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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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紀行) 아계 (鵝溪) 이산해(李山海)
쫓겨난 이 신하 대죄하던 곳 孤臣昔竢罪
대동강 동쪽 외진 마을이었지 浿水東村僻
당시엔 풍파가 창졸간에 일어나 風波起倉卒
화란을 예측하기여려운 상황이라 禍機將不測
죽음 못 면하리라 다들 말했지만 人言死難免
성상께서 통촉하시리 나는 믿었네 我恃天鑑燭
하해 같은 은혜로 목숨 보전하여 鴻恩荷曲全
외진 이곳 영해로 귀양왔었지 嶺表賜譴謫
찢어진 옷 어깨와 팔꿈치 드러나고 破衣露肩肘
행낭 자루엔 남은 곡식이 없었네 行橐無餘粟
금오랑 215) 이 길 떠나라 재촉해대니 金吾催登途
잠시인들 지체할 수 없었다오 頃刻留不得
사위인 이랑 216) 이 나를 좇아와서 李郞追我來
갈림길에서 비통한 이별할 제 慘慘臨岐別
어디로 갈거나 말은 못 하고서 訒之自何方
서로 부여잡고 길 위에서 울었지 相扶路上泣
저물녘에 상원촌에 들어서니 暮投祥原村
나무 그늘에 숨은 오두막이었네 樹底藏蝸屋
수안 길에선 진흙탕에 빠지고 衝泥遂安路
신계협에선 더위에 시달렸지 觸熱新溪峽
주인은 나를 후하게 대접하여 主人遇我厚
술을 내고 쟁반에 어육을 담아 와서 杯盤盛魚肉
유락하는 신세 은근히 위로해 주니 慇勤慰流落
반기는 눈빛 참으로 막역지우였네 靑眼眞莫逆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안협촌 窈窕安峽村
가는 길은 강 따라 굽이굽이 꺾였지 緣江路百折
둘째 딸아이가 장인을 따라 仲女隨舅翁
난리 피하여 숲 속에 숨어 있다가 避亂依林樾
나를 보고 울며 잠시만 머물라 애원했네 啼呼願少留
그러나 메조밥이 채 익기도 전에 糲飯炊未熟
옷깃 떨치고 떠나 돌아보지 않으니 拂衣去不顧
부녀간의 은정 칼로 자르듯 아팠네 恩情如斷割
이천에서는 늙은 종을 만났는데 伊川逢老僕
우리 열 식구 깊은 골짝에 숨어 있었지 十口竄深谷
늙은 아내는 작별이나 할 양으로 老妻欲相訣
나를 기다리며 길가에 서 있었건만 待我立路側
뿌리치고 말을 채찍하여 지나가니 麾之策馬過
어느 새 운산을 넘어 아득히 멀어졌네 已覺雲山隔
밤중에 평강현을 지날 적에는 夜過平康縣
달도 없는 어둠 속 부엉이가 울었지 月黑鵂鶹哭
금화촌에서는 비에 막혀 머물렀는데 滯雨金化村
시냇물이 깊어 말의 배까지 차올랐네 溪深過馬膓
사위 유랑은 어린 딸을 데리고서 柳郞偕弱女
양식을 싸들고 산 넘고 물 건너와 嬴粮勤跋涉
낡은 이불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携來一幣衾
눈물과 함께 길 떠나는 내게 주었지 和淚贈行役
가고 또 가서 낭천을 지나노라니 行行過狼川
산이 깊어 범 발자국이 많았네 山深多虎跡
양구와 인제 두 고을의 태수는 楊麟兩太守
옛적부터 교분이 있어온 터라 分義自疇昔
말술을 나에게 마시라 권하매 斗酒勸我飮
그 깊은 정 뱃속에서 우러나왔지 深情出肝膈
동쪽으로 한계산을 바라보니 東望寒溪山
빽빽이 세운 창칼처럼 높은 봉우리들 嵯峨森劒戟
저물녘에 산 아래 역참에 묵노라니 暮宿山下驛
구름과 산 기운에 잠자리가 눅눅했지 雲嵐濕枕席
새벽녘에 미파령 잿마루를 오르니 曉登彌坡嶺
동해 바다가 몸 굽히면 잡힐 듯 東溟俯可挹
층암절벽에 말발굽이 미끄러져 層崖馬蹄滑
열 걸음에 예사로 아홉 번 넘어졌지 十步恒九蹶
미파령을 내려와 원암에 당도하니 下嶺到元巖
세 가닥 장대 높이로 해가 기울기에 三竿日已夕
황혼에 낙산사로 가서 투숙하는데 黃昏投洛山
절간 밥상이라 죽순과 나물이 섞였지 僧盤雜筍蔌
늙은 중이 나를 불러 깨우더니만 老衲呼我起
새벽 창으로 일출 광경 보라 하네 曉窓看日出
평소에 꿈에서나 그리던 곳인데 平生夢想地
하룻밤 묵으니 참으로 절승이었지 一宿眞勝絶
해가 뜰 무렵 멀리 현산을 바라보니 平明望峴山
안개 낀 수림이 빽빽이 둘러 있었지 煙樹圍簇簇
짧은 노를 저어 강어귀를 내려오니 短棹下江口
외로운 성에서 뿔피리 소리 들리었네 孤城聽吹角
쓸쓸한 고을이라 동산현에는 蕭條洞山縣
낙봉 217) 의 시가 벽에 걸려 있었지 駱峯詩掛壁
명사십리 백사장엔 해당화 향기롭고 鳴沙海棠香
경포대 호숫가에는 찬 솔이 푸르렀네 鏡浦寒松綠
임영은 예로부터 이름난 지역이 臨瀛古名區
산수도 좋거니와 좋은 유적 많아 山水多勝躅
