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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정엽(2)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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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4월 초7일. 중들이 모이기를 기다려 가마를 타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반석인데 상 같은 것과 잔칫상 같은 것, 아랫목만한 것이 그 색은 눈과 같았다. 물이 그 위를 흘러 높은 것은 폭포가 되고 낮은 것은 연못이 되어 10층인데, 화룡담, 선담, 응벽담, 벽설담, 구담, 청유리담, 황유리담, 진주담, 청룡담, 흑룡담이 그것이다. 용과 유리는 그 색을 말하고선(船), 구(龜), 주(舟)는 그형상을 말한다. 그 층이 높은 것은 두어 길이요, 낮은 것은 육칠 척인데 진주담이 제일 높다. 물이 떨어져 그 물보라가 비행하는 것이 만섬의 구슬을 흩어놓은 듯하다.

     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시냇물을 건너서 앉았다. 산 중턱에 암자 하나가 있다. 바위에 선반을 걸쳐 지었다. 바위 밖으로 나온 난간과 기둥은 수십 길의 구리 기둥을 써서 허공 중에 지탱했다. 단청 칠한 것을 바라보니 신기루 같았다. 층층이 쌓인 돌길은 계단과 같았다. 절반도 오르지 못했는데, 힘이 모두 빠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나씨, 이씨 사위만이 손자 원과 함께 그 위에 올라갔다. 어지럽고 떨려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가다가 뒤에 가고,혹은 가다가 쉬었다.수석이 기이하고 절경인 곳을 만나면 문득 흔연히 돌을 털고 푸른 이끼 위에 앉았다. 그 시원한 형상과 물이 굽이치는 소리가 유연하여 빈 듯하며 깊숙하고 고요함이 이목을 상쾌하게 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천천히 걷다 보니 날이 이미 저문 것도 알지 못했다. 돌이 미끄러워서 넘어졌는데, 하인들의 부축에 의해 추락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나는 발을 싸매고 몸에 땀이 흘러도 고생스러운지를 알지 못하고, 넘어지고 배고프고 목말라도 그만두지 못하며, 미친 사람 같은지를 알 수가 없다.

     특별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팔방의 사람들이 천리 길에 식량을 싸들고 달려서 모여든다. 이름있는 지역의 거공(巨公), 위인(偉人), 호사(豪士)가지팡이를 짚고 신들매를 하고 피로함을 잊고서 고생을 참지 않는다. 오로지 깊은 절경에 이르지 못 함을 두려워할 뿐이다. 중국인들조차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이곳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한다. 세조는 천승의 지존으로서 멀리까지 수고로운 걸음을 하였고, 선인(仙人)과중, 단약을 만들고 도를 닦는 자, 화식을 끊는 자들이 모두 여기를 거처 갔으니 고금도 귀천도 현명하고 어리석음도 없다. 부지런히 구경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며, 시를 지어 읊고 책에 싣기도 하는 것이 분분하여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도 없다. 금강산이 천하에 이름을 독차지하고 사람을 전도시킴이 이와 같다.

     만폭동에 내려가니 돌 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졌다. 그 꿈틀거림이 용이나 뱀과 같아서 지금까지 자획이 이지러진 것이 없다. 양사언(楊士彦)의 필적이다. 이 노인의 풍류와 화려한 문장은 문단의 한 세대를 풍미하였다. 일찍이 회양 태수를 자청하여 이 산수간에서 왕래하며 높은 곳, 낮은 곳을 샅샅이 유람하였다. 가마를 타는 것은 이 노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푸른 벽에 학의 둥지가 있으니 이것이 금강대다. 붉은 정수리와 하얀 깃털 학은 어디로 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학의 등에 타고 날아갈 수가 없다. 오래도록 석산에 앉아 각각 시를 읊고, 그것을 암석 빈 칸에 새겼으며, 성명을 새기 고 그획을 붉게 칠하였다. 알 수가 없거니와, 삼일포의 옛 자취처럼 천년 동안 불멸하여 이곳을 지나며 보는 자가 어루만지며 감탄하고 이와 함께 더불지 못했음을 한탄할 것이다. 은계(銀溪)의 독우(督郵) 김경직(金敬直)이 관례를 마친 젊은이들 5,6명을 이끌고 장안사로 찾아왔다. 텅빈 골짜기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로 인하여 많은 위로가 되었다.

