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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시문

    이명후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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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유금강일록(遊金剛日錄)』   이명후(李明厚) 166)



    우리 동방에 명산이 셋 있는데, 영남의 지리산(智異山)과 관서의 묘향산(妙香山)과 동해의 금강산(金剛山)이 그것이다. 세 산 가운데 금강이 가장 아름답다. 중국 사람들도 ‘조선국에 태어나 한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이로써 금강산의 아름다운경치가 우리 동방에서만 최고인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경치임을 알수 있다. 나도 한번 유람하여 평생의 소원을 풀어 보려 했으나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형부 좌시랑(刑部左侍郞)으로 있다가 외직을 힘써 구해 숭정(崇禎) 무진년(1628년, 인조6년)에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어 정월에 부임했다. 공사(公私)의 일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4월에야 대강 정돈이 되었다. 나 자신을 생각해 보니 나이가 육순에 가까워, 지금 풍악산을 유람하지 않으면 뒷날에 후회할까 두려워, 드디어 유람하기로 결정하고 두 아들 현기(顯基)와 원기(元基)를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4월 12일 계묘일. 말을 타고 연곡(連谷)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동산(洞山) 에 이르렀는데 권칭(權稱) 정기평(鄭基平)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13일 갑진일. 일찍 동산을 출발해 정오에 상운(祥雲)의 유객당(留客堂)에서 점심을 먹었다. 날이 저물 무렵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렀다. 나의 벗인 양양 부사(襄陽府使) 지세 (持世) 조위한(趙偉韓)이 이화정(梨花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악을 베풀어 주었다. 비가 내려 잔치를 거두고 빈일료(賓日寮)에 들어가 즐겁게 놀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파했다.

    절은 신라 때 신승(神僧)인 의상(義相)이 창건했다고 한다. 후전(後殿)에 관음상을 모셨는데, 만든 모양이 매우 정묘하다. 선당(禪堂)의 벽 위에는 안견(安堅)이 그린 산수도 가 있다. 절은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 사람들은 중국 금산(金山)의 감로사(甘露寺)와 비교하는데 어느 절이 더 뛰어난지는 알 수 없다. 절 동쪽에는 의상대가 있고 대북쪽에는 관음굴(觀音窟)이 있다. 세속에 전하기로는 익조(翼祖) 가 아들 얻기를 빌던곳이라고 한다.

    14일 을사일. 아침 일찍 낙산사를 출발해 청초호(靑草湖)를 거쳐 영랑호(永郞湖)를 지났다. 영랑호에서 잠시 쉬었는데 매우 맑고 경치가 아름답다. 청간정(淸澗亭)에서 점심을 먹고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다. 이 또한 팔경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직접 보니 들은 것과는 같지 않다.

    청간정에서 20여 리를 가니 뚝 끊어진 산이 바다를 옆에 두고 우뚝 서 있다. 아전에게 물어 보니 능파대(凌波臺)라고 한다. 수레를 돌려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마주 하고 있다. 바닷가 경치는 대략 비슷하나, 서쪽의 경치는 좌우에 호수가 있어 파도가 포구에 드나든다. 논을 새로 갈아서 허연 물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 작은 다리가 시내 위에 걸쳐 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어촌 마을에서 저녁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겹겹으로 이어진 산과 고개는 구름 가에 아름답게 서 있고, 저녁놀은 비추었다 사라졌다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다. 내가 ‘앞쪽 경치가 뒤쪽 경치만 못하다’고 하자, 따르는 이들도 모두 그렇다고 한다.

    10여 리를 더 가니 선유담(仙遊潭)이 나왔다. 못은 별로 크지 않은데 앞산이 에워싸고 있어서 큰 산이 물 가운데 거꾸로 들어간다. 못 좌우에는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었고, 앞뒤는 맑고 시원하다. 비록 영랑호만 못하지만 그윽하고 깊숙한 맛은 마음에 들었다. 논하는 이들도 어느 것이 더 뛰어난지 쉽게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저녁에 간성(杆城)에 이르렀다. 고을 수령은 나의 벗 중정(仲靜) 김상복(金尙宓)인데, 차원(差員)으로 서울에 가고 없었다. 그와 더불어 다정한 이야기 를 나누지 못하니 한번만나는 것도 명수(命數)가 있어야 하는 것임을 알겠다. 이에 마음이 아쉬웠는데, 아랫사람들마저 매우 박하게 대하니 더욱 언챦았다. 달빛을 맞으며 누대에 올라 유량(庾亮)이쓴 남쪽 누대란 구절을 읊었다. 천박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했는데도 그가 달을 즐기는 마음이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15일 병오일. 새벽에 가서 대궐에서 행하는 예를 보았다. 일찍 간성을 출발해 20여리를 가서 화진포(花津浦)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니 바닥이 은은 하게 보였다. (물속에) 집〔屋宇〕이 있다는 말은 불경스러워 믿을 수 없다. 대개 모래톱의 물이 번갈아 나오고 맑고 넓으며 깊숙한 곳을 경포(鏡浦)에 비교하는데, 경포가아래에 있으나 경포라는 이름은 도리어 그 위에 있으니 왜 그런가? 대의 좌우에는 좋은 논과 밭이 많이 있다. 왼쪽에는 군사(軍士) 이경순(李敬淳)의 집이 있다. 경순은 문장과 시를 잘했는데 늙어서 죽은 뒤 아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집은 이사를 갔으나 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오른쪽에는 군사 이연(李連)의 집이 있다. 모두 돈을 주고 사서 살면서, 그 곁에 있는 마전(馬田)을 소작으로 부친다고 한다. 벼슬을 버리고 살고 싶어도 누가 팔겠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혀를 찼다.

