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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시문

    신익성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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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유금강소기(遊金剛小記)』      신익성(申翊聖) 136)


    고성(高城)의 모든 경내는 산, 바다, 호수, 정자는 물론이고 아주 평범한 바위라고 할지라도 모두 뜻과 모양이 있다. 새 같은 것, 짐승 모양을 한 것들도 있고, 어떤 것은 날아갈 듯 하기도하고 달아날 듯 하기도하였다. 남강(南江)은 바다로 흘러들었고 칠성 바위들이 바닷가에 쭉 벌려져 있어 옥으로 된 죽순과 옥비녀인 듯하였다. 해산정(海山 亭)이 내리누를 듯이 있으니 신선들이 살던 곳이라고 할 만 하다. 삼일호(三日湖) 근처 에는 몽천사(夢泉寺)의 옛 터가 있는데 규모가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맑은 정취는 오나 라의 북고와 우위를 겨를 만하다. 태수가 거사(居士)에게 작은 모옥을 짓게 하고 그것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삼일호 서쪽 절벽 위에는 붉은 글씨가 있는데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움푹 패여 사람의 자취가 닿기 어려웠다. 새겨진 글자의 서법(書法)이 아주 고풍스러웠으니 홍춘정(洪春亭)이 안렴사가 되었을 때에 문장을 지어 검은 돌에 새겨서 바위를 깎아내고 새겨넣었다고 한다. 그 위에는 매향비(埋香碑)가 있는데 글자들이 이미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으니 대개는 향을 묻은 사람들의 성명을 적어놓은 것이 었다.

    부용호(芙蓉湖)는 방백 정하숙(鄭下叔)이 사는 곳이다. 호수가 외금강 아래에 있어서경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그 주위의 골짜기도 깊숙하고 조용하면서도 씨 뿌리고 모내기 할 만 한 땅이 있어 은자들의 은거지가 될 만하였고 가마를 빌릴 수 없는 것이 한 스럽다.

    감호(鑑湖)는 사방 3, 4리이고 물이 맑아서 터럭까지도 환히 비추고 앞으로는 구선봉을 마주 대하여 금강산의 향로봉과 백탑동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갖고 있다. 그 아래는 규모가 비슷비슷하여 왼쪽에는 양사언이 살던 옛 집이 있다. 촌락이 숲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오른쪽에는 키가 큰 소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바닷가를 가릴 정도였다. 그 소나무 너머에 사봉이 하늘을 향해서 우뚝 서 있어 옥같이보인다. 호숫가에 있는 정자는 토호였던 정유(鄭油)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호수가 많지만 당연히 이 감호가 제일이다.

    간성(扞城)으로 가는 길에서 바다 갈매기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서 물가 모래밭으로 내려앉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주 기이하였다. 이리저리 훑어보는 사이에 굽이진 해안으로 나오니 어가(漁家)들은 해안에 의지하여 있고 아녀자와 아이들이 섞여 앉아 있는가운데에 언덕같이 쌓아놓은 물건이 있는데 바로 잔물고기들이었다. 갈매기 떼가 와서 채가도 꺼리지 않았다.

    동해의 거룻배는 통나무를 파내어 만드는데 너 댓 명이 탈 수 있으니, 농어를 잡는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해가 뜨면 돛을 펼치고 나가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오후 서너 시쯤 하늘 밖 저쪽에 한 점이 나타났다가 잠깐 사이 물가에 닿으니 정말 가볍고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다. 선대(仙臺)와 능파정(凌波亭)은 모두 해상에 있는 볼거리인데 표연한 모습이 세상을 버리고서 홀로 서 있는 듯한 의취가 있다.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이름은 단서에 쓰여 있다. 금강산에도 영랑점이 있고 고성에도영랑호가 있으며 간성에도 영랑호가 있는데 영랑이라고 하는 이가 누구이고 또 언제 사람인지 모른다. 영동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선의 부류라고 한다. 고성의 호수는 그윽하고 간성의 호수는 더욱 맑고 시원스런 풍경을 갖고 있다. 소나무 숲과 암석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으며 반나절만이라도 돌아다니면 영랑을 만날 것만 같다.

