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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숙종

    페이지 정보

    조회 408회

    본문

     

    ○낙산사제영(洛山寺題詠)        숙종어제시(肅宗御製詩) 46)


    상쾌하게 올라 남쪽 낙가봉 바라보니 快登南望洛迦峰

    바람은 구름 걷어 달빛만 짙구나 風捲纖雲月色濃

    관음보살의 원통한 이치 깨닫고 싶은데 欲識圓通大聖理 

    때로는 파랑새 꽃 물고 사람 맞이하러 오는구나 有時靑鳥含花逢


    『江原道誌』


    -----------------

    46) 숙종(1661,현종2~1720,숙종46)의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이고 조선의 제19대 왕(1674~1720 재위)이다. 현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처음 비(妃)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두 번째 비(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8월 즉위했다. 숙종 초기 집권층이었던 남인은 병권의 장악과 서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어,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숙종은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외척을 기용하는 한편 서인을 재등용하고자 했다. 1680년(숙종 6) 복선군(福善君)과 탁남의 영수인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 등이 역모했다는 고변이 있자 이를 계기로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그러나 서인계열은 남인의 숙청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가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남인은 이후 정국을 이끌면서 1694년에는 서인이 인현왕후 복위를 도모하려 했다는 고변을 하고 옥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비한 것을 후회한다는 전지(傳旨)를내려 소론정권을 성립하게 하고 남인의 다수를 명의죄인(名儀罪人)이라 하여 중앙정계에서 몰아냈다. 정국은 서인 내의 노론·소론 사이에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벌어지면서 노론 일당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 었다.

    노론·소론 당쟁의 핵심은 희빈 장씨의 처벌문제 및 장씨 소생의 세자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였다. 숙종은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1717년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이밖에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端宗)으로 묘호를 올렸으며,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던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 으로 하는 등 왕실의 충역관계(忠逆關係)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명분의리론이 크게 성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명의 은공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존명의리와 북벌론의 기치 아래 사회기강을 단속하는 작업이 행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선원록璿源錄』·『大明集禮』 등이 간행되고, 『大典續錄』·『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군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