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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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록(金剛錄)』 수몽(守夢) 정엽(鄭曄)
나는 작년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물러날 것을 진정했는데 성은으로 허락하시어 무산(巫山)이 있는 양양의 수령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다행한 것이 세 가지다.
첫째는 팔십 노모를 고을을 다스리며 봉양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는 같은 시기 에벗들이 모두 화를 입었지만, 나만이 아름다운 곳을 유람하며 세상과 멀리 있는 것이다.
셋째는 금강산을 구경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늙은 나이에 오랜 소원을 풀게 되었다.
그러나 부임한 이후 공무와 개인적인 근심으로 몸을 빼내어 유람길에 오르지 못하고 반년이 지났다. 그런데 나씨(羅氏)와 이씨(李氏)두사위가 서울에서 나를 보려고 온 김에, 금강산을 향해 산행 준비를 서둘렀다.나는 몸이 약하고 게으르다. 그러나 굳게 마음 먹고 일을 시작하였다.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니 말 타는 어려움과 길이 멀다는 사실도 모르겠다.곧 나를 일으키는 것을 헤아릴 수가 있다.
정오에 낙산사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대포 만호(大浦萬戶) 이준(李濬)이 뵈려고 찾아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저녁 무렵에 청초와 영량 두 호수를 지나,청간정에 들어가 유숙하였다.이곳 수령인 영공(令公) 조훤(趙暄)이 좌수 최덕립(崔德立)을 보내어 일행을 접대하였다. 이날이 무오년(1618년, 광해군10)윤4월초하루 기미일이다. 나씨의 이름은 만갑(萬甲)이고 이씨의 이름은 상질(尙質)이다.손자 원(援)과 낙산사 주지승 원우(元祐)도 따라왔다.그 외는 천인(賤人)이라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4월 초2일. 아침을 먹고10리를 갔다.산의 한 자락이 물 가운데 들어가 있으므로 능허대라고 부른다.그 앞에는 돌이 겹쳐 있어 마치 작은 섬과 같다.나씨와 이씨 두 사위가 가서 살펴보았다. 10리쯤 되는 작은 호수다. 둘레는5리쯤 되고 푸른 산이 3면을 둘러쌌다.
동쪽은 호수 너머에 모래 언덕이 있다.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었고,그 사이로 사람들이 오갔다.가마에서 내려 두 사위와 함께 수십 보를 들어갔다.산록이 마루처럼 평평하여 십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흰 모래와 소나무 그늘,그리고 안개는 한 점 티끌도 없었다.그 아래 암석도 특별하였다.오랫동안 소요하다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올 때는 마치 정인을 이별하는 듯했다.이곳이 세상에서 말하는 신선이 노닐던 연못이니, 이름을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군으로 들어갔다.수령이 나와 맞이하였는데 대접이 매우 후했다.점심을 먹고 작은 누각에 올랐다. 앞에는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는 오동나무가 있는데 푸른 잎이 그늘을 만들었다.이는 사문(斯文) 최립(崔岦)이 이 고을을 다스릴 때 직접 심은 것이라고 고을 사람들이 서로 전한다.최립은 으뜸가는 문장가다. 그런데 여기 서벼슬살이를 하면서 왜 벽에 남겨 보물로 전하는 것이 없을까?
성의 서문으로 나가니 바람이 불었다.모래 먼지가 눈을 가려 눈을 뜰 수가 없다. 거류천에 이르러 사잇길을 택해 화진으로 들어갔다. 호수가 언덕과 골짜기를 걸쳐 있어서 물이 넘실거렸다. 일대의 송림이 바다 입구를 가리었다.몇 천 그루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 여기에는 고을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용에 의해 쓸려 가라앉아 연못이 되었다’고 한다.날이 개이고 물결이 잠잠하면 지금도 담장과 집을 볼수 있다고 하니 괴이한 이야기다.
쓸쓸히 두세 집이 호숫가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 창백한 안색에 백발인자가 스스로 자기이름을 이전(李荃)이라 했다. 나이를 물으니 79세라고 했다. 눈과 귀가 밝고 정력이 조금도 쇠하질 않았으니 이것이 '사는 장소가 사람의 기운을 바꾼다'는 것인가? 석양이 명멸하는데 가랑비가 옷을 적셨다. 술잔을 잡고 시를 읊으며 한참 후에 파하였다.