    고성의 수석이 기 이한 곳들은 다 쓸 수 없을 정도이고, 현종암(懸鐘巖)은 마치 엎어 놓은 종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안이 벌집 같이 텅 비어 십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니 조화옹의 교묘한 솜씨를 알 수 있다.

    선유담(僊游潭)은 원래부터 신령스런 곳이다. 내가 피곤하여 소나무 뿌리에 기대어 잤는데 꿈에서 옛 옷과 관을 쓴 사람과 즐겁게 선(仙)과 불교의 일들에 대해 말하였다.

    잠에서 깨었어도 여전히 그 이야기 가 기 억나니, 기이하다.

    열산호(烈山湖)는 바닷가에 있는데, 관동에서 제일 크다.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면서타고 나갈 배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명사(鳴沙) 수백 리를 가마를 타고 가기도 하고 작은 누각 같은 데서 걸터앉아 있기도 하는 등 마음에 따라서 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였다. 처음 고성을 빠져나왔을 때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앉아서 쉬니 행차가 더뎠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경치가 뛰어나 모두 다 감상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매향포(埋香浦), 우두대(牛頭臺), 화진포(花津浦) 등 몇몇 곳은 경치가 더욱 기이하였다.


     9월 13일청간정(淸澗亭)에 이르렀다. 환한 달빛과 바다 파도가 서로 넘쳐흐르고 하늘에는 구름조차 없어 대낮같이 밝았다. 이에 내가 만경대에 올라 돌을 베고서 누웠더니 밤이 깊어지자 서늘한 이슬이 옷을 적시었고 맑은 기운이 뼈에까지 스며들었다. 노복에게 만경대 아래에서 피리를 불도록 하였는데 어룡이 모두 솟아 올라올 것만 같았다. 이 밤, 이 달을 천하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나처럼 득의해서 바라보는 이도 없을 것이다.

    청간정은 아주 바다 가까이에 있어 사나운 파도가 뜰까지 칠 때면 그 소리가 아주웅장하였다. 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당나라 사람이 시에서 ‘조수(潮水) 소리는 처음 온 나그네를 근심스럽게 하는구나.’라 한 것이 사실이었다.

    청간정 기둥에 비스듬히 쓰여진 글자 20개가 있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나그네가 되었을 때 쓴 으로 그 후 사람들이 새겨 넣었는데 그 세월을 헤아려보니 소재의 나이 23세 때 쓴 것이다.

    명사라고 하는 것은 모래를 밟았을 때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데 관동 수백 리에 걸쳐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해당화가 그 위에 줄지어 피면 마치 담요를 펼쳐놓은 듯, 비단장막을 둘러쳐 놓은 듯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금앵도 같은 열매를 맺는다.

    바닷가의 길이 모두 명사이기는 하지만 드문드문 바윗길도 있는데 반드시 파도 가운데서 돌출하여 대를 이루니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다. 평지에는 반드시 푸른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푸른 일산 같이 수백 리에 뻗쳐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소나무 아래로 다닌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기운이 있다.

    천후산(天吼山)은 양양(襄陽)에 있다. 골짜기 와 산봉우리가 금강산과 나란히 일컬어질만하다. 하늘을 향해 곧바로 솟아 있으면서 크지는 않지만 이름난 가람이 많은 정토(淨土)라서 암자를 짓고 사는 고승들이 많다고 한다.

    내가 일출을 세 군데에서 보았었는데 그 중 해산정에 머문 것이 가장 길었으나 비가 자주 와서 세 차례만 보았을 뿐이다. 청간정, 낙산사(洛山寺)에서는 모두 맑게 개였었는데 낙산사에서 본 것은 더욱 대단하였다. 세상에서 낙산의 일출을 일컫는 것도 연유가 있다.