     오후에 각기 헤어졌다. 김경직은 마하연으로 올라가고 나는 표훈사로 갔다. 회양 태수가 마중을 나왔다. 우리들을 법당에 앉혀 놓고, 순두부를 만들어 주니 주린 창자가 갑자기 포식하였다. 이 절은 큰 사찰로서 절반이 을사년 홍수에 떠내려갔지만 이미 수리하였다. 모든 절의 불상은 반드시 문과 들창을 향해서 안치하였다. 그런데 이 절에서는 오직 동편에 설치하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승려의 말이 자못 허황하여 기록할 수가 없다.

     저녁 때 정양사에 올랐다.길이 산 중턱을 감돌아 있는데,그늘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모두가 단풍숲이다. 배꽃이 눈같이 흰데 바람이 불 때마다 연한 향기가 끼친다. 처음으로 꽃의 빠르고 늦음이 토지의 춥고 따뜻한 것에 원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천일대에 올랐다. 1만 2천 봉의 옥으로 깍은 듯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눈앞에 늘어서 특이한 모습을 모두 드러냈다. 층층이고 겹겹인 것, 먼고 가까운 것, 큰 것과 작은 것, 뾰족한 것과 둥근 것, 달려나가는 것, 머무는 것 등이 푸르게 솟고 희게 둘러싸 모두 눈안에 들어왔다.

     여기가 온갖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니, 도를 갖고 말하면 우리 유가의 소위 집대성이다. 선문(禪門)으로말하면 하루아침에 크게 깨달아 활연히 대통한 자의 경지인 셈이다. 그러나 만약 깊이 탐색하고 두루 밟아 지나오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내외와 본말을 거리끼는 것 없이 꿰뚫어보아 마음과 눈을 환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헐성루에 들어가니 바라다보이는 풍치는 천일대보다 좋다. 밤에는 기온이 싸늘하니 자연히 잠이 오지 않는다. 호음 거사(湖陰居士) 가 ‘거백옥이 사십 나이에 비로소 그릇됨을 알았다’고 읖은 것이 정말로 내 마음과 같다. 절 뒤에 나옹 화상의 부도가 있고 육면각이 당 앞에 있다. 그런데 이같이 유명한 절에 노승 한 사람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대개 근년에 요역이 대단히 무거워서 승도들이 편안히 거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중의 암자와 사찰이 모두 텅텅 비었으니, 하물며 유민들이 길 위를 떠돌아다니고,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빈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늙은 노년에 몇 말의 곡식을 얻기 위하여 관리가 되었으니, 양심을 거역함을 달게 여기 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4월 초8일. 등넝쿨을 헤치고 개심대에 올랐다. 대는 절의 가장 꼭대기다. 보이는 시야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정양사가 진면목과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헐성루로 다시 내려오니 매우 피곤하였다. 노승은 나옹이 남긴 의대와 유물들을 보여주었는데 완연히 전날과 같았다. 또 사리는 구슬 모양이고 색은 푸른데 금은으로 장식한 그릇에 담아 수놓은 비단으로 수백 겹을 감았다. 나옹은 동방의 고승으로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그런데 이 절이 나옹의 거처였던 관계로 그 의발을 나누어 소장하였다.

     점심을 먹고 장안사로 향하였다. 길은 골짜기 로 인해 높낮이가 있는데 천 길이나 되는 늙은 회나무가 길가에 서 있었다. 나이를 물으니 승려도 몇 백 년인지를 알지 못했다. 만약 훌륭한 장인을 만났다면 반드시 기둥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헛되이 산속에서 늙으니 애석한 일이다. 골짜기를 나와서 내려갔다.명운담인데 수석이 특이하여 만폭동의 수석보다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명운담 왼쪽에는 푸른 벽이 하늘을 바치고 있고 오른쪽에는 바윗길이 가파르다. 그런데 허물어져서 한걸음만 잘못 디뎌도 문득 천길 깊은 못에 추락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사이에 서너 명의 승려가 익사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걸을 수 있었다.

