 정수와 빼어난 경관은 이 중에 모두 있었다. 내 생각에 금강산의 경치가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런데 칭송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림암을 지나 표훈사로 돌이 왔다. 천덕암까지 시간은 충분하였다. 가마를 메는 승려들이 힘을 다해 어쩔 수 없이 묵었다.

      27일(무오), 표훈사에서 기기암을 거쳐 삼장암에 도착했다. 승려 처명이 홀로 거주하 는데 또한 곡식을 끊었다. 북쪽으로 5리쯤 올라가서 개심대에 올랐다. 아침안개가 사방에서 운집하더니 눈앞의 바위 봉우리들을 모두 가렸다. 길을 안내하는 승려 종원이  안개가 점점 내려앉아 전망을 방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인들에게 시야를 가리는 잡목을 베개하고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뒤 안개 기운이 흰 구름으로 변하여 점점 하늘로  올라갔다. 비로봉, 영랑봉, 혈망봉, 망고봉, 백마봉, 일출봉, 월츨봉 등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었다. 날씨가 맑아 조금도 가리지 않고 산과 산골짜기의 형세가 모두 내 발 아래 펼쳐지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서로 축하하였다.

      남추강이 ‘개심대의 경치는 망고대와 더불어 우열을 다툰다.’고 했다. 과연 거짓이 아니다. 이어 동쪽 천덕암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내원통암을 들러 능인암을 도착하였는데, 모두 속세와 떨어진 산중의 암자들이었다. 능인암의 동쪽에 있는 대에 오르니 산수의 깨끗하고 깊음이 현불암과 대적할 만했다.

      시내를 따라가다가 만폭동에 못 미친 곳의 골짜기물과 바위가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기이했다. 바위 웅덩이 하나를 만났는데, 맑고 투명해서 바닥이 보였다. 그 못을 인월담이라 이름 하였다. 

        또 수십 걸음을 내려오니 폭포가 몇 길을 나는 듯 흘러내려 그 아래에 맑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그 폭포를 비류라 하고, 그 못을 청학이라 이름 하였다. 폭포 이름은 내가 짓고, 못 이름은 숙우가 지었다. 그리고 바위에 이름을 썼다. 다시 만폭동에서 곧장 만회암에 도착하니 승려 원오가 가사를 입고 맞이하여 절을 하였다. 그는 산중의 도승으로 곡식을 먹지 않고 홀로 살았는데, 승려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다.

      고개 하나를 넘어 백운암으로 들어가니 늙은 승려가 살고 있었다. 죽림암, 만회암, 백운암은 모두 내금강에서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백운암의 경치는 청련암에 버금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불상의 왼쪽에 한 폭의 관음변상도가 걸려 있었다. 검은 비단에 은으로 그렸는데, 금빛 얼굴에 푸른 머리를 한 부인이 오른손에 대로 만든 광주리를 끼고있었고, 그 광주리 안에는 물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아래의 그늘에 서있는데, 그림의 품격이 매우 뛰어났다. 일찍이 상백운암은 그윽하고 깊고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가는 길이 험하다고 들었는데, 시험 삼아 하인 특에게 가서 보게 하였다. 그가 넝쿨을 잡고 올라가 다시 봉우리 꼭대기를 넘어 작은 암자로 내려가서 보고, 승려 세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반야봉을 지나 마하연에 돌아와 머물고 있으니, 명로가 술을 보내왔다. 유점사 주지 영희가 맞이하러 왔다.

    28일(기미). 마하면을 출발하여 수재에 도착하니, 외산의 승려가 마중을 왔다. 내산의 승려와 작별하고 은선암에 도착해 승려 수감을 만났다. 점심을 먹은 후 은선대에 올랐다. 앞에는 선문동의 십이폭포가 마주하고 있었다. 골짜기가 넓게 탁 트여, 벼랑이 기 이하고 빼어났다. 상령대암을 지나 만경대에 올라갔는데 박시창은 높고 멀다고 싫어하여 따라오지 못하였다. 만경대의 왼쪽으로 바위 봉우리를 마주하고 있으며-내․외산이 아울러 보였다- 오른쪽에는 흙산이 있고, 앞에는 큰 바다가 있으며, 골짜기는 넓게 트여 시야가 막힌 곳이 없었다. 구정봉과는 우위를 겨룰 만하지만, 개심대나 망고대와 견줄 수없었다. 산 중의 사찰 가운데 손으로 가리킬 만한 것으로는 동북쪽의 율사와 은선암, 서남쪽의 향로암, 북쪽의 양진굴, 남쪽의 유점사와 종련암이 있고, 자월암과 세 영대암은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올 때 양근의 선대 묘소와 재실을 지키는 승려 원오와 승려 신명이 만나러 왔다. 또내려가 자월암에 도착하니, 승려 법종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중령대암으로 가니 승려 도화가 암자를 지키고 있었으며, 하령대암은 허물어져 승려가 없었다. 운수암에 도착해 승려 응상을 만났다. 그는 사명대사 유정의 법통을 이은 승려로, 3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나와 동갑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있는 선담은 위와 아래의 수석이 맑고 깨끗하여 좋아할 만했다. 조계암에들르니, 길가에 부도 3구가 있었다. 첫 번째는 휴정의 것이고, 두 번째는 자휴의 것이고, 세 번째는 보운의 것이라고 했다.