    양양의 수령이 낙산사 이화정(梨花亭)에서 내게 술을 대접하였다. 술에 반쯤 취하자 의상대(義相臺)로 자리를 옮겼다. 몇 개의 점이 저쪽 하늘가에서 오는 것이 보였는데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고깃배가 도착한 것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하얀 돛이 물가에 닿아 바다의 진미를 제공하여 실컷 술을 마셨다. 자리에 있던 어린 기생이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불렀는데 매우 맑고 아름다워 듣노라니 정신이 새로웠다.

    상운역(祥雲驛)의 유객당(留客堂)이 자못 깨끗하였다. 뜰 가의 오죽은 울창하여 사랑할 만했다. 한 쪽은 바다로 이어졌는데 키 큰 소나무들이 수십 리에 뻗어 있으면서 흰모래 위에 그늘을 드리웠으니 관동의 명소이다. 역관이 배 다섯 개를 가져왔는데 그 크기 가 여러 되나 되는 바가지만 하였다.

    강릉의 경계로 들어가니 지세가 매우 넓고 마을은 풍요로웠다. 관란정(觀瀾亭) 아래푸른 소나무가 시냇가를 따라서 십리에 펼쳐져 있었다. 때는 깊은 가을로 해상의 가을빛은 매우 더디게 비추었다. 아주 울긋불긋한 붉은 잎 들이 볼 만하였다. 정자에는 지어놓은 시들이 벽에 가득하였는데 모두 벼슬아치들의 시였다. 세월을 따져보니 5, 60년이나 되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자도 있었다. 아! 세상의 유명한 벼슬아치들이 헛된 성명을 훔쳐 한때에 드날리지 않음이 없으나 죽고 나서 후에 이름이 일컬어 지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슬프도다.

    우두대가에는 단정하게 단장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보니 강릉에 적을 두고 있는 기생 옥랑(玉娘)이었다. 젊었을 때 평강(平康)에서 같이 있다가 보지 못한 지 십여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머리 땋은 어린 기생이었는데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그녀도 내수염과 머리를 보고서 놀랐다.

    강문교(江門橋)를 건너 호숫가 숲 사이에 은근히 보이는 누각을 바라보니, 붉게 칠해져 우뚝 솟아 올라온 것이었다. 말을 타고 가서 사립문을 두드려 보니 정자는 비었고 주인은 없었다. 뜰가에 있는 푸른 오동나무와 쭉 뻗은 대나무는 사람의 뜻을 아는 듯하였고 안팎의 호수와 바다가 기이함을 서로 뽐내는 듯하였다. 때마침 해가 기울어 석양이 호수에 물들었고 바다의 파도는 하늘 끝까지 맞닿아 고요한 듯하였다. 해상에서 제일가는 곳이었다.


