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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이송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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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홍덕보 묘표(湛軒洪德保墓表)    이송(李淞)


      홍덕보(洪德保)는 휘(諱)는 대용(大容)이요, 호는 담헌(湛軒)이니, 그 조선(祖先)은 남양인(南陽人)이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었던 용조(龍祚)의 손자요 나주목사 (羅州牧使)였던 역(櫟)의 아들이니(그 조와 부) 2대는 함께 재주로써 소문이 났다. 덕보는 또 미호선생(渼湖先生) 김원행(金元行)에게 사사(師事)하였으니, 그 동문 선비들은 모두 도의(道義)를 연마하고 성명(性命)을 담설하였다. 덕보의 제부형제(諸父兄弟)들은 박사업(博士業 과거 공부)을 하거나 또한 문사(文詞)로써 저명하였는데, 덕보만이 오직 옛육예(六藝)의 학에 뜻을 두어 상수(象數)와 명물(名物), 그리고 음악의 정변(正變 정풍 (正風)과 변풍(變風))을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여 묘하게 이치에 합하고 신기하게 해설을하였다. 특히 천문의 전차(躔次)와 일월의 내왕에 대해서는 그 형상을 본떠서 기구(器 具)를 만들고 시(時)를 점치고 절후를 측량함에는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다. 언젠가 계부(季父)인 참의공(叅議公) 억(檍)을 따라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곳의 성지(城池)와 궁궐, 인물과 재화(財貨) 등을 골고루 관찰하였으며, 선비들을 만나서는 번거롭게통역관을 내세우지 않고 그들과 언어를 통하였으며, 항주(杭州)의 학자인 엄성과는 서로 학덕(學德)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어려움을 질문하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은 덕보의 재학(才學)을 높이 칭찬하여, 우리 나라 선비들을 만나면 반드시 담헌의 안부를 물었다. 내가 소시에는 덕보와 서로 알지 못했는데, 경인년(1770, 영조 46)에 풍악산(楓岳山) 에서 만나 산과 바다를 주유(周遊)하면서 그와 침식 언담을 같이하며 서로 함께 지냈다. 돌이켜 보건대, 그는 본의 아니게 억지로 ‘예예’ 하는 일이 없고, 자기 의 뜻을 보이되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이로부터는 유람이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은 꼭 함께 다녔다.

    갑오년(1774, 영조 50) 봄에 나와 함께 동으로 바다에 나갔다가 양양(襄陽)의 낙산사 (洛山寺)에 이른 일이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붙고 저녁 달빛이 물에 흐르는데덕보가 거문고를 끌어당겨 몇 곡조 타니, 홀연히 서울에서 관리가 내려와 절간의 은을두드리면서 덕보를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한다는 글을 내어놓았다. 그리하여덕보는 그 이튿날 먼저 돌아갔으니, 그 후 10년간 내외 관직을 역임하면서 나와 함께 전일과 같이 서로 종유(從遊)하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 혹 만나 교산(郊山)에 모여 유련(留連)하면서 즐겁게 지내기도 하였다.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 중앙의 자그마한 관직은 다만 공문서의 지시 계획대로 하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마치 소나 양같은 것을 기 르고 회계나 맞도록 하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옛날에 孔子도 이런 일을 하였지만) 이런 것이 비록 성인(聖人)이 하던 일이라고는 하지마는 하기에 어렵지 않고, 그리고 (외직으로) 오직 주(州)와 현(縣)을 맡는 것은 내 뜻을 행하여 볼 만한데 이것도 역시 상부의 관청과 지방의 토호들이 방해하고 막아서 뜻을 펴볼수 없으니, 혼자 애쓰면서 조심히 열쇠나 잘 보관하고 법률이나 지킬 따름이다. 그리고 나의 성품은 각색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또 곁으로 위엄을 부려 몸가짐을 무겁게하는 일은 잘 되지 아니하며, 오직 공평하고 청렴한 것으로 위엄을 낳게 하여 이치(弛 置)해 버리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사적(仕績)이다.”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내가 덕보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또 산사(山寺)에 같이 가기 를 약속하였는데, 그 후 10일도 못 되어 덕보는 병 없이 졸지에 별세하였다. 아! 슬프다. 덕보가 일찍이 나와 더불어 담론한 것과 그가 간직했던 마음, 그리고 그 소행 등을 다 진술할 수는 없으나 그 학문이 오로지 평실(平實)을 숭상하고 과월(過越)하고 교격(矯激)한것이 없으며, 세속 선비들이 이론만 숭상하고 실행 실용(實行實用)을 전연 방치함에 대해 일찍부터 민탄(憫歎)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고금 인물들의 정사(正邪)ㆍ시비(是非)를 논함에 그 억양 취사(抑揚取捨)한 것은 전배(前輩)들의 정안(定案) 밖에 뛰어난 것들이 많았다. 그가 지닌 대심(大心)이야말로 공평하게 보고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는아량이었으니, 대도(大道)에 돌아가 뾰족하고 작고 좁고 사사로운 것을 버리는 것은 진실로 지금 세상에 있어서 행하기어려운 일이며, 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이런 도 (道)가 보급되었으면 한다. 덕보의 시조는 휘(諱)가 선행(先幸)이니 고려의 금오위 별장동정(金吾衛別將同正)이요,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는 부제학(副提學) 휘 형(泂)과 이조판서(吏曹判書) 정효공(貞孝公) 휘 담(曇)과 판중추 남양군 충목공(判中樞南陽君忠穆公) 휘 진도(振道)가 가장 드러났는데, 부제학은 직언(直言) 때문에 혼란한 연산조(燕山朝)에서 화(禍)가 무덤[泉壤]에 미침을 만났고, 정효공(貞孝公)은 청백리에 기록되고 효(孝)로서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으며, 충목공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책훈(策勳)되었다. 나주공(羅州公 담헌의 아버지)의 부인은 청풍 김씨(淸風金氏) 군수(郡守) 방(枋)의딸이니, 지금 나이 77세로 아직 살아 계신다. 덕보는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 1남을 낳았으니, 아들은 원(薳)이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는 그 사위이다.