    저녁 무렵 유점사에 도착해 산영루에 올랐다. 노승 법견을 맞이해 첨례했는데, 도행이 매우 높았다. 능인전에 들어갔다.-곧 법당이다- 능인전 안에는 목가산과 산골짜기를 만들어 놓았고, 그 골짜기에는 53구의 불상을 봉안했다.

      유점사의 사적을 살펴보니, 바로 고려의 재상 민지가 기록한 것이었다. 53불과 동종이 서역에서 바다를 건너와 고성에 닿았는데, 종은 느릅나무에 걸리고 불상은 느릅나무 뿌리에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유점사 터였다. 고성군수 노춘이 그 특이한 내력을 기이하게 여겨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상도에 맞지 않았다. 그 뒤 여러번 화재를 당해, 종은 녹고 불상은 남아 있다.

    사찰의 크기와 화려함은 금강산에서 으뜸이었다. 왼쪽에는 응진전이 있어 나한을 봉안했고, 오른쪽에는 해장전이 있어 여러 불상을 봉안했다. 숭당은 안묵당이며 선당은적조당이었다. 응진전 왼쪽에 향적당이 있으며, 응진전 아래에 명부전이 있는데 중앙에 시왕을 봉안했다. 그 아래에 대권당이 있고, 그 안에는 노춘의 상을 안치했다. 해장전아래에는 골승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달마상을 봉안했다. 그 아래가 금당인데, 그안에 담무갈상을 봉안했다. 그 아래 좌우에는 여러 요사채가 있었다. 능인전 아래에는검은 돌로 만든 12층탑이 있었다. 진여문을 나오면 그 다음이 범종루이고, 그 다음에는 회전문이 있는데 좌우에 각각 천왕 두 구씩을 봉안했다. 그 다음은 해탈문이고 또 그다음이 산영루이다. 능인전은 승려 영운이 창건했다고 한다.

    29일(경신). 밥을 먹은 뒤 유점사에서 북쪽으로 10미리 남짓 가서 불정대에 올랐다. 그 경관이 비록 은선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또 하나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박달곶으로 내려오니 험하기가 소인곶과 비슷한데, 거리는 1, 2리가 채 못 되었다. 시내 하나를 건너 송림굴에 이르렀다. 두 개의 굴이 있는데 한 곳에는 샘이 있고, 다른 한 곳에는 크고 작은 돌부처 100여 구를 봉안했으며, 승려 경진과 신변이 살고 있었다. 그 암자 앞에는 용연이 있고, 용연 아래에는 석담이 있어 구경할 만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1, 2 리를 가서 외원통사에 도착했다. 절에는 승려 10여 명이 있었고, 대웅이 수좌승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외원통사에서 송어담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수석은 모두 기이하고빼어나서 홍취가 무르익었지만, 일일이 찾아보지는 못했다. 선담의 위아래, 경면상담과경면하담, 징심상담과 징심하담의 경치가 최고였다. 비록 구룡연이 절경이기 는 하나 이보다 크게 빼어나지는 않았다. 그 다음이 백천담과 송어담인데, 모두 유람하며 감상할만했다. 뒷날 호사가로 하여금 찾아와 구경하게 하고자 이를 갖추어 기 록할 뿐이다.

    개방사에서 말을 쉬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고성 군수가 사람을 보내 고산정으로 초대했다. 강가에서 회포를 풀고 각자 술 세 잔을 마셨다. 저녁 무렵 돌아와 해산정에서 잤다.

    5월 1일(신유). 해산정에 그대로 머물렀다.

    2일(임술). 아침 일찍 출발했다. 명로가 왔는데, 감호에 있는 최영의 집에서 작별했다. 최영의 동생 최헌과 양시익이 함께 나와 영접했는데, 양시익은 양만고의 아들이다. 열산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건봉사에서 잤다.

    3일(계해). 일찌감치 출발하여 간성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중경이 관찰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간정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양양에 도착하니 지세가 태평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함께 잤다.

    4일(갑자). 지세가 만류해서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출발하여, 겨우 상운역 유객당에도착했다. 찰방 이순은 전사관이 되어 강릉에 갔다고 했다. 박시창이 고성 군수에게 작별을 고하러 갔다가 고성 군수가 만류하며 주는 술에 취해서 도착하지도 못하였다.

    5일(을축). 일찍 출발해 동산역에서 아침을 먹고, 연곡에서 점심을 먹었다. 박시창이왔으며, 저물녘에 관아에 도착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홀로 지내기를 좋아하여 세속의 일을 즐겨하지 않는다. 게다가 산수 사이에서 회포를 풀어내기를 좋아해 벼슬길에는 뜻을 끊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먹고 살 수가 없어, 부득이 과거공부를 하여 아주 적은 녹봉을 구하였다. 이미 뜻을 이룬 후에도 행적이 도성을 떠나지 않았으니, 초심을 깊이 생각하며 처연히 스스로 슬퍼했다.

    지난해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면서 벗들과 함께 풍악산을 유람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란으로 인해 갑자기성은으로 서용되어, 조정의 명령으로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가게 되었는데, 동쪽을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올해 우연히 그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되었다.

    아! 사마천은 장대한 유람으로 문장을 이루었고, 소동파는 먼 곳으로 유배되었기에영외의 문장을 지었으니, 모두 기이한 경관으로 그들의 가슴을 장대하게 했다. 나의 이번 유람은 보잘 것 없어서 지난날의 나와 똑같다.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다만 이 유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인에게 찾아가 보도록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