저녁 때 비를 무릅쓰고 말을 달려 열산으로 들어갔다. 옛 관사가 황량하고 판액 위에는 오직 신점(申點)공 이 남긴 시만이 남아 있었다.이 땅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고 계곡과 산이 만나는 곳이라 백성들이 조금 많았다.
내가 두 사위에게 말하기를,
“가득한 물결만 아니라면 이곳에서 살 만하겠다.”
라고 하였다.
나 서방이 말하기를,
“세상과 격리되어 정치의 득실이 들리지 않는 곳이니 은둔하려는 자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돌아가며 한참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지자 잠들었다.승려 원우가 청원향을 태우며 잠자지 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4월 초3일. 아침을 먹고 모래톱을 걸어갔다.왕왕 굽이진 곳이 메마른 연못을 이루었다. 모래 언덕을 따라서 촌락이 있는데,모두 생선 가게[漁店]이다. 산자락이 달려 바다로 들어가고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울창하다. 무송대(茂松臺)나 송도(松島) 등은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비록 두 사위가 좋은 경치를 두루 구경했다고 하지만 모두 올라갈 수는 없다. 아침을 먹고 명파역으로 들어갔다. 풀을 이어서 집을 만들었는데 겨우 한 칸쯤 되었다. 잠깐 말을 쉬었다가 대강역으로 들어갔다. 골짜기 가 그윽하고 깊었다. 역인으로서 울타리를 마주하고 사는 집이10여호쯤 되었다.
양양의 무인 강효선(姜孝先)이 북도(北道)에서 돌아왔는데 오성(熬城)의 답서를 소매에 넣고 와서 보여주었다. 펼쳐보니 그 노인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올라 이별한 마음을 위로할 만하였다. 이 노인은 재상의 위치에서 수십 년을 부침하였다. 계축년 사변에 탄핵을 입고 교외에서 한가롭게 살았다. 작년 겨울 대비의 폐출을 의논하게 되자 당당하게 순 임금을 인용하여 상소하였다가 삼사에서 역적을 두둔하였다고 논하여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
밥을 먹고 말을 타고 대령을 넘었다. 돌길이 가파르고 바위가 기울어져 있었다. 고개 밑에는 작은 촌락이 있는데, 쇠 녹이는 것이 직업이었다. 그리고 땅이 비옥하였다. 다시 고개를 넘어 큰 내를 건너면 백천교의 하류다. 흰 자갈과 맑은 물은 이것이 금강산의 기맥임을 말한다. 산이 연이어 펼쳐져 사방이 막히고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었다. 이것이 소위 숙고촌이다. 금강산의 승려들이 마을에서 양식을 얻어 이곳에 쌓아 저장하였다가 찧은 다음 절로 옮기 니 대개 금강산 여러 절의 근본이 되는 땅이다. 두세 명의 승려가 지키는데 계곡물로 맷돌을 삼아 낮과 밤으로 찧으니 사람의 힘은 조금도 들이지않는다. 이것을 만든 자는 교묘한 지혜를 썼다고 할 수가 있다.
저녁에는 두 사위와 함께 시냇가를 걸었다. 산수를 논하여 말하기를,
“이 땅이 열산(烈山)이나대강(大康)과비교하여 가장 빼어나다. 만약 근기지 방에서 이와 같은 곳을 얻을 수 있다면, 여생을 보내는데 근심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위가 말하기를,
“저희들이 본 기록에 의하면 서울 주변 수백 리에 과연 이와 같은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봉두(鳳頭) [곧, 선생의 여주강(驪州江) 집의 이름이다.] 같은 곳은 강산의 경치가 뛰어나니 이곳을 버리고서 어디서 은거지를 찾겠습니까? 빙부의 연세가 퇴직하여 휴식할 때니,시기 를놓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으니,이 말이 족히 나태함을 굳게 할 만했다.저녁은 선방을 빌려서 유숙하였다.