    덕보는 영종 신해년에 낳았으니, 죽을 때 나이는 53세였다. 관직으로는 내직에 감역(監役)과 돈녕부 참봉(敦寧府叅奉),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그리고 간혹 수리 낭청(修理郞廳)에 차출되었으며, 외직으로 태인 현감(泰仁縣監)ㆍ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그 묘소는 서쪽 둔덕인 구미(龜尾) 벌에 있다. 아들 원(薳)이 묘 앞에비석을 세우려 하기에 내가 이 글을 써서 주어 비석 뒷면에 새기 게 한다. 덕보가 별세한 그 이듬해인 갑진년 10월 6일에 옛 벗인 서림(西林) 이송(李淞)이 적음.

    인보(寅普)가 난곡(蘭谷) 이장(李丈) 댁에 가서 이월암 참봉집(李月巖叅奉集)을 보니, 권말에 서림(西林) 이송(李淞)이 월암을 곡(哭)한 제문이 붙어 있다. 그 제문의 문사(文辭) 가 심히 고상하였고 그 아래에는 대연(岱淵) 이면백(李勉伯 호)의 기록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참봉군(叅奉君)이 본래는 서림을 알지 못했는데 나자회(羅子晦 이름은 열(烈))가 정릉 (貞陵)의 영(令)이 되어 참봉군을 초청하매 참봉군이 그 직소(直所)에 이르렀는데 이때 서림도 마침 와서 같이 잤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소식이 서로 끊겼고 참봉군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람들 또한 서림이 참봉군을 곡한 제문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승지(承旨)인 강인(姜 표암(豹庵)의 아들)이 일찍이 서림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참봉군에 대한 말이 나오니, 〈서림〉은 이 제문의 초를 내어 보였다. 강인이 빌어서 자기 집에 가져가려고 청하자, 서림이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그는마침내 암송하여 돌아가서 기록하여 두었노라.”하였다.

     이것을 보면 서림의 사람됨은 독특한 지조로서 세속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자취를숨김에 힘썼으며, 남에게 알려짐을 부끄러워했었다는 것을 알겠으니, 그는 문장만 고상할 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년 겨울에 담헌서(湛軒書)를 발간할 것을 계획하고 담헌이엮어놓은 애오려제영(愛吾盧題詠)을 다른 사람에게 입수하매 거기에 서림의 시 두 편이있었으니, 마치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놀랍고 기뻤다. 담헌의 후손 영선(榮善)을 보고 경과를 말하고 또,

     “서림은 담헌의 지극한 벗인데 혹 집에 전해지는 다른 글이 없는가?”

