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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이명준(1)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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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유산록(遊山錄)』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우리나라에 세 개의 이름난 산이 있는데 영남지역의 지리산,관서지역의 묘향산, 동해의 금강산이다. 이 세 산 중에서 금강산이 가장 좋다.그래서 중국인이 ‘원하건대 조선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네.’라는 시구가 있기도 하다.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의 최고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한 번 차근차근 유람하면서 평생의 소원을 풀어보고 싶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숭정 1628년(무진), 형조참판으로서 외직에 보임되기를 강력히 요청하여 강릉부사가 되었다. 정월에 업무를 시작해 공무와 개인적 일로 분주하였는데 4월에 조금 일이 정리되었다. 그래서 내 나이 예순에 지금 풍악산을 유람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훗날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뛰어난 경관을 탐방하기로 결심하였다.

     두 아들 현기와 선기그,리고  박시창을 데리고 12일(계묘)에 출발하였다. 연곡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해질 무렵 동산에 도착하였다. 권칭과 정기평이 술을 가지고 만나로 왔다. 

     13일(갑진), 아침 일찍 동산을 출발하여 상운역의 유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날이 저물어 부지런히 낙산사에 도착하였다.양양부사 조위한[자는 지세]은 나의 오랜 벗이다. 이화정에서 미리 기다리며 술과 음악을 준비하였으나 비가 내려 빈일요를 거둬들여 잔치를 즐기다가 날이 어두워 그만 두었다. 

     낙산사는 신라 때 신승 의상이 창건하였다. 뒤쪽 전각에는 관음보살의 소상이 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선방 벽에는 안견의 산수도가 있었다. 사찰이 빼어나 경치는 관동팔경의 하나이다.사람들은 중국의 금산사,감로사 등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어느 곳이 더 절경인지 알 수 없다. 사찰의 동쪽에는 의상대가 있고 의상대 북쪽에는 관음굴이 있는데 익조가 후사를 얻기 위해 기도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14일(을사), 아침에 낙산사를 출발하여 청초호를 지나고 영랑호에서 잠시 쉬었는데 매우 맑고 빼어났다.청간정에서 점심을 먹고 만경대에 올랐다. 이 또한 관동팔경의 하나로, 직접 보니 자못 듣던 것만 못하였다.청간정에서 20여 리를 가자 뚝 끊어진 산 하나가 바닷가에 우뚝 서 있었다. 역 관리인에게 물으니 능파대라 하였다. 수레를 돌려 올라가 조망해 보니 동쪽은 큰 바다이고 해변의 경치는 대개 비슷한데 서쪽을 바라보니 좌우의 호숫물이 포구로 넘쳐 흘러들고 있었다. 논은 막 써레질을 하여 무이 평평하게 차 있고 작은 다리가 시내 위에 가로놓여 있었다. 어촌이 늘어선 곳에는 저녁연기가 막 피어 오르고 있었다. 겹겹의 산과 봉우리가 구름 사이를 뽀족뽀족 솟아있고 석양이 빛을 숨기며 사그라지니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내가 앞쪽의 광경이 뒤쪽보다 못하다고 하니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또 10리를 가니 선유담이 있었다. 못의 크기는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앞에 산이 빙 둘러 기 다란 산등성이가 뻗어져 물속으로 들어가니 호수의 좌우가 띠를 두른 듯 비치었다. 큰 소나무 수백그루가 앞뒤로 빽빽하게 서 있어 맑게 트인 시야는 비록 영랑호만  못하였지만 그윽하고 깊숙한 느낌은 좋아할 만하다. 평론을 잘하는 사람도 우열을 쉽게 가리지 못할 것이다.