4월 초4일. 골짜기로 점점 깊이 들어갔다. 나무 그늘이 매우 깊어 해를 볼 수 없었다. 다만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만 들렸다. 10여 리를 가니 갑자기 커다란 전각이 물 위에 가로놓여 있어, 사람들이 그 사이로 왕래하였다. 말을 내려서 걸어갔다. 기둥에 기 대어 앉으니 계곡 물이 소나무 골짜기에서 급히 흘러 내려 연못을 이루었다. 전각 아래는 깊이가 두세 길[丈]정도였다. 투명하여 그 밑바닥이 훤히 보였다. 노니는 물고기 백여 마리가 모두 각기허공을 돌아다녀 깃들일 곳이 없는 듯하니 낱낱이 셀 수가 있다. 좌우의 흰돌들이 가지런히 늘어섰고, 산빛 물색이 깊고 넓어 훌륭하니 내 몸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중 수십 명이 와서 맞이하였다.모두 푸른 눈에 야윈 얼굴은 세속과 다른 모습이다.
여기부터는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 옷과 식량을 나누어 하인들에게 분담시키고 두 사위와 손자 원은 각기 남여를 타고 갔다. 수석이 빼어나고 수목이 빽빽한 것은 전체가 모두 그러했다. 절벽을 따라 니대와 중대, 그리고 병상대를 둘러보았다. 눈 아래 큰 바다는 넓고 끝이 없어서 여러 산은 모두 낮은 언덕일 뿐이다. 바다 동쪽 기슭에 푸르고 망망한 것이 하늘인지, 물인지, 구름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밖에 특별한 세계가 있는 것인가? 낮 무렵 가랑비가 갑자기 뿌리기시작하 더니 개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였다. 산신령이 장난삼아 우리들의 옷에 가득한 속세의 티끌을 씻으려는 것인가?
가마를 맨 중이 땀을 비가 오듯 흘리니 반드시 내 비대함에 괴로워할 것이다. 스스로는 편안하지만 남을 수고롭게 하니 사실은 내 마음이 불편하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니 바위 골짜기는 갈수록 기이하였다. 감탕나무, 측백나무, 노송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녹나무가 우거져 바람에 흔들리고 목련과 철쭉은 꽃이 바야흐로 난만하여 향기 가 그사이에 섞여든다. 시냇물은 구불구불 굽이치고 흐르면서 거세고 높은 소리가 마치 종과 경쇠를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는 듯했다. 산에 가득한 소리와 빛은 사람을 매우 즐겁게 한다. 그래서 귀와 눈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낭떠러지 때문에 간혹 길이 끊기는데, 몇 그루의 나무를 바위에 걸쳐놓고 겨우 사람이 지나간다. 빗속에 도롱이를 입고 가마에서 내려 어렵게 걸었다. 만약 이공린이 이 모습을 그린다면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골짜기 입구에서 바라보니 붉은 기 와와 서까래가 온 골짜기를 찬란하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유점사다. 골짜기를 건너 산영루에 올랐다. 물은콸콸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흐르고 산세가 사면으로 둘러쌌다. 구름과 안개가 퍼지고 걷히는데 이를 대하니 유유히 속세와 멀어지는 듯했다.나는 운취당에서 묵었다. 온돌에 앉으니 매우 따뜻하였고, 창문을 열었더니 상쾌하였다. 고목 노송나무 수십 그루가 근엄하게 계단 아래 서 있다. 그런데 마치 서로 기대고 있는 듯하였다. 뜰은 매우 넓고 앞이 탁트였다.
주지가 소찬(素饌)을 준비해 왔다. 나에게 대접한 것이 모두 귀한 것이다. '소(韶) 듣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고기맛을 잊을 만했다.' 잠시 쉬었다가 법당을 구경하였다. 금불은 걸상 위에 모셨으며 사방 벽의 단청이 화려했다. 향나무로 천축산을 만들어 불상 뒤에 두었고 당 위는 비단 자리로 덮었는데 찬란함이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좌우 전후 겹친 회량과 겹복도에 칸 사이가 많은 것이나 얽어 지은 솜씨의 공교로움이 여러 절 중에서 제일이었다. 이번 7일을 택해서 장차 무차회를 열어 낙성할 예정이다. 승려와 속인들이 원근에서 몰려와 매우 번잡하여 문을 메우고 집이 넘쳤다.