    오시(午時) 가 가까워서야 별산(別山)에 이르렀다. 말을 쉬게 하고 여물을 먹였다. 무송도(茂松島)를 지나서 명파역(明波驛)에서 잠시 쉬었다. 송도(松島)를 지나 대강역(大江驛)에서 점심을 먹었다. 무송과 송도의 승경은 대략 만경대와 다름이 없다. 어제 저녁에 박시창(朴時昌)이, 간성 사람들이 대접을 박하게 했다고 화를 내면서 팔까지 휘두르며, 

    “언제쯤 고성(高城)에 도착할까?. 고성은 틀림없이 대강(大江)에서 성대하게 차려 놓고 기다릴거야.”라고 했는데, 어찌 이처럼 조용한가.


    대강에 이르렀으나 역참에서 기다리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승려가 미리 재계하고 기다리는데 먹을 것을 주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모두 배를 잡고 크게 웃는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밥을 지었다. 밥을 먹고 나니 짙은 안개가 하늘에 비끼고 가는 비가 뚝뚝 떨어지기시작했다. 대강을 출발해 감호(鑑湖)로 가는 길에 전 도사(都事) 정전(鄭沺)의 정자에 올랐다. 네모진 호수에 바위 봉우리가 아름다워 마음에 들었다. 주인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벼슬을 구해 조정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아, 이런 강호의 경치를 두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려고 벼슬 얻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바닷길을 따라 10여 리를 가니 바위봉우리가 나왔다. 바로 현종암(懸鍾巖)이다. 바위에 구멍이 움푹 파여 집과 비슷해서 비와 눈을 피할 수 있겠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오백 나한이 바다에서 나와 석실에 살다가 좌해(左海)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러므로위에는 현종암이 있고 바닷가에는 부주암(覆舟巖)이 있고, 서쪽에는 계주암(繫舟巖)과곡포암(穀包巖)이 있다. 모두 신성(神聖)한 옛날의 자취다.’라고 한다. 그 말이 불경스러워 모두 기록할 수 없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남강(南江)에 이르렀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 뱃사람이 배를 대고 강북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명멸(明滅)하는 동안 강을 건넜다. 태수(太守)인 명로(明老) 허계(許啓)는 오래된 벗이다. 언덕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오래 바라보고 있다가 우리가 오자 정성스럽게 위로해 준다. 언덕에 올라 마주 보니 매우 기뻤다. 서서 술 한 잔을 마시고는 나를 이끌어 해산정(海山亭)에 올랐다. 이윽고 몇 잔을마시고는 술자리를 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따라온 이들은 모두 이슬을 맞으면서 잔다. 매우 불쌍하여 정자의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6일 정미일. 일찍 일어나 주변을 두루 구경했다. 해산의 경치를 평가하려 하는데,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아침 늦게야 비로소 개었다. 동쪽으로 해문(海門)을 바라보니, 바위가 바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마치 거센 파도에 버티고 서 있는 지주(砥柱) 같다.

    남쪽에는 바위산 세 봉우리가 눈앞에 줄지어 서 있다. 서남쪽에는 금옥(金玉)이 서있는데, 푸른색이 눈에 가득하다. 동서쪽에는 양귀암(兩龜巖)이 있다. 큰 강이 마치 하얗게 바랜 듯 너른 들 가운데를 에워싸며 흘러간다. 평하는 이들이 죽서루(竹西樓)보다 낫다고 하는데 팔경에는 끼이지 못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명로와 더불어 고산대(高山臺)에 올랐다. 달을 기 다려 강에 배를띄우려고 하는데,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이경(二更)이 되어서도 달빛을 보지 못하고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遊金剛日錄』




    吾東方. 有三名山. 嶺南之智異. 關西之妙香. 東海之金剛. 三山之中. 金剛爲最勝. 故中國人. 有願生朝鮮國. 一見金剛山之句. 是則山之勝致. 非但爲吾東之最. 在中國亦不多得. 可知也. 願一遊歷. 以償平生之願. 而未果焉. 崇禎戊辰. 以刑部左侍郞. 力求補外. 爲江陵府使. 正月視事. 公私之務棼. 如至四月. 稍自釐. 因念吾身. 年迫六旬. 不以此時. 徃遊楓岳則恐有後時之悔. 遂决意探勝. 率二子顯基元基.