      해가 저물어 간성군에 이르렀다. 간성군수는 오랜 친구인 김상복[자는 중정이다]으로, 업무로 착출 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 를 나눌 수 없어 진실로 한 번의 만남에도 운수가 있음을 알겠다. 아쉽게도 그 집 하인의 접대가 매우 박절하여 더욱 한스러웠다. 달빛을 받으며 영월루에 올랐다. 유량은 남루에서의 흥이 얕지 않았지만 나는 감상할 마음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15일(병오).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아침 일찍 간성을 출발하여 20여리를 가서 화진포에 닿았다. 그 지역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운근현이었는데 함몰되어 화진포가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면 물밑의 집들이 어렴풋이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황당하여 믿을 수 없었다. 대개 모래섬과 번갈아 나타나는 모습과 맑고도 그윽한 정취는 경포호와 비교하면 경포호가 아마도 격이 낮을 터인데 그  명성이 도리어 우위에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떠 대의 좌우에는 좋은 논밭이 많았다. 왼쪽은 군사 이경순의 집이다. 이경순은 시문을 잘했으며 늙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그 집을 지키지 못해서 온 가족이 이사 했으나 그 터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오른쪽은 군사 이연지의 집인데 모두 사둘만했다. 그 곁에는 마전도 많아 빌려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머물러  살고 싶은 생각있었지만 누가 나에게 산을 살 돈을 주겠는가.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정오가 다 되어 열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법을 먹었다. 무송도를 지나면서 잠시 명파역에서 쉬었다. 송도를 거쳐 대강역에서 점심을 먹었다. 무송과 송도의 뛰어난 경관은 대략 만경대와 다르지 않았다. 어제 저녁 박시창이 간성사람들의 푸대접에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말하기를 “언제 고성군의 경계에 당도하겠습니까. 고성군에서는 반드시 성대하게 갖추어서 대강역에 나와 대접할 것이니 어찌 이처럼 적막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데 대강역에 이르니 역참에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승려의 잿밥을 미리 기대하다가 배불리 먹지 못한다더니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서로 배를 움켜 잡고 크게 웃었다. 한 참 있다가 음식을 차려먹고 나니 짙은 안개가 하늘을 덮고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대강역에 출발하여 감호로 가다가 전도사 정전의 정자에 올랐다. 네모난 호수와 바위의 봉우리가 맑고도 빼어나서 좋아할 만하다. 아! 이런 강호의 절경을 가지고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여전히 벼슬을 구할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바닷길을 따라 십 여리를 가니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른바 현종암이다.  집처럼 둥그런 바위 구명은 눈비를 피할 만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오백 나한이 바다에서 나와  석실에 기거하다가 왼쪽 바다에 정박시켰다. 그래서 위에는 현종암이 있고 바닷가에는 복주암이 있고, 서쪽에는 계주암과 곡포암이 있는데 모두 신성의 옛 자취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황당하여 다 기록하지 않는다.

      마침내 산을 내려가서 남강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뱃사람이 배를 준비시켜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 북쪽 위에 불빛이 반짝거려 이를 따라 강을 건넜다. 고성군수  허계(자는 명로이다)는 나와 대대로 교분이 있는 사이로, 오래도록 언덕위에 서서 목을 빼고 기 다렸고 매우 정성스럽게 여독을 위로 하였다. 언덕에 올라 마주하니 서로의 반가움이 알만 했다. 그 자리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해산정으로 들어가 서너 잔 더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같이 간 사람들은 모두 축축한 곳에 있게 되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정자의 빼어난 경관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16일(정미), 아침 일찍 일어나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바다와 산의 절경을 품평하고 싶지만 바다 안개가 자욱하더니 날이 저물어서야 개었다. 동쪽으로 바다 어구를 바라보니 바위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 마치 물살이 부딪히는 지주석과 같았다.

     남쪽으로  바위로  된  세  붕우리가 눈앞에  늘어서  있고 서남쪽으로  금강산이  옥처럼  서 있어 푸른 빛이 눈에 가득했다. 동쪽과 서쪽에는 두 개의 거북바위가 있었다. 하얀  비단 같은 큰 강은 너른 들판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평가하는 사람들은 죽서루보다 경치가 뛰어난데 관동팔경에 들지 못함 을 괴이해 했다. 황혼녘에 명로와 함께 고산대에 올랐다가 달을 기 다리려고 강에 배를 띄웠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가려 이경에 되도록 달빛을 볼 수 없었다. 각각 술을 서너 잔 씩 마시고 실망하여 돌아왔다.

      17일(무신), 밥을 먹을 후 명로와 함께 삼일포에 갔다. 고을 사람들이 미리 배를 준비해 기다리고 있어 이내 그 배를 타고 갔다. 명로가 왼쪽 산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양봉래가 시를 쓴 바위입니다.”라고 하였다. 븕은 글씨가 있는 곳에 배를  정박하여 이른바 ‘단서’를 보니 ‘술랑도만석행’이라는 여섯 글자였다. 처음에는 글자의  흔적이 매우 선명했었는데 어느 완고한 군수가 유람객이 구경하는 것을 싫어해 부셔 버렸다. 그래서 ‘술남석’ 세 글자가 선명하데 나머지는 지워졌다. 단서의 오른쪽에 허백당의 시가 있다. 바위를 움푹 파 내고 그곳에 시를 새긴 돌을 끼워 넣었다. 그 위에 매향비가 있다.