이 절은 신라 시대에 창건하여 지금은1천년이 되었다.세조 때 화재로 중건하였고, 만력 을미년에 불이 났으며,갑인년에 또 불이 났다.하늘이 여러 번 재앙을 내린 것은 또한 그 사이에 뜻이 있을 것이다. 어찌 오래도록 숭봉하며 그치지 않는가? 지금 다시 중건하니 비용은 모두 왕실에서 나갔다. 부도를 새우는 데는 숙고촌의 돌을 캐서 계곡의 가파른 고개 40리를 넘었다. 귀신이 운반한 듯하니 이 일을 이루는데 많은 재물을 허비했을 것이다. 국가가 하늘에 오래도록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을까?
저녁을 먹고 명적암에 올랐다.암자의 중은 응상(應祥)이다.휴정 선사에게 배워서 경문의 뜻에 해박하며, 석가모니 후의 전법을 말하는데 매우 상세하다. 함께 심성에 대해 논의했더니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 깨닫게 하는 것이 있었다. 저물녁에 운취당으로 돌아왔다. 노승 법견(法堅)이 운수암에서 내려오고 응상도 내려와서 알현하였다. 함께 이야기하는 사이에 밤이 깊었다.
내가 말하기를,
“낳고 또 낳아서 끝이 없는 것이 ‘이(理)’다. 이미 가버린 기를(氣) 돌이켜서 다시 앞으로 오는 기 가되게 할 수는 없다.나뭇잎이 시드는 것에 비유하자면,땅에 떨어져 썩어 없어질 뿐이지 이 잎은 다시 생기 를 가질 수가 없다. 윤회설은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인가?”
라고 하니, 법견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 혼백은 없어지지만 그 본성은 스스로 존재하여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사람이나 동물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와 기를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일 뿐이니 섞어서 말할 수 없다. 사람과 동물을 말한다면 기 가운데 이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어찌 기를 떠나 홀로 존재하는 이가 있겠는가?만약 사람과 동물이 비록 죽어 없어지지만 그 성(性)은 스스로 불멸한다고 하면, 성을 떠나고 이를 떠나 불사불멸하여 환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 따로 있을 것이니 이것이 무슨 성인가? 이것이 마땅히 이를 아는 자들에게 웃음꺼리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유가와 불가의 존심법(存心法)이 가장 비슷하다. 일이 없을 때는 이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한 가지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물과 접촉해서는 이를 따라 순응하기 때문에 각기 그 마땅함을 얻는다.이것이 우리 유가의 오묘한 요체다.가만히 앉아 생각을 멈추는 것인즉 그대들의 도와 비슷하다. 그러나 사물과 접촉을 끊고 쓰지 않으면 마침내는 오상(五常)의 도리를 없애는 데 이르니 여기에서 옳고 그름이 구별된다.”
라고 하였다.
법견이 말하기를,
“우리 불가의 법도 득도를 하면 널리 대중을 구원할 뿐입니다.어찌 사물을 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처음에는 마음이 평정되지 않아 사물에 얽매여 그 마음의 맑음을 보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물을 버리는 것이니,이것이 소위 반조회광법(反照回光法)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마땅히 비출 뿐이지 왜 반조하는가?그 빛이 스스로 밝은데 왜 회광하는가? 비유하자면 맑은 거울은 사물이 오면 스스로 응할 뿐인 것과 같으니 거울을 돌려서 비추기를 구하는 것,이것이 우리에게 배척받는 점이다."
라고 하였다. 유가와 불가의 같고 다름을 서로 이야기하니 속인과 함께 한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도리어 좋았다.
절 이름에 느릅나무[楡]를 넣어 지은 것은 석가가 열반하자 석가를 좆는 무리들이 석가의 상을 주조하여 종 안에 담아 바다에 띄웠는데 그것이 떠다니며 여러 나라를 두루거쳐서 고성군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때가 신라 남해왕 원년이다.군수 노춘이 듣고 말을 달려 그 곳에 갔다. 그러나 그 자취만이 완연히 진흙에 찍혀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종을 찾아 고개를 넘어 골짜기 어귀에 들어서자 소나무숲 가운데 느릅나무 한 그루가 있고 종이 그 가지에 걸려 있었다. 드디어 그 일을 왕께 아뢰니 왕은 놀라고 이상히 여기어 행차하여 곧 그 땅에 절을 창건하고 느릅나무가 있는 것으로 그 이름을 지었다.