    十二日癸卯. 騎馬至連谷. 午餉. 夕抵洞山. 權稱鄭基平. 持酒來見 

    甲辰. 早發洞山. 午餉祥雲留客堂. 日晡. 直抵洛寺. 襄陽府使趙偉韓持世. 即故舊也預待于梨花亭. 陳酒樂. 因雨捲. 入賓日寮歡宴. 日昏乃罷. 寺新羅神僧義相所剏. 後殿. 設觀音塑 像. 制作極精妙. 禪堂壁上. 有安堅山水圖. 寺之勝致, 則關東八景之一也. 人擬中朝金山甘露寺等. 而未知優劣如何. 寺東. 有義相臺. 臺北. 有觀音窟. 諺傳. 翼祖祈嗣之處云.

    乙巳. 早發洛山. 歷靑草湖. 過永郞湖. 少憇. 殊爲淸絶. 午餉淸澗亭. 登萬景臺. 亦八景之一也. 而眄見頗不如所聞. 自淸澗. 行二十餘里. 有一斷山. 傍海徒立. 問於郵吏. 則乃凌波臺 也. 回車登眺. 則東向面大洋. 海邊之景. 大畧相似. 而西望. 則左右湖水. 漲入浦口. 水田新 耕. 白水平鋪. 小橋架川上. 漁村撲地. 夕烟初起, 重山疊嶺. 矗立雲際. 斜光掩映明滅. 眞快景也. 吾謂前面之景. 不若後面. 諸從者. 皆以爲然. 又行十里. 得仙遊潭. 潭之廣不甚濶遠. 而前山環擁. 長麓走入波心. 湖水左右. 映帶長松數百株林立. 後前淸曠. 雖不如永郞. 幽邃可愛. 善論者. 亦未易甲乙. 向夕扞城郡. 主倅卽舊知金尙宓仲静. 以差員上京. 不得與之稳討. 信知一會之有數也. 悵然之餘. 其下人待之甚薄. 尤可恨也乘月登樓. 詠庾亮南樓之句. 興不淺而其無賞心. 何.

    丙午. 曉行望 闕禮. 早發扞城. 行二十餘里, 到花津浦, 乘舟入湖中. 隱隱見水底. 屋宇其言不經不可信. 大槩洲渚. 互出淸曠幽邃比於鏡浦. 鏡浦殆在下風而鏡浦之名. 返在其上. 何耶. 且其臺之左右. 多良田美畓. 左則軍士李敬淳之家. 淳也. 能文善詩. 老死. 其子不能守. 拔宅移居. 其基尙存. 右則軍士李連之家皆可貨而居. 其傍又多馬田. 亦可賃耕. 思欲觧官留居. 誰能與買山錢耶. 不覺咄咄. 近午抵別山. 歇馬啖飯. 行過茂松島. 暫憇明波驛. 歷松島. 午餉大江驛. 茂松. 松島之勝. 大畧與萬景臺無異. 昨昏. 朴時昌. 憤扞城人之不待. 乃奮臂. 曰何 時當到高城之境也. 高城. 必盛辦出待於大江. 豈若是寥寥然哉. 及到大江. 則無一人到站上. 余戱之. 曰預期僧齋不腹. 非此類也耶. 相與捧腹大噱. 久之. 設食. 食後. 大霧橫天. 細雨濛 濛. 因自大江發行. 趍鑑湖之路. 登前都事鄭沺之亭. 方湖石峯. 淸絶可愛, 問其主人之何在. 則方入朝求仕. 噫. 有此江湖之勝. 而當此世亂之日. 尙有求仕之心耶. 循海路. 行十餘里. 有 石峯. 卽所謂懸鍾巖也. 石竇穹窿. 如屋宇. 可以避雨雪. 世傳. 五百羅漢. 自海中出. 寄寓石室. 泊舟于左海. 故上有懸鍾巖. 海邊有覆舟巖. 西有繫舟巖. 穀包巖. 皆神聖古迹. 其言不經. 皆不足記. 遂下山. 行到南江. 日已曛黑. 舟人艤船而待江北岸上. 火光明滅. 因渡江. 太守許啓明老. 即吾世友也. 長立于岸上. 引領而望. 勞慰甚勤. 登岸而對. 相喜可知也. 立飮一盃. 相携入海山亭. 因飮數盃. 食罷就寢. 而諸從者. 霑濕露處. 誠可矜悶. 而亭之勝槩. 未暇賞也. 

    丁未. 早起周覽. 欲評海山之勝. 而海霧蒙瞀. 日晩始霽. 東望海門. 有石巍然立海中. 如砥柱頹波. 南有石山三峯. 排列於面前. 西南金玉立. 蒼翠滿目. 東西有兩龜巖. 大江. 如白練橫拖大野之中. 評者. 以爲勝於竹西. 而以不入於八景. 爲恠云. 黃昏. 與明老. 登高山臺. 欲待月放舟江中. 玄雲掩翳. 迨至二更. 未見月光. 各飮數盃. 悵然而還. 


    『遊金剛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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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 이명후(李明厚-연대 미상)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호(號)는 성암(誠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