     돌들이 파랗고 하얀 곳이 면곡이다. 시냇물을 따라서 몇 리를 갔다. 시냇물 건너서 왼쪽으로 가니 등넝쿨과 빽빽한 나무들로 짙은 녹음이 우거졌다. 자칫 한걸음만 잘못 디디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가 없다. 나무줄기들을 잘라내고 후미진 곳을 헤쳐가며 비스듬히 기울어진 곳에 들어가니 길이 끊어졌다. 큰 돌이 많아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앉아서 쉴 만한 바위도 있고 구경할 만한 연못들도 있었다.시냇물을 세 번 건너니 언덕 위에 큰 바위가 있고 물이 그 아래로 질펀히 흘렀다. 산기슭 따라 돌로 된 성가퀴 높이가 두어 길이 되고 또 문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올라가니 골짜기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다만 영원암이 있을 뿐이다. 이곳은 백천동이라 부르고 혹은 시왕동이라고 하는 곳이다. 첩첩 싸인 봉우리들이 서로 호위하여 엎드려 있다. 그 중간에 특이한 봉우리들이 우뚝 서 있고, 소나무와 회나무가 비스듬한데 그 위로는 다만 골짜기가 더욱 좁아지니 사람에게 어지러움이 생기 게 한다.

     가마를 돌려 장안사로 들어갔다. 역시 큰 사찰이다. 금빛 편액이 처마 사이에 걸려 있다. '대웅보전'이라 하니 한 석봉의 글씨다. 법당 가운데에는 세 명의 부처님이 열지어 앉았고 동쪽에는 나한전, 문에는 사천왕이 있다. 밤에 선방에 누워 어제 놀던 것을 회상해 보았다. 걸어가고 쉬고 하던 것이 이미 묵은 자취가 되었다.살아서 다시 이 산중에 들어와 노승들과 지난 일들을 얘기 할 수있을지 알 수가 없다. 유람할 때에 대단히 고생했던 곳이 장차 산을 떠나려 함에 금과 옥처럼 사랑스러웠다. 갈림길에서 사람들과 헤어질 때 자꾸 생각나서 놓을 수 없으니 산수를 사랑하는 병이 이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알지 못했다.

     4월 초9일. 아침에 일어나니 첨지 이담(李憺)이 찾아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조정에 불참하여 삭출(削黜)논의의 대상이 되어 일가를 이끌고 영남에 귀향하였다. 한두 명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 네 고을의 강산을 모두 편력하고 춘성에 들어가 청평사를 보고 양구 가는 길에 이곳을 들렀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무신년 때부터 시중의 무뢰배와 서로 친밀하게 교류하고 '정운훈(定運勳)'에 참록(參錄)하였는데, 이제 발걸음을 돌이켜 산수간에서 노니니 소위 심산유곡에서 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을 먹고 이군과 작별하였다. 말을 타고 사문(沙門)을 나서서 한 계곡을 아홉 번 건넜다. 산이점점 멀어지고 속세가 점점 가까워진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지금까지의 좋은 구경이 한바탕 꿈만 같다.

     금강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물은 감돌아 흐르고 들판은 넓은데 민가는 겨우 한두 채 뿐이다. 돌밭이 거칠고 황폐하여 사람의 살림살이가 쓸쓸하다. 또 삼십 리를 갔지만 길을 가는 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앞에 고개 하나가 하늘에 비껴 있으니 쇄랑(洒郞)이라고 부른다. 백 번을 꺾어져서 내려오는데 만 길 구덩이로 떨어질 듯하다. 좌우에 절벽이 서로 마주해서 서 있다. 그런데 끊어질 듯이 이어지고,뛰어가는 듯 엎드리고, 트레머리를 올린 듯, 우뚝 뽑아낸 듯, 홀로 서 있다. 이것은 골짜기 입구에서 돌 하나로 뭉쳐서 아래로는 땅에 서리고 위로는 하늘에 가까우니 그 높고 큼을 형상할 수가 없다.

     큰 시냇물이 고개 밑에서 발원하니 배 같고 통 같은 것은 연못이고, 혹은 흩어지고 혹은 쏟아지는 것은 지류다. 암벽에서 날라 와서 혹은 수십 발 혹은 열 발이 되는 것은 폭포다. 큰 소나무를 찍어서 양 언덕에 걸쳐놓았다. 그런데 그 높이가 백여 척은 되고 넓이가 네 칸 정도인 것은 판교(板橋)다. 별처럼 벌려 있고 바둑알처럼 펼쳐져 희기가 눈빛 같은 것은 암석이다. 좁고 경사진 위험한 곳에 공중에 걸쳐진 것은 사다리길이다. 다리 아래로부터 산은 더욱 특이하고 물은 더욱 넓어져 서로 두르고 감돌아 이 같은 것이 4, 50리에 바다에 이른다.