또 그 땅에는 본래 샘이 없었는데 하루는 까마귀 떼가 모여 와서 땅을 쪼더니, 신비한 샘이 홀연 흘러넘쳤다. 지금의 오훼정이 그것이다. 게방, 문수촌, 니유암, 구령, 노춘정, 장항, 환희령 등은 노춘이 종을 뒤따라서 온 곳의 명칭이다.혹은 종을 보고 쉬었던곳, 혹은 문수보살이 비구의 몸으로 화하거나 혹은 중으로 화하여 종이 간 곳을 가르쳐준 곳, 혹은 노춘이 갈증이 심하여 땅을 파 샘을 얻은 곳, 혹은 개가 나오고 혹은 노루가 나와 노춘을 이끌어간 곳, 혹은 노춘이 피곤하여 잠시 쉬었는데,종소리를 듣고 기뻐 뛰며 다시 나아간 곳 등 각각의 사건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법희거사(法喜居士)가 모두 상세하게 말해주였지만 너무 황당하고 괴상하여 군자로서는 말할 바가 못된다.
4월 초5일. 절을 나오면 몇 리쯤에 돌을 다듬어 부도 모양을 만든 것이 있다. 물어보니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 자휴(自休)의 사리를 안치했다고 한다. 휴정은 한낱 중일 뿐이다. 그런데 도로써 한 세기를 날렸고, 선문의 종사(宗師)와 고승들이 그 문도에서 나와 의발을 전수하였다. 유학자로 행세하지만 행함에 힘쓰지 않아 종신토록 소득 없이 초목과 함께 썩는 자와 비교하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선연(船淵)을보니배같이 생긴 돌이 있는데 계곡물이 마치 흰 무지개같이 흘러와서 이 돌에서 물이 깊이 고이는데,맑고 깊어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는 물이 멈추어 좀 평평하고 얕아진다. 이와 같은 것이 여러 층이 있다. 소위 '구덩이에 찬 뒤에야 흐른다'는 것인가?
물을 건너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 조계암이다. 집이 깨끗하고 뜰이 넓은데 늙은 승려 두셋이 기거하고 있었다.암자 오른쪽에도 시냇물이 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위쪽은 위험한 비탈이고 아래는 견성암인데 역시 작은 암자다.
잠시 쉬었다가 대령을 넘었다. 땅 기운이 높게 뻗쳐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산중턱의 좁은 길은 올라갈 수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어갔다. 불정대에 도착하니 낭떠러지가 골짜기 와 연결되었다. 바위돌이 갑자기 솟아 낭떠러지 앞 공중에 걸리었고 그 사이는 겨우 몇 발자국이었다. 나무를 걸쳐서 사람이 건너갔다.그 아래는 몇 천 길(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위가 손바닥 모양과 비슷했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땅을 내려다보니 아득하여 마치 구천에 올라 하계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북쪽에는 구정봉이 있다.우뚝 서서 하늘에 가까웠다.봉우리 아래로는 만 길이나 되는 절벽인데, 절벽 사이로 띠를 늘어뜨린 듯한 것이 십이폭포다. 곁에 두어 채의 암자가 있으니 백전과 적멸이다. 그 아래에는 송림굴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원통암이 있다. 나씨와 이시 두 사위는 위태한 잔도를 마치 평평한 길을 걷듯이 하였다.
바위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자,내가 손자 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귀한 집 자식은 마루 아래에도 내려가지 않는다. 구경하는데 심취해 몸을 잊고 헤아릴 수 없는 위험한 곳에 가면 효자가 할 일이 아니다. 두 사위는 따라가지 말라.”라고 하였다.