      북쪽으로 가서 사선정에 올랐다. 정자주변에는 큰 소나무7-8그루가 있고 소나무 속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자의 뛰어난 경관은 유람객들이 모두 칭송하지만 몽천의  경치만 못하였다. 눈앞에는 바위 봉우리가 겹겹으로 솟아 있었다. 삼일포의 절경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어 진실로 천하의 절경이다. 유람온 사람들이 사선정만 말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사선정 뒤쪽 바위에 이름을 쓰고 따르는 사람에게 새기게 하였다. 다시 사선정에 올라 몇 잔을 마시고 저물에 해산정으로 돌아와 잤다.

      18일(기유), 일찍이 밥을 먹고 해산정을 출발하였다. 나는 먼저 두 아들인 현기와 선, 명로의 아들 두향, 박시창과 함께 발연에 이르렀다. 하인에게 물놀이를 시키고 수백  걸음을 더 올라갔다. 바위에 양사언이 쓴 봉래도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시 3수가 있다. 첫 번째는 남강의 시이고, 두 번째는 창해의 시이고, 세 번째는 자동의 시였다. 글씨가 바위 위에도 새겨져 있는데 필체는 양봉래의 것과 비슷하지만 누가 썼는지 알 수 가 없다. 이끼를 걷어내고 겨우 자획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지나서 명로가 찰방 이순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고 왔다. 이때,  짙은 안개가 하늘에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명로가 말하기를 “이런 짙은 안개는 유람에 가장 방해가 된다.”라고 하여 내가 농으로 “어찌 정직하게 기도하면 하늘과 통하는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한퇴지가 여산에 올랐는데 마침 가을 그믐이었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뭉친 구름과 짙은 안개 산허리를 감추니 비록 정상이더라도 어찌  능히 다 볼 수 있겠는가. 마음을 가라 앉히고 말없이 기 도하면 반응이 있을 것이니 신명이 어찌 정직하게 기도하면 감동하지 않겠는가. 서로 농담하며 웃었다. 마침내 상운 찰방과 작별하였다.

      소령고개를 오르자 미풍이 언뜻 불어 안개를 사라졌다. 희구름이 튼 골짜기 를 가득 메우니 마치 흰눈이 막 대지를 뒤덮은 듯 은하수가 골짜기 를 가득 채운 듯 하였다. 많은 봉우리 모습은 마치 땅에서 피어난 연꽃 같았다.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석양이 물들어 밝은 빛이 반사되니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내가 다시 농으로 명로에게 “이것이 하늘과 통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하자 명로가 웃으면서 이번 유람에 제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경관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계수대와 환희재를 지났다. 이 고개는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 한 층을 오르면 다시 한 층이 더 있다. 바로 20여리를 올라가 비로소 백전암에 도착하였다. 승려 언기를 만났는데 승복을 입은 모습이 매우 위엄하였다. 그와 더불어 말을 해보니 자못 도리를 알고 속세의 얽매임에 벗어나 대개 승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19일(경술), 일찍 일어나 골짜기 입구를 내려다 보니 흰 구름이 푸른 산과 뒤섞여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언기대사가 그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구름이 이처럼 일어나니  해질녘 반드시 안개가 자욱하게 있을 것이다. 만약, 구정봉에 오르시면 모름지기 가세요.”하였다.

      마침내 재촉하여 밥을 먹고 출발하여 적멸암과 백운암을 지나 구정봉에 올았다. 산아래 흰 안개가 멀리 겹겹이 산 너머까지 가리고 있어 보이는 것은 곁에 있는 바위 봉우리 뿐이었다. 오후에 짙은 구름이 다 걷히자 안팎의 많은 산들을 셀 수 있었다. 나는  명로와 더불어 각각 재미삼아 절구시 1수씩 짓고 점십을 먹었다. 바위에 이름을 쓰고  따르는 사람에게 이를 새기게 하였다. 적멸암으로 돌와와 저녁에는 서쪽 대에 오랐다. 봉우리가 둘러 에워싸고 저 멀리 은신대, 만경대, 불정대 등이 보였다. 서쪽의 대는 호은대하고 하였다.