     정말로 쇄랑동의 맑은 정취는 만폭동에 버금간다. 그런데 이것만이 오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의 숨겨짐과 드러남은 사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만남과 만나지 못함의 차이에는 또한 그 사이에 운수라는 것이 있다. 속세의 발자취가 더러운 것은 산신령과 물의 신이 아껴서 감추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에 관의 행차는 험한 것을 꺼려서 이곳으로 다니지 않는다. 승려들이 때때로 왕래하니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음이 산수에게야 무슨 손익이 되겠는가? 지금 천고의 세월 뒤에 나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돌아보건대 나의 성명과 기세가 이미 당세의 중망을 입는 처지가 아니고 후일 굉장한 문장력을 발휘할 수도 없을터이니 세 치 혀를 놀려서 수다스럽게 칭송한다 해도 필경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그러나 나도 세월을 만나지 못한 자이다. 장차 나르는 새나 숨은 표범처럼 이에 은거하여 바위굴과 시냇물을 바라보며 여생을 마친다면, 이 산이 세상에 이름남이 이 비록 강절(康節) 의 백원(百源)이나고정(考亭) 의 무이(武夷)보다는 못하겠다. 그러나 ‘종남첩경’의 종남산이나 ‘북산미문’의 북산은 이 산에 비한다면 노예와 같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만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조진역에 도착하니 우사(郵舍)는없고 다만 초막 하나가 있을 뿐이다. 잠깐 쉬고는 말과 가마를 타고 달려서 두백촌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쇄랑 이북은 통천의 경내이다. 태수 김극건(金克鍵) 공이 새로 해안가에 집을 지어서 객관으로 썼는데 매우 정갈하다. 밤에 비바람이 몰아쳐 파도가 거세게 치니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4월 초10일. 밤에 비가 오더니 쾌청하였다. 하늘이 맑고 구름 한 점 없으며 파도가 잔잔하고 물결이 일지 않으니 먼 섬들이 뚜렷이 보였다. 비오고 개인 뒤가 아니면 맑고 깨끗한 경치를 볼 수가 없다. 이것은 하늘이 나의 이번 여행을 가련히 여겨 우사와 풍백을 경계하고 단속하여 호수와 산으로 하여금 활짝 걷어 그 진경을 드러내 보이도록한 것이리라. 두 사위와 함께 농담을 주고받으며 갔다. 해당화가 만발하여 백사장을 덮으니 말도 꽃을 밟고 갔다. 두어 리쯤 가니 마치 문처럼 서로 마주선 바위가 있다. 만약 너희가 길 옆이 아니라 금강산 깊은 골짜기에 있었다면 반드시 석응암, 사자암 등과 함께 세상에서 나란히 칭송되었을 것이다.

     고을을 지나 청허당에 올라갔다 .들녘을 바라보니 매우 상쾌하다. 들으니 고을 원이 이미 총석정에 나와서 기다린다고 한다. 말을 달려가 보니 모여서 산을 이루었다. 그런데 산꼭대기의 높이는 각각 백여 길이며 어떤 것은 여섯 면, 어떤 것은 네 면이고 그나머지 꺾어져서 물에 눕고 길에 엎드린 자 또한 마모되어 면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없다. 이것은 귀신이 깎고 신령이 조각한 것인가? 아니면 바람도끼와 달도끼가 이룬 것인가? 비록여와씨의 묘함과 반수의 기술도 이러한 기교를 능가할 수 없을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은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감탄한다.

     내가 나뭇잎 하나를 들고서 두 사위에게 보이며, 

      "이 잎의 아로새김은 가을터럭같이 정교한데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 너희들은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있는가? 단지 이 나뭇잎만 아니라 천지간에 가득한 형형색색 기기괴괴한 것들이 어찌 한계가 있으리오. 이것은 조화옹의 솜씨가 아님이 없다. 형태와 색깔을 볼 수 있는 것은 기(氣)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렇게 되는 것’이 이(理)다. 모든 사물이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단지 눈으로 항상 접하는 것은 보기만 할 뿐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 드물게 접하는 것은 놀랍고 의아해서 의문이 이는데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기로써 말하면 어느 것이 심상(尋常)하고어느 것이 기괴(奇怪)한가?총석은 곧 나뭇잎이며 나뭇잎은 또한 총석이니 듣는 사람들은 그 의혹을 풀어 보라."

    라고 하였다.