    하고 물었더니, 영선이 말하기를, 

    “서림이 지은 담헌의 묘표(墓表)가 있다.”하였다.

     이 밖에 또 유람할 때 쓴 글이 없는가 하고 구해 보았더니, 김 상국(金相國 상국은 정승)이 모르겠다고 하였다. 서림의 글이 과연 이렇게도 귀한 것인가! 1개월 후에 영선이이 묘표의 글을 가지고 왔기에 인보(寅普)는 읽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 이 글이야말로 바로 소위 고문(古文)의 전아(典雅)한 것을 훌륭히 다한 글이다.”고 하였다. 연암(燕巖)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탕일(宕逸)하며 이(奇異)한데가 보이지마는 서림은 순실(醇實)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 때 담헌을 아는 면 같은 것이 서림이 더 깊은 것 같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뿐더러 그 홀로 아는 데 이르러서는 연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뿐이겠는가! 서림은 자신이 이미 당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또 세속에는 글을 아는 이가 드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 이름을 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 묘표는 다행히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그가 고심담사(苦心覃思)하여 유현하고오묘한 것을 끌어내어 놓은 것이 또 이루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일 터인데, 이것들이 이미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만 것인가! 혹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날리고 서리에 젖어 찢기고 좀먹고 쥐가 물고 가서 굴러다니다가 없어지고 만것인가! 서림은 세상에서 고매한 선비이니, 응당 사후의 영예(榮譽)에 대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관심은 없었지만 그의 화려한 유문(遺文)은 다만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정화(精華)를 이루었을 뿐만이 아닌데, 가려져 드러나지 않고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슬픈 일이로다!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서림의 시문(詩文)은 비록 이것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농암(農巖)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그 〈글의〉 의법(義法)이 근엄(謹嚴)하고 운용이 급박하거나 번거로움이 없으며, 또 음절이 잘 어울리고 문장이 문채로워 그 뛰어남이 다른 이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는 청(淸)나라의 선비인 왕중(汪中)과 손이양(孫詒讓)에 의사(擬似)함이 있다. 서림의 두 시와 묘표는 이제 다 담헌서 뒤에 부록으로 붙이되 그가 월암(月巖)을 곡한 제문은 담헌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제문에,

    “서림(西林) 이송(李淞)이 배를 타고 임단(臨湍)을 지나면서 칠탄(七灘) 이공(李公)의 묘가 강 언덕 위에 있는 것을 듣고 삼가 글을 가지고 고하노니, ‘서경(西京 여기서는 서한(西漢)을 말함)에 성한 기운이 모여 두 사마(司馬 사마천(司馬遷)과 사마상여(司馬相 如))가 났도다. 문장이 대대로 흥하여 자취를 답습하였도다. 좌해(左海 우리 나라)에 상서로운 기운이 엉겨 그대가 진정한 용(龍)이 되었도다. 성기(聲氣)의 상통할 이는 그 누구겠는가. 불러도 화합할 이 없으니 세풍(世風)이 삭막하도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난 것은 동문의 곁에서였도다. 청초한 모습은 이 진(晋)나라 선비에 허황된 말이 없었도다. 마음의 깨달음은 선종(禪宗) 같았고 행동의 규칙은 곧 문례(文禮)였도다. 붓과 종이를 의지하여 그 심오한 것을 끌어내매 빛나고 향기롭기그지없고, 신선의 의상(衣裳)같이아리따운 비단의 무늬로다. 거창하게 늘어놓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하물며 곱게 꾸밀까보냐. 부자가 양(量)이 많음을 자랑하여 곳집에 천백 가지의 물건을 쌓아 두더라도 실용에 아무 소용이 없으면 그 쌓임은 썩은 냄새만 날 것이다. 이런 것은 보물을 사고 파는 파사(波斯 페르샤)의 모임에 자리를 같이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손아귀에 들어갈 만한 작은 기 이한 옥은 이것이 상석에 오를 것이로다. 내 상자 속에 감추어 때때로 자기만이 완송(玩誦)하였도다. 명당(明堂)에 추천하지 아니하였으니 뉘 이를 알아 적절히 쓰겠느냐. 추강(秋江)에 배를 띄우니, 적벽이 곁에 있도다. 듣건대 초숙(草宿)의 고분(孤墳)이 그대의 무덤이라 하네. 간밤에 달을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를 곡하는 글을 지었노라. 손을 씻고 읽노니 신령께서는 부디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다오.”