    『遊金剛小記』



    水岾. 內外山界也. 外山僧徒持籃輿來. 替內山僧告辭. 仍乞詩. 無慮數十輩. 賦詩淸事. 應副作一役事. 有爲而爲之. 便作苦. 自水岾醉過隱身菴. 菴中唯有一僧. 名曰普珠. 携之登隱身 臺. 出半天臨大海. 而九井峯十二瀑布. 蜿蜿如鬪龍爭珠. 昨夜雨過. 落勢尤壯. 此內外山第一壯觀也. 域中諸宗師. 爲休靜立碑于金剛山. 治石高一丈有半. 月沙相國譔文. 乞余書之. 白蓮菴法堅長老年八十. 病臥蒲團. 與之言. 淸峻豪爽. 極有快處. 恨不得從容耽討耳. 萬景臺. 卽外山之最高峯. 東臨滄海. 海天一色. 指點三山十洲. 飄然有乘雲之意. 荀中郞登北固望海. 謂秦漢之君. 必褰裳濡足. 若令荀公臨此地. 當作如何觀也. 楡岾. 巨刹也. 結構宏麗. 山影樓跨大溪. 尤爲勝絶. 化龍潭亦奇絶. 烏啄井爲古蹟. 寺中藏 光廟御押敎書, 元時制勑. 山影樓跨大溪傑構. 朱欄畫桷. 映帶上下. 秋色政佳. 錦石纈彩. 令篴奴度曲發行. 壺以澆之. 外山之水. 大於山影樓. 縈回數十里. 諸峒溪澗合流於百川橋. 境落昭曠. 石勢奇詭. 踏山者 到此洗心. 舊有橋亭宏麗. 今已毀矣. 盧偆爲楡寺所尊者. 見於地志. 怪誕不可信. 而狗岾上 有盧偆井. 行人必喢之. 麗朝宰相閔漬所著山水記. 尤妄誕不可信也. 狗岾之路. 羊腸百盤. 到盧偆夫人之祠. 始得坦壤. 行數十里. 淸川白石. 頗覺夷曠. 民居甚稀. 蕭條之境. 益復淸 幽. 外山自柏顚諸菴臨海者. 面勢極爽豁. 鉢淵之水戲. 動石之古蹟. 稱勝絶. 而新溪一面峯 巒水石. 處處殊異. 楊蓬萊結屋其下. 舊址猶存. 新溪寺燬去. 或云傍近驛奴苦其遊客馳馹涉險. 火之. 數年來. 草木荒翳. 山門谿逕. 湮塞不可通. 泛舟於三日浦. 摩娑丹書之壁. 觴于四仚亭. 酒酣. 太守李敬仁克甫歌之侑之. 不覺歡暢. 余亦以一絶書扇頭以酬之. 就浴于湯泉. 泉卽金剛山之外面. 光廟朝沐浴行宮舊址尙在. 浴已投養珍驛村舍甚陋. 大雨一晝夜. 溪水大 漲. 人跡不通. 傍有僧雙仡, 神歇. 能談禪說因果. 據胡床聽之忘倦. 高城一境. 無論山海湖 亭. 雖尋常巖石. 皆有意態. 如禽如獸. 或飛或走. 南江入海. 七星石諸巖羅列海門. 如玉筍瓊簪. 海山亭壓之. 眞是仚區. 三日湖邊有夢泉寺舊址. 若結構小蘭若. 其淸絶可與吳中北固爭 甲乙. 太守令居士結茅茨. 將經營云. 丹書在三日湖之西絶壁上. 欹仄陷凹. 人跡難到. 所書字法甚古. 洪春亭爲按廉時. 作文刻烏石. 剔巖以納之. 其上有埋香碑. 字已剝落. 猶有可讀處. 蓋記埋香人姓名. 芙蓉湖鄭方伯下叔所卜. 湖水在金剛之外山下. 不但景致奇勝. 洞天幽 邃. 頗有種黍蒔秔之地. 足爲隱者棲遯之所. 恨不得稅駕焉. 鑑湖方數里. 淸澈可鏡毫髮. 前對九仚峯. 宛是金剛之香爐百塔諸勝. 其下傑構參差. 左有楊蓬萊舊業. 村落隱映林間如畫圖. 右有長松. 捍蔽海門. 松外沙峯特立干霄. 望之如玉. 據湖而亭之者. 土豪鄭沺云. 海上固多湖. 當以此爲第一. 扞城路上見海鷗千群下汀. 意甚異之. 顧眄間. 出曲渚. 漁家依岸. 婦幼雜坐. 有物如丘阜. 卽細魚也. 鷗群攫之無忌. 東海艓子. 刳木爲之. 可容四五人. 以釣巨口魚爲業. 日出便張帆而出. 瞬息不見. 晡時一點從天外來. 俄卽泊岸. 可知其輕快飛. 仚臺凌波亭. 皆海上勝賞. 飄飄有遺世獨立之意. 永郞之名. 紀之丹書. 金剛山有永郞岾. 高城有永郞湖. 扞城又有永郞湖. 所謂永郞者. 不知何許人. 亦不知年代. 嶺東人傳之爲眞仚者流. 高城湖幽絶. 扞城湖尤淸遠爽塏. 松林巖石. 殆非人境. 遺遙半日. 庶幾與永郞遇. 高城之水石奇處. 不可殫記. 而懸鐘狀如覆鐘. 而其中虛缺如蜂窩. 可容十餘人. 足見造化之巧. 僊游潭自是靈境. 余倦倚松根. 夢與古衣冠人劇談仚釋事. 覺來猶能記其語. 異哉. 烈山湖際海. 而在關東最鉅. 望之渺瀰. 恨無舟楫以泛之. 鳴沙數百里. 或以軟輿. 或跨小衛. 隨意行止. 初出高城. 途中遇會心處. 便坐憩. 行爲遲遲. 前路所經. 愈往愈勝. 不暇應接. 埋香浦, 牛頭臺, 花津數處爲尤奇.