     금란굴이 섬을 꿰뚫고 누대의 좌우에 있는데 풍랑이 일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 섭섭한 일이다. 점심을 먹은 후에 군수가 먼저 돌아가고 나도 객사로 돌아왔다. 군수가 다시 주연을 베풀었지만 내가 너무 피곤해서 술을 마실 수 없어 두어 차례 술잔이 돌아가자 이내 파했다. 군수의 아우 극감과 그의 손님인 이흥복(李興復)이 총석의 모임에도 참여하였다. 군수는 효원(孝元)의 아들이니, 아버지가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다. 또 아들이 있는데 세렴(世濂)이라고 한다. 대론(大論) 때 간관이었는데 다른 일을 핑계대고 피하였다. 이 일로 인해서 곽산으로 귀양을 갔다.군수가 이로 인해 상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4월11일. 신계를 가려면 매우 멀다. 일찍떠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하려니 군수가 만류하여 부득불 잠깐 머물렀다.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공짜 밥을 먹는데 오고 갈 때의 관청의 공급이 꼭 사신을 접대하는 것과 같다. 술대접과 음식이 자제의 행차에까지 미치니 문득 한가한 여행으로 고을과 우사(郵舍)에 피해를 끼친 것이 부끄럽다. 다시쇄랑 시냇물을 건너니 산수의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같이 그리웠다. 가는 길이 급하니 거듭 찾을 수가 없고, 도화원에 이르는 길을 사공이 다시는 찾지 못할 것이 또한 두렵다.

     조진역을 지나서 작은 고개를 넘어 심동에 내려가 바다로 나왔다. 마을 집에 들어가 잠깐 쉬니 남쪽 기슭의 고기 잡는 집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하늘에 닿았고 왼쪽은 금강산 바깥쪽이다. 그 중간에 바다의 남은 물결이 웅덩이져 호수가 된 것이 장전호, 장기호인데, 위태로운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구름사다리가 바위 언덕을 돌로 싸고 아득히 바다에 닿아 있는 것이 또한 몇 리나 되었다. 운암재에는 돌로 쌓은 옛 성이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소위 만리성인데 여기서 구불구불 함경북도까지 이른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옛날에 지나가는 자들을 막았을 텐데 연대가 멀어서 자세하지 않다. 신계에 가까이 가니, 바위와 봉우리가 더욱 우묵하고 특이했다. 바위가 사람같은 것, 새 같은 것, 그릇 같은 것들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그 중 매바위는 더욱 그 모습이 비슷했다. 골짜기 북쪽에 온정이 있으니 돌을 깎아서 벽돌같이 위 아래를 구분했는데 석천(石川)에 속한다. 석천의 근원은 구룡연인데 구룡연은 비로봉과 구정봉 사이에 있다.

     운암재에서5리쯤 들어가니 연지사 앞에 이르렀다.사원은 새로 지었는데 또한 중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원우가 장안사에서 홀로 유점사를 지나서 또 먼저 여기 에이르러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몹시 위로가 되었다. 여기서 통천군까지의 거리는 백 여리이다. 하루 종일 큰 바람이 불어 모래바람이 얼굴을 쳐서 견딜 수 없었다. 밤이 되자 더욱 심해서 지붕이 흔들거렸다.

     4월12일. 아침에 해가 뜬 직후에 먹구름이 모이며 비가 올 듯했다. 급히 골짜기에 들어가니, 돌 사이 바위틈에 푸른 솔 흰 눈이 완연히 삼동과 같다. 안개가 끼었다 걷혔다 하며 산과 골짜기는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 기이한 모습이었다. 바위가 뻗어 바닥이 되어 양 언덕에까지 이어져 맑은 시내가 흩어 펼쳐졌는데 그 울리는 소리가 비파를 타는 듯하였다. 백천과 만폭동만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 했다. 양사언이 이를 좋아하여 고질병이 되어 초가집 두어 채를 그 옆에다 짓고 때때로 왕래하였다. 선옹(仙翁)이 한 번 떠나매 그 발자취를 이을 이가 없더니 다행히 황근중(黃謹中) 공이 이 도의 방백이 되어 승려와 돈을 모아서 다시 정사를 지었다. 땅의 형세가 옛 터보다 좀 높아서 거기서부터 올라오니 기이한 봉우리가 소복이 모여 있어서 담장처럼 어우러졌다. 마치 나를 정양사 망루 위에 앉혀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수석이 앞을 막았지만,동북쪽은 트였으니 또한 정양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다만 이 집을 이미 돌보는 이가 없으니 비바람에 쓰러지고 풀과 나무에 묻혔다. 양사언의 암자가 허물어진 터가 된 것 같지 않다. 또한 한번 허물어지고 한번 일어나서 늘 일정하지는 않다는 것일까?