    라 하였으니, 대개 이 글은 소위 ‘높고 높아서 마치 가을 구름이 아득히 높이 떠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마는 가까이 전근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격이라고 하겠다. 지금 담헌서를 발간함에 있어서 서림이 지은 담헌정려(湛軒亭盧)의 시와 묘표를 부록에싣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서림의 인품과 문장의 대강에 대해 술급(述及)하여 이것을 여기에 붙이고 또 아울러 남을 곡한 제문을 수록하여 서림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규례를 넘는 실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서림의 시문이 전해지는 것이 아주 적어서 사정이 부득이 하니 규례는 경우에 따라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더구나 이 담헌서에서림의 유편(遺篇)이 그 인연을 뻗쳐서 여기 에 전하게 되니, 이것은 두 선생이 평생 같이 놀던 즐거운 뜻을 생각함에 역시 그 혼백도 가상히 여겨 좋아할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림은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의 계출이요, 자(字)는 무백(茂伯)이다.”

    라고 한다. 정인보(鄭寅普)는 삼가 기록한다.

    杭州)의 학자인 엄성과는 서로 학덕(學德)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어려움을 질문하 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은 덕보의 재학(才學)을 높이 칭찬하여, 우리 나라 선비들을 만나면 반드시 담헌의 안부를 물었다. 내가 소시에는 덕보와 서로 알지 못했는데, 경인년(1770, 영조 46)에 풍악산(楓岳山)에서 만나 산과 바다를 주유(周遊)하면서 그와 침식 언담을 같이하며 서로 함께 지냈다. 돌이켜 보건대, 그는 본의 아니게 억지로 ‘예예’ 하는 일이 없고, 자기 의 뜻을 보이되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이로부터는 유람이 있을 때마다두 사람은 꼭 함께 다녔다. 갑오년(1774, 영조 50) 봄에 나와 함께 동으로 바다에 나갔 다가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에 이른 일이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붙고 저녁 달의 달빛이 물에 흐르는데 덕보가 거문고를 끌어당겨 몇 곡조 타니, 홀연히 서울에서 관리가 내려와 절간의 은을 두드리면서 덕보를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한다는 글을 내어놓았다. 그리하여 덕보는 그 이튿날 먼저 돌아갔으니, 그 후 10년간 내외관직을 역임하면서 나와 함께 전일과 같이 서로 종유(從遊)하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혹 만나 교산(郊山)에 모여 유련(留連)하면서 즐겁게 지내기도 하였다.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 중앙의 자그마한 관직은 다만 공문서의 지시 계획대로 하면 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마치 소나 양같은 것을 기 르고 회계나 맞도록 하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옛날에 孔子도 이런 일을 하였지만) 이런 것이 비록 성인(聖人)이 하던 일이라고는 하지마는 하기 에 어렵지 않고, 그리고 (외직으로) 오직 주(州)와 현(縣)을 맡는 것은 내 뜻을행하여 볼 만한데 이것도 역시 상부의 관청과 지방의 토호들이 방해하고 막아서 뜻을 펴볼 수 없으니, 혼자 애쓰면서 조심히 열쇠나 잘 보관하고 법률이나 지킬 따름이다. 그리고 나의 성품은 각색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또 곁으로 위엄을 부려 몸가짐을무겁게 하는 일은 잘 되지 아니하며, 오직 공평하고 청렴한 것으로 위엄을 낳게 하여이치(弛置)해 버리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사적(仕績)이다.”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내가 덕보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또 산사(山寺)에 같이 가기 를 약속하였는데, 그 후 10일도 못 되어 덕보는 병 없이 졸지에 별세하였다. 아! 슬프다. 덕보가 일찍이 나와 더불어 담론한 것과 그가 간직했던 마음, 그리고 그 소행 등을 다 진술할 수는 없으나 그 학문이 오로지 평실(平實)을 숭상하고 과월(過越)하고 교격(矯激)한것이 없으며, 세속 선비들이 이론만 숭상하고 실행 실용(實行實用)을 전연 방치함에 대해 일찍부터 민탄(憫歎)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고금 인물들의 정사(正邪)ㆍ시비(是非)를 논함에 그 억양 취사(抑揚取捨)한 것은 전배(前輩)들의 정안(定案) 밖에 뛰어난것들이 많았다.