나는 절벽에 앉아 있어도 오히려 무섭고 경황이 없어서 돌아오라고 하였다. 걷기도하고 가마를 타고서 숲을 헤치고 나가 영은암으로 향하였다. 산길이 경사진 것이나 수목으로 뒤덮인 것, 언덕과 절벽이 높고 험한 것 등이 견성암을 오르는 길보다 더욱 어려웠다. 가마를 탔어도 오히려 피곤하여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가마꾼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잠깐 상영대에서 쉬고 영은암에 도착하여 쓰러져 누웠다. 두 사위를 보니 또 만경대에 오른다. 나는 한걸음도 갈 수가 없으니, 나의 쇠약함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청년 때의 기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유점사에서 불정대까지는 15리고, 불정대에서 영은암까지는 거의 20리다. 영은암은 오히려 유점사에 가깝다. 다만 지대가 우뚝한 절벽이어서 산영루를 굽어본다.
저녁을 먹고 원우가 나를 이끌며 서대로 올라갔다. 암석은 앉을 수가 있었다. 만경대의 우뚝한 봉우리는 그 뾰죽한 것이 마치 쇠를 깎은 듯하고 백마와 향로봉 등의 봉우리는 병풍처럼 둘러섰다. 조그만 개미굴 같기 도 하고 동굴 같기 도 한 여러 산들은 빽빽하게 모이고 차곡차곡 쌓여서 비단으로 묶어놓은 듯하다. 시야에서 도망쳐 숨을 수가 없다. 큰 시냇물이 상완동에서부터 땅을 가르며 흐른다. 항연과 산영루 앞의 물이 바로 그 줄기다. 절벽과 계곡 사이에 있는 암자와 굴은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그 가운데 운수암이 제일 넓다. 이곳은 법견이 거처하는 곳이다. 영은암도 아름답고 큰데 붉고 푸른 단청이 기풍에서 빛난다. 유점사 주지승이 좆아와서 나와 함께 묵었다. 그 정이 매우 너그럽고 후하다. 민행(敏行)은 그의 이름이다.
4월 초6일. 가마를 멜 중들이 유점사에 모이자 곧 떠났다. 오늘 내려가는 언덕은 어제 올라온 곳이다.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보다 쉽다고 한다. 그러나 위험하고 두렵기는 똑같다. 내산으로 향하니 숲 사이 한 가닥 산길이 있었다. 거친 돌과 기우뚱한 절벽, 깊은 구덩이였다. 조심히 걸어서 내수점에 도착하였다. 땅이 조금 넓은 것은 사신들의 휴식처이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잠깐 쉬었다. 석산이 사방에 둘러 있고 길이 북쪽 고개마루쪽에 길이 있다. 고개 세 개가 중첩되었는데 모두 물로 이름을 지었다.
제3령에 도착하니 장안사 승도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그 수가 적어서 부득이 유점사 승려에게 가마를 메게 했더니 매우 괴롭게 여겼다. 을사년의 물난리로 언덕과 골짜기가 변하고 돌이 굴러내렸으며 절벽이 무너져 옛 길을 메워버렸다. 발도 디딜 수 없는데 어떻게 가마를 타겠는가? 오래 걸으니 다리가 무겁고 발이 부르텄다. 위험을 무릅쓰고 가마를 탔다. 앞에서 옹호하고 뒤에서 끌며, 좌우에서 부축하였다. 넘어져 떨어짐을 면하니 '위험한 데 나아갔지만 요행이 면했다'고 하겠다.
산수를 감상하는 것은 잠시 동안의 눈요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눈요기를 위하여 한 몸을 위태롭게 하니 이것은 '손가락 하나를 보양하면서도 어깨와 등을 잊어버리고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와 가깝지 않은가? 쇠약한 늙은이의 이번 행차를 깊이 후회하였다. 골짜기를 절반도 내려가지 않고 왔던 길을 돌아보니 이 몸이 황홀히 하늘에서 내려온 듯했다. 작은 폭포가 시냇물을 이루니 성담이라고 부른다. 흰 돌이 그 밑바닥에 깔렸다. 앉아서 구경하니 매우 볼 만했다. 눈을 즐겁게 하다가 몸이 위태하게 된 것을 후회하면서 오히려 이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산수도 음란한 음악이나 예쁜 여자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점점 그 가운데 빠져들고 돌아올 줄 모르게 한다. 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요산요수’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낭떠러지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아직도 엉겨 있다. 그러나 두견화가 피기시작하고 적목덩굴의 향기 가 산을 뒤덮으며 돌 위로 이어졌다. 우거진 푸른 풀들이 길게 늘어져 어지럽게 감기고 얽혀서 산길을 덮었다. 사람이 밟는 것이 모두 이상한 풀과 꽃이다.