     동쪽으로 20리를 가서 골짜기로 들어갔다. 물이 높은 꼭대기에서 층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너럭바위가 있어 마치 승려의 바리때 같다. 물이 그 가운데 떨어져 못이 되었는데, 물이 꽉 차서 컴컴해 밑이 보이지 않으니 반드시 잠복해 있는 신물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가뭄이 심한데, 왜 변화를 부려 천둥 번개를 일으켜 비를 내려 우리나라 수천 리를 적시지 않을까?

     어렵게 걸어서 반산령에 오르니 자리처럼 평평하고 계단처럼 층이 졌다. 도랑처럼 깊은 바위가 있는데 급한 여울과 나는 듯한 폭포수가 그 자리의 넓고 좁은 것을 따라서 내려온다. 높은 성에서 나팔을 부는 자가 의관을 벗고 바람을 타고 내려오니 거꾸러질듯하기도 하고 춤추는 듯했다. 순식간에 백 척 바위 밑으로 떨어졌는데 몸과 피부에 손상이 없다. 이또한 한 번 웃음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수십 걸음 올라가니 양사언의 필적인 '봉래도(蓬萊島)' 세 큰 글자가 있었다. 그런데 자획이 그대로 있고 그 나머지 몇 줄의 글은 이끼가 끼어서 이미 희미하였다. 이 노인은 왜 가는 곳마다 자취를 남겨 뒤에 오는 사람에게 옛 생각을 하도록 하는가? 골짜기를 나와서 30 리를 가서 삼일포에 들어갔다. 아득한 붉은 누각이 보일 듯 말 듯 기이한 바위 푸른 소나무 사이에 있다. 말을 버리고 배를 탔다가 배를 버리고 정자에 올라갔다. 이것이 소위 사선(四仙)이 사흘 동안 놀던 곳이다.

     36봉우리의 아름다움이 하늘의 푸르름과 섞여 저마다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절벽까지는 구릉과 산들이고 그 사이에는 섬과 모래톱이 교차하였다.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가 밖에서 둘러싸고 물결 안에는 흰 바위다. 수풀 사이에 나오고 호수가 못이 되어 넓은 수면을 모두 둘렀다. 사방은 아득히 보이고 정자는 물 중앙에 있다.푸른 소나무와 아름다운 돌이 또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어디나 앉을 만하다. 여기에 앉으면 황홀하여 마치 난새와 학을 타고서 하늘에서 긴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 신선의 피리소리를 아득한 가운데 듣는 것 같다. 세상에 신선이 없다고 한다면 더 말할 것 없지만, 있다면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소위 네 신선이 진짜 신선이라면 장생불사하여 이제까지 천 년 동안 응당 여기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당초에 누가 사흘 동안 놀았다고 했는가?네 신선들이 웃을 일이 아닌가?나는 가는 것도 잊고 오래 앉아 있었고 가면서도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뒤돌아보았다.

      정신없이 배를 내려 남쪽 언덕에 옮겨 대었다. 위에는 매향비(埋香碑)가있다. 대개 박달나무는 물에 들어간 지 천 년이 되면 침향이 된다. 그래서 옛사람이 호수에 나눠 묻고는 돌을 세워 그 이름을 기록하였으니 또한 옛날 자취이다. 묻은 지가 이제 몇 백년이 되었는지? 그 잠긴 것을 찾아 일으켜 향내를 일시에 퍼뜨려 세상의 허다한 냄새들을 없앨 수는 없을까? 또바위 사이에 붉은 글씨로 '술낭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란 여섯 글자가 있는데, 절반은 색이 변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오직 술(述), 남(南), 석(石)자만 분명히 보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영랑, 술랑, 안상, 남석 네 신선이 두루 관동을 노닐었는데 총석대와 이 정자가 그 발자취가 지난 곳이므로 모두 사선으로 이름했다고 한다. 

      알 수가 없다. 네 신선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단약을 먹고 기운을 단련해서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자들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도망하여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형상 밖에서 제멋대로 노는 자인가? 붉은 칠과 몽당붓으로 오히려 뒷사람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 보기 를하루살이처럼 여기고 한 가지 일도 그 마음속에 들여놓는 것이 없는 자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처럼 이름을 숨기 고 자취를 감추며 음풍농월하여 스스로 즐길 뿐인 자들과 비교하면 누가 신선이 되겠는가?

