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
페이지 정보
본문
○ 동유기(東遊記) 가정(稼亭) 이곡(李穀) 52)
지정(至正) 9년 기 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장차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려고 14일에 송도(松都)를 출발하였다. -중략-
8일에 영랑호(永郞湖)에 배를 띄웠다. 날이 기울어서 끝까지 돌아보지 못하였다.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세음보살)를 참알(參謁)하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이곳에 머문다고 하는데, 산 아래 석벽에 있는 동굴이 바로 관음보 살이 들어가서 머무는 곳이란다. 저녁 늦게 양주(襄州)에 도착해서 묵었다.
그 다음날은 중구일(重九日)인데, 또 비가 와서 누대 위에서 국화 술을 들었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유숙하였는데, 그곳에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다. 11일에 연곡현(連谷縣)에서 묵었다.
12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경포대에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 돌 아궁이) 가 있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에 의해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정자에서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서 재를 넘을 수가 없기 에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숙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역을 지나서 동쪽 산봉우리를 오르는데 길이 매우 험하였다. 등명사(燈明寺)에 도착해서 누대 위에서 일출을 구경하고, 마침내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강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재를 넘어 우계현(羽溪縣)에서 묵었다. 12일에 삼척현(三陟縣)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오십천(五十川)의 팔영(八詠)이라는 것을 마음껏 살펴보고 나와서 교가역(交柯驛)에 이르렀다. 이 역은 현의 치소(治所)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곳에서 15리를 가면 바다를 굽어보는단애 위에 원수대(元帥臺)가 있는데, 또한 절경이었다. 그 위에서 조금 술을 마시고는마침내 역사에 묵었다. 18일에 옥원역(沃原驛)에서 묵었다. 19일에 울진(蔚珍)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렀다.
『稼亭先生文集』 卷之五, 「東遊記」
至正九年己丑之秋. 將遊金剛山. 十四日. 發松都.
初八日. 泛舟永郞湖. 日晚不得窮源. 到洛山寺謁白衣大士. 人言觀音菩薩所住. 山下石崖有竇. 是觀音所入處也. 晚至襄州宿. 明日重九. 又有雨擧菊觴於樓上. 十日. 宿洞山縣. 有觀瀾亭. 十一日. 宿連谷縣. 十二日. 江陵存撫使星山李君侯于鏡浦. 方舟歌舞中流. 日未西. 上鏡浦臺. 臺舊無屋. 近好事者爲亭其上. 有古仙石竈. 盖煎茶具也. 與三日浦相甲乙. 而明遠則過之. 以雨留一日. 出江城觀文殊堂. 人言文殊, 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 東有四仙碑. 爲胡宗旦所沉. 唯龜跌在耳. 飮餞于寒松亭. 亭亦四仙所遊之地. 郡人厭其遊賞者多. 撤去屋. 松亦爲野火所燒. 惟石竈石池二石井在其旁. 亦四仙茶具也. 由亭而南. 有安仁驛. 日已西. 不可踰嶺. 遂留宿. 明日. 早發過驛. 東峯甚險. 至燈明寺觀日出臺. 遂並海而東. 憇于江村. 踰嶺宿羽溪縣. 十二日. 宿三陟縣. 明日. 登西樓. 縱觀所謂五十川八詠者. 出至交柯驛. 驛去 縣治三十里. 於十五里臨海斷崖上有元帥臺. 亦絶景也. 小酌其上. 遂宿驛舍. 十八日. 宿沃原驛. 十九日. 到蔚珍留一日.
『稼亭先生文集』 卷之五
--------------------
52) 이곡(1298,충렬왕24~1351,충정왕3)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아들이색(穡)이고, 백이정(白頤正)·정몽주·우탁(禹倬)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1317년 거자과(擧子科) 에 합격,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332년 원나라에서 정동성 향시(鄕試)에 수석,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했고,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원나라 문사들과 사귀었다. 1334년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가서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등의 벼슬을 거쳤고,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도록 건의했다. 문장이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존경받았다. 가전체 작품 〈죽부인전 竹夫人傳〉과 100여 편의 시가 『東文選』에 전하며 저서로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태평루는 객관 남쪽에 있었다. 16간으로 원나라 인종연우 2년(1315)에 창건 되었고, 경인년에 중창되었다.
파면시켰다 다시 은총을 입어 나랏일을 하며 양양에 들려 태평루에서 이 시를 지었다. 동우는 전성시처럼 강건하다. 백성들은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다. 晋나라 吳隱之가 貪泉이란 시가 있다
옛 사람이 이 샘물을 말하기를 古人云此水
한번 마시면 천금을 생각나게 한다고 하네 一歃懷千金
백이와 숙제에게 이 샘물을 마시게 한다 해도 試使夷齊飮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終當不易心
이 샘물을 마시면 욕심쟁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어진 태수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심회를 표현하였다.
두 번째 시는 태평루의 풍경이 넉넉하여 오가며 찾은 지가 2년이나 되었다. 이곳에서 한가롭게 풍류를 즐기며 눈같이 맑고 시원한 시로 화답하고 싶지만 자신의 문장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며 심회를 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