     그가 지닌 대심(大心)이야말로 공평하게 보고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는 아량이었으니, 대도(大道)에 돌아가 뾰족하고 작고 좁고 사사로운 것을 버리는 것은 진실로 지금 세상에 있어서 행하기어려운 일이며, 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이런 도(道)가 보급되었으면 한다. 덕보의 시조는 휘(諱)가 선행(先幸)이니 고려의 금오위 별장동정(金吾衛別將同正)이요,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는 부제학(副提學) 휘 형(泂)과 이조 판서(吏曹判書) 정효공(貞孝公) 휘 담(曇)과 판중추 남양군 충목공(判中樞南陽君忠穆公) 휘 진도(振道)가 가장 드러났는데, 부제학은 직언(直言) 때문에 혼란한 연산조(燕山朝)에서 화(禍)가 무덤[泉壤]에 미침을 만났고, 정효공(貞孝公)은 청백리에 기록되고 효(孝)로서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으며, 충목공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책훈(策勳)되었다. 나주공 (羅州公 담헌의 아버지)의 부인은 청풍 김씨(淸風金氏) 군수(郡守) 방(枋)의 딸이니, 지금 나이 77세로 아직 살아 계신다. 덕보는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 1남을 낳았으니, 아들은 원(薳)이요, 조우철(趙宇喆)ㆍ민치겸(閔致謙)ㆍ유춘주(兪春柱)는 그 사위이다.

     덕보는 영종 신해년에 낳았으니, 죽을 때 나이는 53세였다. 관직으로는 내직에 감역(監役)과 돈녕부 참봉(敦寧府叅奉),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그리고 간혹 수리 낭청(修理郞廳)에 차출되었으며, 외직으로 태인 현감(泰仁縣監)ㆍ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그 묘소는 서쪽 둔덕인 구미(龜尾) 벌에 있다. 아들 원(薳)이 묘 앞에비석을 세우려 하기에 내가 이 글을 써서 주어 비석 뒷면에 새기 게 한다. 덕보가 별세한 그 이듬해인 갑진년 10월 6일에 옛 벗인 서림(西林) 이송(李淞)이 적음.

    인보(寅普)가 난곡(蘭谷) 이장(李丈) 댁에 가서 이월암 참봉집(李月巖叅奉集)을 보니, 권말에 서림(西林) 이송(李淞)이 월암을 곡(哭)한 제문이 붙어 있다. 그 제문의 문사(文辭) 가 심히 고상하였고 그 아래에는 대연(岱淵) 이면백(李勉伯 호)의 기록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참봉군(叅奉君)이 본래는 서림을 알지 못했는데 나자회(羅子晦 이름은 열(烈))가 정릉 (貞陵)의 영(令)이 되어 참봉군을 초청하매 참봉군이 그 직소(直所)에 이르렀는데 이때 서림도 마침 와서 같이 잤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소식이 서로 끊겼고 참봉군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람들 또한 서림이 참봉군을 곡한 제문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승지(承旨)인 강인(姜 표암(豹庵)의 아들)이 일찍이 서림을 방문하여 이것저것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참봉군에 대한 말이 나오니, 〈서림〉은 이 제문의 초를 내어 보였다. 강인이 빌어서 자기 집에 가져가려고 청하자, 서림이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그는마침내 암송하여 돌아가서 기록하여 두었노라.”

    하였다. 이것을 보면 서림의 사람됨은 독특한 지조로서 세속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자취를 숨김에 힘썼으며, 남에게 알려짐을 부끄러워했었다는 것을 알겠으니, 그는 문장만 고상할 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년 겨울에 담헌서(湛軒書)를 발간할 것을 계획하고담헌이 엮어놓은 애오려제영(愛吾盧題詠)을 다른 사람에게 입수하매 거기에 서림의 시 두 편이 있었으니, 마치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놀랍고 기뻤다. 담헌의 후손 영선(榮善) 을 보고 경과를 말하고 또,

    “서림은 담헌의 지극한 벗인데 혹 집에 전해지는 다른 글이 없는가?”