     하물며 나 같은 자는 세상에서 살아도 세상을 탐닉하지 않고, 사물 가운데 처하되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먹고 마셔도 그 맛을 절제하며, 관복을 입어도 그 귀함을 잊으며, 얼굴은 항상 청춘이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세지 않는다. 장차 하늘 끝을 더듬고 달 굴을 밟아 삼십육궁을 오가며 희황[伏羲]의무리가 되리니,알 수가 없다.영랑의 무리가 이와 같이 할 수 있을까? 배를 저어 오르내리며 사자석을 어루만지며 머뭇거리다가 날이 이미 저물어서야 통천군에 도착하였다.

     새 태수 유박(柳舶)이 아직 교인(交印)하지못했다. 조용한 빈 객사에 두 사위와 마주 대하고 있자니 매우 심심하였다. 산해정에 올라가니 가까이는 남강에 임했고 멀리는 큰 바다에 임했다. 옆 고을의 관사나 정자가 이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흰 바위 두세 개가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는데 옥빛으로 우뚝하다. 이는 삼일포에서 언뜻언뜻 보이던 것으로, 여기서 보니 대단히 장관이다. 소위 지주(砥柱)가 중류(中流)에서 왔다는 그것인가? 거친 물결 속에 우뚝 서서 사생과 영욕에 굴하거나 흔들리지 않으니 이 돌에게 부끄럽지 않을 자가 오늘날 세상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내 마음에 남몰래 슬픔이 고인다.

     4월13일. 일찍출발하여 남강20리쯤에 이르니 현종암이 있었다. ‘법희기(法喜記)’중에 종이 바다에 떠서 안창(安昌)고을에 이르러서 바위에 걸렸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아래 큰 바위가 물가를 덮고 있다. 그런데 말을 전하는 이가 이것을 가리켜 종을 싣고 온 배라고 한다. 대단하구나, 사람들이 괴상한 것을 말하기 좋아함이여. 듣고는 그냥 다시 빙그레 웃을 뿐이다. 길 오른쪽에 풀로 엮은 정자가 있다. 대강역 동네로 들어가는 어귀이다. 여기서 휴식하며 아침밥을 먹었다. 20리를 달려가면 명파가 있다. 또 20리를 가니 열산이다. 관사에 쉬면서 졸고 있으니 새와 참새가 사방에 날면서 슬프게 울었다. 마치 원한을 호소하는 듯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보았더니 뱀이 지붕 기와 속에서 그 새끼를 잡아먹으려 한다. 나는 측은하여 사람을 시켜 잡아 급히 끌어내리도록 하였다.두어 자나 되는 늙은 뱀이었다. 내가 쯧쯧 하며 혼자 말하기를 너도 미물이거늘 왜 미물을 해치는가?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서 몸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숨기면 네 마음대로 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그러나 장차 그 새끼들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저것이 눈치를 보아 멀리 피하는 제비와 참새를 피하지 않으면 마땅히 소굴을 덮어야 한다. 뚤린 틈과 허물어진 기와는 백 년 된 오래 된 집에 많은 구멍을 뚫리게 한다. 헐어진 곳의 위로는 비가 오고 옆으로는 바람이 불어 모두 뒤집어진 뒤에야 그칠 것이다. 까마귀가 누구의 지붕에 앉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애통한 일이다. 빨리 뱀을 숲으로 쫓으라고 하였다.

    옆 사람이 말하기를,

    "심하도다. 그대의 어리석음이여. 죽이지 않으면 장차 다시 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내가 말하기를,

    "만약 우거진 풀들을 모두 뜯고 정원을 깨끗이 쓸어서 안팎이 훤하게 숨을 곳을 없게하면 뱀이 어찌 처소에 올라와 독을 뿜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비록 이 뱀 한 마리를 죽인다고 해도 머리 둘에 뾰족한 혀를 가진 뱀이 자기 패들을 끌어 모으면 그 힘은 물건을 해칠 뿐만 아나라 흉하고 독한 기운이 마침내 주인의 침상까지 이를 것이다. 이는 주인이 마음을 돌이켜 깨달으나, 이러한 도모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뱀은 끝이 없는데 어떻게 모두 잡아서 죽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저것은 미물이지만 또한 우리와 같은 동물이다. 그 해로움을 제거하면 그만이지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했다. 뱀도 멀리 가버렸다. 저물어 간성에 들어가 달 아래 영월루에 올랐다. 늙은 살구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새로 핀 연꽃은 벌써 돈짝만 해졌다.

