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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시문

    유자량

    페이지 정보

    조회 422회

    본문

     

    ○ 낙산사제영(洛山寺題詠)        유자량(庾資諒) 50)


    해안의 절벽 높은 곳 海岸高絶處

    그 가운데 낙가봉(洛迦峯)이 있다 中有洛迦峰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묾이 아니고 大聖住無住

    넓은 문은 닫아도 닫음이 아니네 普門封不封

    명주는 내가 탐하는 것 아니라 明珠非我欲 

    청조는 사람을 만났세 靑鳥是人逢 

    다만 원하노니 큰 물결 위에서 但願洪波上 

    만월 같은 관음의 모습 뵙고 싶네 親瞻滿月容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四十四, 江原道 襄陽都護府




    ○ 낙산사(洛山寺)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 51) 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 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이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元)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 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 종[奴]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明宗) 정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四十四, 江原道 襄陽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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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유자량(1150년, 의종4∼1229년,고종16)의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자는 담연(湛然)이다. 16세 때부터 유가(儒 家)의 자제들과 교우하였으나 무인(武人)들과도 교제를 하여,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화를 면하였고, 그와사귀던 사람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대부소경(大府少卿)·병부시랑·형부시랑·대부경(大府卿)·지삼사사(知三 司事)·판대부사재사(判大府司宰事)·태자첨사(太子詹事)·판각문사(判閣門事)·지다방사(知茶房事)를 역임하였고, 고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불교를 신봉하였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고, 헌안왕 2년(858)에 범일(梵日) 선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스님인 익장(益莊)의 기문(記文)에 “양양 동북쪽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자 가량이 되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50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는 자리 한 닢을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바위 위에서 자리를 깔고 배례를 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오히려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바위위로붙들고 나왔다. 관음보살이 곧 바다 속에서 팔을 내밀며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 두 그루의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을 짓고 상설 (像設)을 안배(安排)하라’하였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玉)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하였다.

    우리 태조(고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 가을에 사자를 보내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을 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에 적어서 항규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하여 보물로써전하게 하였다. 계축년(1253)년 원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 성을 쌓아 방어 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의 노비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몽고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자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明宗) 정사년(1197)에 유자량이 병마사가 되어 10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드문 일이라 한다 하였다.

    낙산사의 금당(金堂)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이고 낙산사를 관음도량이라 한다. 또한그 굴을 관음굴이라 하고 홍련암이라 부르는 암자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여 사찰을 크게 중수하고 주위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때 만든 성문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강원도 고을 수에 맞추어 26개의 홍예석을 써서 조영(造營)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낙산사 원통보전 주위의 담장은 기와를 이용하여 쌓은 것으로 불에 구워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비바람에도 흙이 씻겨 내리지 않아 아주 튼튼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담장에는 동그란 돌로 심을 박아 보강을 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별자리를 의미하는 상징성이 있어 이곳이 곧 극락세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봉산은 낙가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관음보살의 상주처인 인도의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에서 연유된 것이다.

    첫 수는 峯, 封 운 둘째 수는 逢, 容의 운자를 썼다. 고려 유자량이 병마가사 되어 관음굴 앞에 이르러 분향재배하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 노래하며 꽃을 두건 위에 떨어뜨렸다. 유자량의 시에 명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청조를 이 사람이 만나 것이라고 노래하며 자신이 관음의 진상을 뵙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51) 중생의 고통의 소리를 보고 구원의 손길을 뻗는 보살이라 하여 관세음(觀世音) 또는 관음(觀音)보살이라 한다. 낙산의 원명은 보타락가산으로, 약해서 낙산이 됐다. 곧 낙산사가 들어선 현장은 관세음보살의 8대성지 가운데 하나로 세계적인 성지다. 고려 스님 익장(益莊)이 써 남긴 낙산사의 유래는 이렇다. 지금 의상대 맞은편 바다를 향한 암굴 속에관세음보살이 사는데 신라의 의상(義湘) 대사가 그 굴 오십 보 앞 바닷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암반에 두 이레를 앉아 관음의 모습을 보고자 기도를 했다. 끝내 드러내지 않자 부덕을 자책,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보살이 용으로 하여금 앞발을 뻗게 해 구하고서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주면서 “내 몸은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있는 곳이 내 정수리이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셔라” 했다. 그렇게지은 절이 낙산사요 수정 염주와 여의주는 사보(寺寶)로 간직해 내려오는 동안 외난과 화재로부터 안전했다. 몽골 침략 때 절의 종이 이 두 보물을 땅에 묻어 보존했다는 것을 끝으로 행방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