    하고 물었더니, 영선이 말하기를, 

    “서림이 지은 담헌의 묘표(墓表)가 있다.”

    하였다. 이 밖에 또 유람할 때 쓴 글이 없는가 하고 구해 보았더니, 김 상국(金相國 상국은 정승)이 모르겠다고 하였다. 서림의 글이 과연 이렇게도 귀한 것인가! 1개월 후에영선이 이 묘표의 글을 가지고 왔기에 인보(寅普)는 읽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아! 이 글이야말로 바로 소위 고문(古文)의 전아(典雅)한 것을 훌륭히 다한 글이다.”

    고 하였다. 연암(燕巖)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탕일(宕逸)하며 기이(奇異)한데가 보이지마는 서림은 순실(醇實)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 때 담헌을 아는 면 같은 것이 서림이 더 깊은 것 같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뿐더러 그 홀로 아는 데 이르러서는 연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뿐이겠는가! 서림은 자신이 이미 당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또 세속에는 글을 아는 이가 드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 이름을 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 묘표는 다행히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그가 고심담사(苦心覃思)하여 유현하고오묘한 것을 끌어내어 놓은 것이 또 이루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일 터인데, 이것들이 이미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만 것인가! 혹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날리고 서리에 젖어 찢기고 좀먹고 쥐가 물고 가서 굴러다니다가 없어지고 만것인가! 서림은 세상에서 고매한 선비이니, 응당 사후의 영예(榮譽)에 대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관심은 없었지만 그의 화려한 유문(遺文)은 다만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정화(精華)를 이루었을 뿐만이 아닌데, 가려져 드러나지 않고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슬픈 일이로다!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서림의 시문(詩文)은 비록 이것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농암(農巖)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그 〈글의〉 의법(義法)이 근엄(謹嚴)하고 운용이 급박하거나 번거로움이 없으며, 또 음절이 잘 어울리고 문장이 문채로워 그 뛰어남이 다른 이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는 청(淸)나라의 선비인 왕중(汪中)과 손이양(孫詒讓)에 의사(擬似)함이있다. 서림의 두 시와 묘표는 이제 다 담헌서 뒤에 부록으로 붙이되 그가 월암(月巖)을 곡한 제문은 담헌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제문에, 

    “서림(西林) 이송(李淞)이 배를 타고 임단(臨湍)을 지나면서 칠탄(七灘) 이공(李公)의 묘가 강 언덕 위에 있는 것을 듣고 삼가 글을 가지고 고하노니, ‘서경(西京 여기서는 서한(西漢)을 말함)에 성한 기운이 모여 두 사마(司馬 사마천(司馬遷)과 사마상여(司馬相 如))가 났도다. 문장이 대대로 흥하여 자취를 답습하였도다. 좌해(左海 우리 나라)에 상서로운 기운이 엉겨 그대가 진정한 용(龍)이 되었도다. 성기(聲氣)의 상통할 이는 그 누구겠는가. 불러도 화합할 이 없으니 세풍(世風)이 삭막하도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난 것은 동문의 곁에서였도다. 청초한 모습은 이 진(晋)나라 선비에 허황된 말이 없었도다. 마음의 깨달음은 선종(禪宗) 같았고 행동의 규칙은 곧 문례(文禮)였도다. 붓과 종이를 의지하여 그 심오한 것을 끌어내매 빛나고 향기롭기그지없고, 신선의 의상(衣裳)같이아리따운 비단의 무늬로다. 거창하게 늘어놓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하물며 곱게 꾸밀까보냐. 부자가 양(量)이 많음을 자랑하여 곳집에 천백 가지의 물건을 쌓아 두더라도 실용에 아무 소용이 없으면 그 쌓임은 썩은 냄새만 날 것이다. 이런 것은 보물을 사고 파는 파사(波斯 페르샤)의 모임에 자리를 같이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손아귀에 들어갈 만한 작은 기 이한 옥은 이것이 상석에 오를 것이로다. 내 상자 속에 감추어 때때로 자기만이 완송(玩誦)하였도다. 명당(明堂)에 추천하지 아니하였으니 뉘 이를 알아 적절히 쓰겠느냐. 추강(秋江)에 배를 띄우니, 적벽이 곁에 있도다. 듣건대 초숙(草宿)의 고분(孤墳)이 그대의 무덤이라 하네. 간밤에 달을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를 곡하는 글을 지었노라. 손을 씻고 읽노니 신령께서는 부디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다오.”