     4월14일. 출발하여 청간정에 도착하니 아직 아침이었다. 밥을 먹고 다시 달려서 날이 저물 무렵 낙산사에 들어갔다. 만호 이준, 상사(上舍) 최기백(崔基銆), 우태승(禹泰承)군, 박종문(朴宗文)이 함께 와서 기다렸다. 원우가 청간정에서 이미 달려와 순두부를 만들어 일행들을 다 먹였다. 조용히 긴 저녁을 보내고 저물어서 관청에 돌아왔다.

     지나온 것을 한 곳에 적어보니 놀랍게도 동(洞)이라고 하는 것이 내산(內山)에네 곳이 있었다.

    수점으로부터 아래와 비로봉으로부터 아래는 만폭동이다.그런데 천덕동13폭이 또 그곁이다. 내원암과 축빙치에 집을 지어 유점사라 했다. 불정대의 남쪽은 솔숲이고 구정봉의 동쪽은 신계인데, 이는 모두 금강산의 바깥쪽이다. 걸출하니 우뚝 솟아서 안팎 산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비로봉이다. 이 봉우리에 오르면 천 리에 두른 여러 산들이 모두 눈앞에 있으니 삼각산과 구월산 같은 산도 또한 그 모습을 숨길 수 없다. 그서쪽안은 망고대이고 밖은 구정봉과 만경대이다. 그 시내가 만폭이나 장안사를 지나서 회양으로 내려가 양구를 거쳐 춘성까지 이르니 이것이 소양강이다. 마침내 한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유점동의 시내는 90리를 가서 송림동의 백천수와 합해져 숙고촌을 지나 고성으로 달린다. 또 신계와 발연 두 물이 하나가 된 것과 함께 남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산은 그 근본이 하나이다. 그러나 나뉘어 천만 봉우리가 되고, 물은 그 줄기가 달라도 한 근본으로 함께 돌아간다. 한근본이 만가지 다른 것이 되는 것과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로 되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내가 외산으로부터 내산에까지 이르렀고, 아래로부터 높은 데까지 올라갔고,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까지 미쳤으니 깊다고 찾지 않은 곳이 없고 멀다고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생각에 부족한 것이 있는 듯하다.

     또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총석정을 바깥으로 하고 동석에 들어가서 발연을 다보았다.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원숭이가 집삼은 곳과 물고기와 용이 구멍을 삼은 곳으로 옛날 자장(子長)도 다 돌아보지 못했고 강락(康樂)도 미치지 못한 곳을 내 마음대로 실컷 보지 못했다. 오래도록 천상의 맑은 기운과 함께 해서 그 다할 바를 알지 못하니 알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이 이것을 즐거워했던 것일까? 뒤에 올 자로 능히 내가 밟고 지난 것을 좇아올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높게 솟은 것이 산임을 알고 흐르는 것이 물임을 안다. 한갓 산이 되고 물이 됨만 알고 왜 그런지를 모른다면 되겠는가?진실로 왜 그렇게 된 것을 알고 내 마음에 얻어서 깨닫게 되면 저절로 춤이 나오고, 네 마리 수레 천 대와 만종의 녹도 그 즐거움을 바꿀 수 없으며 광주리의 밥을 먹고 베옷을 입어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저 푸른 산과 흰 돌은 외물일 뿐이다. 즐거워하는 바가 과연 이것에 있는 것인가? 이것에 있지 않은 것인가? 나 같은 사람은 험난한 곳을 지나서 가기를 게으르지 않았으며, 높은 데 올라가서는 한 삼태기의 공이 이지러짐을 경계하였고,흘러가는 데 임해서는 가는 것이 쉼 없음을 깨달았다. 높기 는 산악 같고 혼연함이 바다와 같은 것은 그 근원을 거슬러 갔기 때문이다. 산은 끝까지 올라갔으니, 부지런히 옛 사람의 뛰어난 자취를 좇아, 스스로 고명, 광대한 경지에 이르렀다. 마침내 발군의 경지에 이른 것이 마치 태산과 개미굴 같고 바다와 도랑물 같다. 그러니 이번 유람을 떠나 이룬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