      20일(신해), 적멸암에서 일찍 출발하여 대장암에 이르렀다. 돌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구추령을 넘어 상원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일찍이 무학대 절경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 가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가마 매는 승려들이 싫어하여 이를 숨겼다. 안문재를 지나  십 여리를 가서 비로소 이를 알고 깜짝 놀라 모두 탄식하였다. 내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따라오는 사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시낵사 작은 바위에 올라가 기다렸다. 바위 앞에 작은 폭포가 있는데 맑고 뛰어나서 볼만 했다. 명로와 두 아들이 뒤쫓아 도착하여  함께 구경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만약 이 대가 경기 지방에 있었다면 반드시 사람마다  칭송했을 것이다. 다만 이 산에 있어 시냇가에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물즐기  하나도 절경으로 사람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는냐에 달린 것인가. 그러나 나는 명로와  함께 다행히 이 대에서 반나절을 완상했으니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李許臺라고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밥을 물에 말아 먹고 원적암에 도착하였다. 땅의 지세는 사방에 바위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고 사찰은 황폐해 진지 오래라 돌부처만 감실에 있다. 드디어 청소를 하고 앉아 비로소 비로봉에 오를 것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구룡연은 함께 볼 수 없었다. 마침 절벽에 써 놓은 권제중, 정0숙, 조휴 등의 이름을 보았는데 모두가 구룡연에서 비로봉으로 올랐다고 언급하였다. 승려  종원에게 물으니 과연 좁은 길이 있어 옛날 원적암에서 구룡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서로 기뻐하며 박수를 치고 다시 구룡연을 완상을 논의하였다.

    21일(임자) 원적암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고 남쪽으로 시내를 따라 5리 쯤 가자 돌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비로봉에 이르니 산이 무너져 돌무더기가 쌓여있는데 이제  무너진 것은 하얗고 예전에 무너진 것은 검었다. 험하게 쌓인 돌들이 거의 천 길이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 돌을 잡고 엉긍엉금 조십스럽게 올라갔다. 길이 끝나고 바위의 틈이 벌어져 그곳으로 들어갔다. 여기부터 비로봉 정상까지 동쪽은 성과 같은 바위고, 서쪽은 평평한 토양이었다. 잡목을 잡고 측백, 진달래, 해송만 있는데 모두 작고 땅에 붙어  누워 자라고 있었다. 진달래가 막 피어 날씨는 3월 초순과 같았다. 날씨는 맑았다. 정오에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니 하늘과 맞닿아 아득히 출렁이고 있었다. 안변의 국도, 통천의 신도와 안조, 고성의 영진곶이 작은 주먹만한 돌로 보였다. 사방이 멀고 가까운 산세가 두손을 공손히 호위하듯 둘러 쌓고 오래되어 얼마나 많은 바위인지 알수 없었다. 산은 뽀족하고 봉우리가 되고 낮은 것은 고개가 되기도 하였다.

      세상에서 1만 2천 봉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눈앞에서 가리킬 수 있는 영흥의 검산, 안변의 황룡산, 양양의 설악산, 강릉의 오대산, 삼척의 두타산, 원주의 치악산, 양구의 저산, 춘천의 청평산, 지평의 용문산, 영평의 백운산, 양주의 천보산, 송도의 성거산, 철원의 보개산, 해주의 수양산, 장연의 구월산, 등이 있는데 모두 너무  작아 다 셀 수 없다.

    가까이 있는 작은 산들이 수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의 기이한 모습을 이름 지어 표현 진실로 어려웠다. 바위 봉우리들이 높이를 다투고 뛰어남을 경쟁하는데 사람이나 귀신 모습 같기 도 하고 새나 짐승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앉아 있는 듯, 서 있는 듯, 우러러 보는 듯, 굽어보는 듯 하였다. 달려가는 모습은 적에게 달려드는 군사 같기 도 하고,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은 조정에서 알현하는 선비와 같았다. 다양한 색깔이 드러날수록 기이하고, 모든 것이 내 지팡이와 발아래 있어 진실로 천하의 장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구정봉, 일출봉, 월출봉, 미륵봉, 혈망봉, 원적봉, 설응봉, 안문봉, 영랑재 등이 뭇 붕우리 위에 가장 높게 솟아 있었다. 나머지 작은 봉우리들은 함께 온 스님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를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녁에 동쪽과 서쪽에 한 줄기 검은 기운이 일어나 한 필의 비단 같이 널려있었다. 한참 후 비가 되어 산과 바다를 덮었고, 비로봉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가끔 보슬비가  물결처럼 밀려와 조금씩 뿌려주는 시야가 오히려 선명하였다. 내가 명로에게 “이미 맑은 날의 경치를 보았고, 또 비오는 경치도 보았으니 하늘이 우리에게 베푼 것이 많네.”하였다. 서로 기뻐하여 축하해 주었다. 밥과 술을 하고 잠시 후 바위 이름을 새겼다.

      저녁이 되어도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였다. 날씨가 개자 하늘이 맑아 저녁놀이 산을 비추자 사의 기운이 더욱 아름다웠다. 두보의 ‘비가 개도 산은 그대로 이고, 푸름이 끝나니 골짜기가 새로운 듯’ 이라는 시구가 경치와 아주 흡사하니 진실로 뛰어난 작품이다. 원적암에서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