    라 하였으니, 대개 이 글은 소위 ‘높고 높아서 마치 가을 구름이 아득히 높이 떠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마는 가까이 전근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격이라고 하겠다. 지금 담헌서를 발간함에 있어서 서림이 지은 담헌정려(湛軒亭盧)의 시와 묘표를 부록에싣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서림의 인품과 문장의 대강에 대해 술급(述及)하여 이것을 여기에 붙이고 또 아울러 남을 곡한 제문을 수록하여 서림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규례를 넘는 실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서림의 시문이 전해지는 것이 아주 적어서 사정이 부득이 하니 규례는 경우에 따라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더구나 이 담헌서에서림의 유편(遺篇)이 그 인연을 뻗쳐서 여기 에 전하게 되니, 이것은 두 선생이 평생 같이 놀던 즐거운 뜻을 생각함에 역시 그 혼백도 가상히 여겨 좋아할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림은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의 계출이요, 자(字)는 무백(茂伯)이다.”라고 한다. 정인보(鄭寅普)는 삼가 기록하다




    湛軒洪德保墓表[李淞]

    洪德保. 諱大容. 號湛軒. 其先南陽人. 司諫院大司諫諱龍祚之孫. 羅州牧使諱櫟之子. 二世俱以才聞. 德保又師事渼湖先生金公元行. 同門士皆磨礪道義. 談說性命. 德保諸父兄弟. 治博士業. 亦有以文詞著名. 德保獨有志於古六藝之學. 象數名物. 音樂正變. 硏窮覃思. 妙契神解. 天文躔次. 日月來往. 象形制器. 占時測候. 不爽毫釐. 嘗隨季父參議公檍. 入燕都. 備 觀城池宮闕人物財貨. 其遇士民. 不煩象鞮. 與通言語. 與杭州學者嚴誠. 切劘質難. 中州士 尙稱德保才學. 値我國士. 必問湛軒安否. 余少與德保不相識. 歲庚寅. 相遇楓岳中. 周遊山 海間. 寢食言譚不相捨. 顧不强爲唯諾. 而觀其意無所忤. 自是凡有遊覽. 二人必偕. 甲午春. 與余東出海上. 至襄陽洛山寺. 海天相拍. 夕月流光. 德保援琴彈數調. 忽有京曹隷. 扣禪扉致除書. 以德保爲繕工監監役. 明日德保先歸. 十年間踐歷內外官. 不得與余相從遊如前日. 然時或邀會郊山. 留連歡暢. 嘗謂余曰. 京司小官. 只有公書期會. 如牛羊長會計當. 雖聖人 事. 不難及. 惟州縣若可行己志. 而亦上下妨格. 無所措施. 所自勉. 謹管鑰守法律而已. 性不 喜刻核. 又不能莊嚴取重. 惟公廉生威. 不至弛置. 是則余仕績也. 去歲冬. 余過德保一宿. 又留約山寺. 未十日. 德保無病猝逝. 嗚呼德保. 所嘗與余譚論. 及其所存所行. 不可盡述. 然其爲學全尙平實. 絶無過越矯激. 其於世儒崇長言議. 全遺實行實用. 未嘗不憫歎. 論古今人邪正是非. 抑揚取捨. 多出前輩定案之外. 其大心所存. 公觀倂受. 同歸大道. 以祛夫尖小狹私. 斯固今世之所難行. 而顧其願則亦普矣. 德保始祖諱先幸. 高麗金吾衛別將同正. 入我朝. 副提學諱泂. 吏曹判書貞孝公諱曇. 判中樞南陽君忠穆公諱振道. 卽最顯. 副學以直道. 値燕山昏亂. 禍及泉壤. 貞孝錄淸白. 以孝旌閭. 忠穆策 仁祖靖社勳. 羅州公之配淸風金氏. 郡守枋女. 壽今七十七尙在堂. 德保娶韓山李弘重女. 生三女一子. 子薳. 趙宇喆閔致謙兪春柱. 其 婿也. 德保生於 英廟辛亥. 死時壽五十三. 所歷官. 內則監役, 敦寧府參奉, 翊衛司侍直, 通禮院引儀, 禮賓寺主簿, 司憲府監察, 儀賓府都事, 間差脩理郞廳. 外爲泰仁縣監, 榮川郡守.其葬在西原龜尾坪. 薳方樹石墓前. 余書此貽之. 俾鐫其背. 德保沒之明年甲辰十月六日. 故友西林李淞. 識.

