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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장유

    페이지 정보

    조회 389회

    본문

     

    ○ 휴 상인이 낙산으로 떠나려 하면서 시권을 가지고 와 보여 주기 에 차운하여 시를 지어 주면서[休上人將向洛山 携詩卷來示 次韻以贈]


    계곡(谿谷) 장유(張維) 165)



    남능북수를 논하지 마오 休論北秀與南能

    사람마다 마음속에 등불 하나씩 있는 것을 箇箇人心有一燈

    병중에 만난 스님 서로들 말이 없이 病裡逢僧兩無語

    밝은 모습 근심 대하는 듯하네 炯然如對玉壺冰


    맑은 가을 관동으로 석장(錫杖)을 날리나니 淸秋飛錫向關東

    그 옷자락 만 골짜기 바람을 불러일으키네 一衲行披萬壑風

    듣자니 낙가산(洛伽山)에 다시 건립하였다고 聞說洛伽重建立

    포금 속에 절이 있음을 알겠네 祗園知在布金中


    『谿谷先生集』 卷之三十三, 七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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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 장유(1587,선조20-1638,인조16)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후 대사간·대사헌·대사성을 지내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 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다음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다. 그 후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 知經筵事)를 겸임했다. 1631년 딸을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에게 출가시켰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공조판서로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했다.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母親喪)으로 끝내 사직했으며 장례 후 과로로 죽었다.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다. 저서로 ≷谿谷漫筆≸·≷계곡집≸·≷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 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