    九月十三日. 到淸澗亭. 月華與海濤相盪. 天無纖翳如白晝. 余迺登萬景臺. 枕石而臥. 夜久涼露沾衣. 淸氣襲骨. 奚奴從臺下吹篴. 魚龍皆聳. 此夜此月. 天下共之. 亦無如我得意看. 淸澗亭最近海驚濤喧打庭際. 聲甚壯. 夢寐不成. 唐人詩云潮聲偏懼初來客. 實際也. 淸澗亭柱間有斜行廿字. 卽盧穌齋爲游客時書也. 後人刻之. 考其歲月. 穌翁廿三歲時書也. 所謂鳴沙者. 踏之琅琅有聲. 關東數百里. 蓋無不然. 海棠花羅生其上. 如鋪氈如錦障. 秋深結子如金櫻子. 海上路皆鳴沙. 間有巖逕. 必突出波心爲臺. 無一等閑. 平地必有蒼松. 落落如翠蓋狀. 亘數里. 行人多從松下行. 盛夏亦有爽氣. 天吼山在襄陽. 其洞壑峯巒. 可與金剛竝稱. 特立盤礴不大耳. 名藍淨土. 多高僧棲結者云. 余觀日出凡三處. 留海山亭最久. 而多雨只得三次. 淸澗亭, 洛山寺皆淸霽. 而洛山寺所看尤偉. 世稱洛山觀日出者. 亦有由歟. 襄陽使君爲余觴于洛山寺之梨花亭. 酒半移席于義相臺. 見數點從天際來. 邑人言漁舟且至. 俄以白帆泊岸供海珍. 遂劇飮. 席次小妓詠松江相國關東曲. 頗淸婉. 聽之神王. 祥雲驛留客堂頗淨灑. 庭畔 烏竹. 蔥菁可愛. 一面際海. 長松數十里蔭映白沙. 關東名區也. 驛官供梨五枚. 其大如數升瓠. 入江陵界地勢頗寬闊. 村居豐腴. 觀瀾亭下. 蒼松沿溪十里. 時値深秋. 而海上秋色頗遲. 紅葉正纈可翫. 亭臺間題詩滿壁. 皆宦客作. 考其歲月. 或有五六十年者. 而已不識誰何. 噫. 世間名宦者. 無非竊虛聲. 馳騖一時. 身歿而名不稱如此. 悲哉. 牛頭臺邊靚粧人候之. 就視卽江陵籍妓玉娘也. 蓋少日平康舊伴. 不見而十餘年. 昔日丫鬟小奴. 已具衰相. 渠亦驚我鬚髮. 渡江門橋望見臨湖樓閣. 隱映林間. 丹雘聳空者. 遂馳往款扉. 亭空無主. 庭畔碧梧脩竹. 政可人意. 表裏湖海. 爭相獻奇. 時斜景浸湖. 海濤接天杳杳. 海上第一區也. 


    『遊金剛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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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신익성(1588∼1644)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방축(放逐)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 등용 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그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하였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갔던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이 일로써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하여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낙전당집』·『樂全堂歸田錄』·『靑白堂日記』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