말 위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던가 馬上幾回首
노정을 다잡아 번갯불처럼 치달렸네 嚴程若電掣
갖은 고생을 겪고 율령재를 넘으니 間關踰栗嶺
화현 고개가 또 우뚝이 서 있었지 火峴又突兀
험한 길을 빠져나와 평원을 지 脫險度平曠
진주성 218) 밖에 다 달아 유숙하였더니 眞珠城外宿
수령이 추위에 떠는 날 불쌍히 여겨 使君憐我寒
솜을 넣은 도포를 입으라 주고는 綈袍縫密密
조각배로 나를 전송해 준 그 온정 扁舟送我情
담수는 깊고 깊어 천척이었네 潭水深千尺
높고 높은 소공대에서는 崔嵬召公臺
멀리 울릉도가 역력히 보였고 蔚陵看歷歷
울진이라 독송정에서는 仙槎獨松亭
여윈 말 매어놓고 여물을 먹였지 瘦馬留一秣
망양정에서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니 望洋臨縹緲
하늘과 물 푸른빛이 서로 엉겼어라 天水相涵碧
이에 흉금 어느 새 후련히 트이어 胸襟覺浩浩
시름도 즐거움도 죄다 던져버렸지 憂樂盡抛擲
월송정 객점에서 안장을 풀고 쉬는데 卸鞍越松店
머리를 쳐드니 머리가 천정에 부딪쳤네 擧頭頭打屋
의연히 내 고향 집에 돌아온 듯하니 依然返桑梓
분수를 헤아림에 만족할 줄 알겠더라 揆分庶知足
야밤에 치달려 온 화급한 통문을 보니 羽書半夜馳
승냥이 같은 도적떼가 가득 몰려온다네 豺狼急充斥
이름 없이 헛되이 죽는 게 부끄러웠지 一死愧無名
이내 목숨이 아까운 건 아니었다오 軀命非所惜
창황히 서둘러 뒤고개를 넘어가면서 蒼黃踰後嶺
한 달이라 삼십 일 동안 기갈을 참았네 三旬忍飢渴
적이 지나간 뒤에 처소로 돌아와보니 賊過還僑舍
소슬한 가을바람이 이미 불더라 秋風已蕭瑟
나의 두 자식과 그 어미인 아내가 兩兒與母妻
지친 모습으로 이곳 해변을 찾아왔지 纍纍尋海曲
만 번 죽을 위험 끝에 홀연히 상봉하니 萬死忽相逢
꿈인가 생시인가 알기 어려웠네 眞夢未易識
황보촌에서 귀양사는 삼 년 동안에 三年黃保里
골육 친지 반나마 영락했으니 骨肉半零落
슬퍼해도 소용없음이야 익히 알지만 自知無益悲
쇠잔한 머리 날로 흰 터럭이 늘었지 衰鬂日添白
광음은 절로 하염없이 흘러가고 光陰自荏苒
한서는 수레바퀴통처럼 빨리 바뀌니 寒署如轉轂
눈길 닿는 곳마다 마음이 언짢아서 觸目懷作惡
때때로 흥건히 흐르는 눈물을 닦았지 時時淚盈掬
어찌 객지살이 괴로움 때문이랴 豈緣羈旅苦
대궐을 연모하느라 창자가 찢어졌네 戀闕膓欲裂
의주의 물굽이는 오열하며 흐르고 嗚咽龍灣水
대동강에 뜬 달도 빛이 처량하리 凄凉大同月
아득한 행궁은 어드메 있느뇨 行宮杳何處
소식을 전할 길은 전혀 없구나 魚鴈亦難達
어저께 저녁 고을 사람이 전갈하길 昨暮邑人傳
임금 수레가 도성으로 돌아왔다기에 車駕旋故國
근심 중 이렇게 반가운 소식 들으니 憂中聞吉語
황홀한 마음을 형언하기어려워라 惝怳難容說
천심도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는가봐 天心應悔禍
적의 형세가 절로 무너져 움츠리네 賊勢自崩蹙
난세와 치세는 본래 서로 이어지니 否泰本相仍
삼한 땅이 앞으론 평안해지리라 三韓將妥怗
이제부턴 모쪼록 밥이나 많이 먹어 從今但加餐
해골이 산야에 버려짐이나 면해야지 骸骨免塡壑
군자는 이치대로 살아감을 중시하나니 君子貴理遣
곤궁함 속에서도 오히려 자득한다네 窮阨猶自得
범인들은 그저 이해득실만 중시하여 衆人重得喪
심화를 태우며 자신을 들볶아 膏火相煎爍
내 이제 고인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我今師古人
어찌하여 길이 소인마냥 근심하는가 胡爲長戚戚
돈이 생기면 곧바로 술을 사먹고 有錢卽沽酒
미친 노래 불러 울적한 회포나 풀리라 狂歌暢幽鬱
『鵝溪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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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금오랑(金五郞): 의금부의 관리.
216) 이랑(李郞): 필자의 사위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가리킨다.
217) 낙봉(駱峰): 조선조 문신인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호.
218) 진주성(眞珠城): 강원도 삼척(三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