    附 後記[鄭寅普]

    寅普往於蘭谷李丈家. 見李月巖參奉集. 卷末附寫李西林淞. 哭月巖文. 其辭甚高. 而下有岱 淵識語云. 參奉君. 素不識西林. 羅子晦 烈 之令 貞陵. 邀君至直所. 西林亦來會共宿. 後復落落. 及君下世. 人亦未聞西林有祭君文. 姜承旨 豹庵子 嘗造西林. 談次偶及君. 因出示是 草. 姜請借至其家. 西林不肯. 姜遂暗誦. 歸而錄之. 視此則知西林爲人. 孤介絶俗. 務自晦而 耻見知. 不惟文之高也. 去年冬. 方謀刊湛軒書. 而從人得湛軒所編愛吾廬題詠. 則西林詩二篇在焉. 驚喜如遇巨琛. 見湛軒後孫榮善爲道之. 且問西林湛軒至友. 或有他文傳家者乎. 榮善言湛軒墓表. 有西林作. 而更求. 遊觀金相國爲之. 不知西林之文. 果若是其可貴歟. 後踰月. 榮善以此文至. 寅普讀而歎曰. 嗟乎此文. 乃所謂古文之能盡雅者. 方之燕巖所爲誌. 燕 巖以宕逸見奇. 而西林醇實淵懿. 芬芳自遠. 吾雖不敢遽論其誰不及而誰過. 然若以知湛軒. 則意西林或加深焉. 而西林之文. 又足以曲折以赴其所獨知. 則其於燕巖. 豈但頡頏之而已哉. 西林旣不屑當世名而流俗知文者鮮. 至於今無人能擧其名. 此表則幸不佚. 而其苦心覃思引撢 幽眇者. 又不知爲幾何. 則其已散亡無復存歟. 或尙遺在人間. 而輾轉於風霜蠧鼠. 亦行將盡歟. 西林高世之士. 宜其不置忻戚於身後之名. 然其菁英之遺. 非第爲一人一家之華. 而掩翳至此. 唏矣. 今寅普前後所見西林詩文. 雖止於此. 世有知者. 當知農巖以後四五名家. 西林 位置其間. 至其義法之謹而運以不迫. 不屑鍧燁而章采逈倫. 則又寡與爲比. 擬諸淸儒汪中孫詒讓似之. 西林二詩及表. 今皆附刊湛軒書之後. 而其哭月巖文. 於湛軒爲無與. 然其文曰. 西林李淞. 舟過臨湍. 聞七灘李公之墓. 寄在岸上. 謹操文以告曰. 西京盛萃. 司馬惟二. 作者代興. 方躅幷軌. 左海凝祥. 子眞一龍. 聲氣之感. 俾誰雲從. 唱而無和. 世風攸索. 我始一覿. 東門之側. 淸是晉士. 而無誕詭. 悟類禪宗. 用則文禮. 迺憑毫楮. 迺抽厥蘊. 天葩淨香. 仙綃淡紋. 不屑爲鉅. 矧以爲姸. 彼以其富. 有廩百千. 無匱于用. 載列葷羶. 波斯之會. 未許躡席. 奇璧在握. 方是上客. 藏我箱篋. 時自玩誦. 不薦明堂. 誰云適用. 秋江理艇. 赤壁在傍. 草宿孤墳. 聞子攸藏. 前宵對月. 和淚成章. 盥水一讀. 神庶我聽. 殆所謂標然如秋雲之逈. 可望而 不可卽者夫. 方且刊湛軒之書. 而附以西林所爲湛軒亭廬之詠墓阡之表則固也. 今乃述及於西林人品文章之槪以附之. 又且幷錄其哭人之文. 以圖傳西林. 疑若失之踰例. 然西林詩文傳者寥寥. 事有不容於已. 則例有時而變. 抑此湛軒之書. 而西林之遺篇. 延緣而傳. 念其生平游處之歡. 意亦兩先生魂魄所嘉與也. 或曰. 西林系出永膺大君琰. 其字曰茂伯. 鄭寅普. 謹記.


    『湛軒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