맑은 바람이 살짝 불면 어지러운 향내가 풀 위에 진동하여 향내가 물씬하다. 옥과 은으로 만든 것 같은 봉우리를 바라보면 신선이 늘어선 듯 높이 치솟은 것은 비로봉과 일출봉, 월출봉이다. 만약 비로봉의 정상에 올라간다면 고개와 물줄기 및 흩어진 만 가지다른 모습들을 모두 하나로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니, 공자가 천하를 좁다고 한 뜻과 천년을 격했어도 서로 들어맞을 것이다.
내 남은 힘을 무리할 수 없어 그곳을 오르고 넘을 수 없음을 돌아보았다. 우두커니 서서 주저하며 슬프게 바라볼 뿐이고, 개탄할 뿐이다. 이것이 소위 바라볼수록 더욱 높고 우뚝해서 미칠 수 없다는 것인가?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자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인가? 오래오래 계속 쌓아서 낮은 곳으로부터 올라가면 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이 바쁘니 또한 어찌 할 수가 없다. 이생에서는 제1층의 경계를 볼 수 없을 것인가?
시냇물 가까이 암자가 있는데 붉은 칠을 한 건물이 고요하며 인적이 없고 단지 불상만 있으니 이것이 곧 묘길상이다. 들어가 점심을 먹고 떠났다. 돌이 더욱 희고 물이 더욱 맑았다. 약사봉 아래 큰 바위에 불상을 조각했는데 그 형상이 매우 웅장하다. 이것은 나옹이 조성한 것이다. 두세 리쯤에서 작은 시냇물을 따라 들어가니 불지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백운봉 아래다. 앞을 보니 폭포가 혈동봉에서 날아오고 봉우리 사이에 작은 굴이 있다. 그런데 겉과 안이 뚫려서 통해 있다.
마하연에 이르니 불지암과의 거리가 또한 두세 리가 된다. 지세가 다른 암자보다 넓고 평평하다. 중향성이 그 뒤편에 솟아 있고 도솔과 담무갈이 그 앞에 늘어섰다. 그 오른쪽에 우뚝 솟아 골짜기 입구에 병풍처럼 막아선 것이 대소 향로봉이다. 가지와 잎이 정원에 녹음을 이룬 것은 회나무와 잣나무다. 그 중 신기 한 나무가 있다. 몸통은 소나무이고 잎은 측백나무와 비슷하지만 좀더 가늘다. 그곳에 거처하는 중에게 물으니 계수나무라고 했다. 잎과 껍질을 씹어 보니 계수나무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름이 그 실상과 어긋나는 것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그 잎은 가을이면 누렇게 떨어지고 봄이 되면 다시 푸르러진다고 한다. 오히려 송백이 세한에 절조가 있는 것과는 비길 수가 없다.
정원에 퇴락하고 무너진 작은 단이 있으니 그것은 곧 세조께서 행차하셨을 때 서 계셨던 곳이다. 유적을 어루만짐에 공경심이 일어나고 그 당시가 생각난다. 바른 도리로써 이 행차를 간하였다면 그 말이 임금의 총명함을 깨우쳤을 것이다. 그러나 바른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녹을 먹는 관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섬돌 아래에 작약 두어 떨기 와 마른연 이네 다섯 뿌리가 있다. 그런데 연잎 크기가 큰 (蓮) 소반만 하고 7월중에 흰 꽃이 피어나니 선계의 꽃이다. 회양 태수 영공 이숙명(李俶命)이 어사를 기다리느라고 표훈사에 머물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술을 마셨다. 승려 상현(尙玄)은 솔잎을 먹으며 홀로 이 암자에서4년을 거처하였다.불법 지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아침저녁으로 분향하고 경쇠를 두드리며 꿇어 엎드려 예불하였다. 늙은 나의 나태함을 자각하게 한다. 지금의 사대부들 중에 성심으로 도를 닦음이 이 승려만한 이가 없다. 이것을 기록하여 뜻을 같이하는 이에게 보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