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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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에 묵으며(宿洛山寺) 교산(蛟山) 허균(許筠) 58)
오봉사를 다시 찾아오니 重尋五峯寺
풍경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네 風景似前年
대숲 길은 오가는 가을 발길 竹逕通秋屐
화대엔 저녁연기일어나네 花臺起夕煙
스님들이 늘어서서 환영하는데 歡迎羅衆衲
멋진 놀이 제천을 밟아가네 勝踐躡諸天
이미 무생인을 깨달았으니 已悟無生忍
숙연히 속된 인연 씻어 버렸다오 蕭然淨俗緣
『惺所覆瓿稿』卷之一 詩部一,楓嶽紀行,宿洛山寺
○ 석주에게 주는 글(與石洲書) 59) 교산(蛟山) 허균(許筠)
서울에 있을 적에 형이 강도(江都)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벼슬 잃음을 위로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문을 나오는 참이었는데, 찾아 온 사환이 편지를 놓고 떠나겠다고 하기에 총망중이라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우물쭈물 결례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집을 떠난 이틀 만에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천학(泉壑)과계산(溪山)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에 못지않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관)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향의(香蟻 술독에 뜬 쌀을 벌레에 비유한 것)가 한창 굼실거리니 형을 초치해다가 큰 술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형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도 성벽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ㆍ하곡(荷谷 허봉(許篈)의 호)의 시가 남아 있어 청초하여 읊을 만했고 또 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자)의 시가 있었으나 바빠서 화운을 하지 못했습니다.
비를 만나 통구(通溝)에서 자고 단발령(斷髮嶺)을 넘어 멀리 1만 2천봉을 바라보니빙 둘러 있는 봉우리들이 서로 읍을 하며 마치 나의 나들이 걸음을 맞이하는 것 같았습니다. 유람하는 흥취가 날듯이 홀가분함을 스스로 금치 못하며 말을 재촉하여 장안사 (長安寺)로 드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었습니다. 중 도관(道觀)이 호남에서 왔는데 그가글을 약간 알기 에 함께 이야기해 보니 매우 밝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에 드니 깎은 듯한 바위는 땅 위로 솟아 삐죽이서 있고, 물은 솟구쳐서 내리고, 단풍은 우거져 하늘 가득 빽빽하였습니다. 15리쯤 가서 영원(靈源)에 당도하여 거기서 묵고, 새벽에 망고대(望高臺)를 향해 가는데, 골짜기는 좁고 벼랑은 깎아지른 듯하여, 쇠줄을 잡고 겨우 올랐습니다. 송라(松蘿) 아래 잠시 쉬고 드디어 만폭동(萬瀑洞)에 들어가 양봉래(楊蓬萊 봉래는 양사언-楊士彦-의 호)의 팔대자(八大字)를 완상하니 필세(筆勢)가 나는 듯 하여 이 산과 더불어 웅(雄)을 다툴 만하였습니다. 돌아오면서 명연(鳴淵)에 닿아 저녁에 표훈사(表訓寺)에서 쉬니, 주승(主僧) 담유(曇裕)가 자리와 상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날이 밝자 진헐대(眞歇臺)에 올라 거기 서 남여(藍輿)를 버리고 걸어서 개심사(開心寺)에 오르니 1만 봉우리가 눈앞에 죽 늘어 있어 그 모습을 이름 하기어려웠습니다. 그높이 솟아 치켜든 것은 마치 그대가 우뚝하게 빼어나 홀로 선 모습 같고, 그 헌걸차고기우뚱한 것은 마치 그대가 취해서 옥산(玉山)이 넘어지는 모습과 같았으니, 이들을 보면서 내 마음을 족히 위로할 수가 있었습니다. 17일 밤에는 정양루(正陽樓) 동쪽에서 달을 구경하였습니다.
원통(圓通)에서 조반을 들고 난 다음, 지름길로 사자봉(獅子峯)으로 질러가 보덕굴(普德窟)에서 묵고는 화룡담(火龍潭)을 거쳐 마하연(摩訶衍)에 닿았습니다. 바람과 물, 삼나
무ㆍ회나무가 밤새도록 부벼대고 너울거려 음향을 내니, 마치 생황과 학이 서늘하게 구름 밖에서 우는 듯 하였습니다.
바로 운흥(雲興)을 거쳐 구정봉(九井峯)에 오르다가 비가 오므로 비로봉(毗盧峯)에는 오르지 못하고 적멸(寂滅)에 당도하여 성문동(星門洞)을 내려다보니, 뭇 골짜기가 층층이 겹쳐 있어 마치 긴 바람이 바다에 파도를 일으켜 놓은 것 같았습니다. 두 중이 말하기 를 ‘이곳에서 박달곶(朴達串)으로 가면 은신대(隱身臺)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하였 습니다. 나는 신발을 준비하고 새벽 기운을 헤치면서 백전(白田)으로부터 꼬부랑길을내려가 5리쯤 가니, 울퉁불퉁한 돌이 한데 모인 곳에 사나운 물줄기가 그 사이로 뿜어대는데, 돌들은 모두 괴수처럼 생겨 그 모습이 마치 서로 치고 있는 듯 하였소. 그래서나는 맨발로 건너왔습니다.
정오에 자월암(紫月庵)에서 쉬니 암자가 내산ㆍ외산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그승경(勝景)을 다 모두어 놓았는데, 대체로 구경꾼들이 오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남쪽 비탈을 구불구불 내려와 불정대(佛頂臺)에 닿았는데, 잠시 후에 바람과 천둥이골짝 안에 일고 큰 구름이 평평하게 깔리며 발 아래로 번갯불이 번쩍이고 쿵쾅거리매 놀라서 내려다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윽고 천둥이 개고 나니, 1천 폭포가 푸른 절벽에 시원하게 내 려, 마치 옥빛 무지개가 다투어 뽐내는 듯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유점(楡店)에 닿으니 정생 두원(鄭生斗源)이 뒤 미쳐 와서 현담(玄談)을나누다가 오경(五更)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쉬고 산을 내려오면서, 백천교(百泉橋)를 거쳐 가섭동(迦葉洞) 쪽으로 길을 잡고 명파(明波)에서 묵었습니다. 대개 삼일포(三日浦)는 옛날에 익히 지나던 터이라 이 때문에 임영(臨瀛)으로 바로 향했으니, 두 번씩 구경하지는 않을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수성(䢘城)에서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를 만났더니, 무척이나기뻐하며 3일을 붙잡아 두더군요. 또 석주(石洲)는 요사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고, 자기가 지은 시문을 모두 꺼내 보여 주었는데 시마다 주옥(珠玉) 같았습니다.
인하여 옛 부임지인 낙산(洛山) 땅을 찾으니, 그 고을의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장작을 가지고 와서 다리를 덥혀 주었고, 태수(太守)가 또 기생과 풍류로 호사를 더해 주니 호연히 안석(安石)의 동산(東山)에서 노닐던 흥이 있었습니다.
말이 절뚝거려 닷새를 머물렀다가 강릉 외가(外家)로 돌아오니, 내가 고향집을 떠난지 벌써 8년이라 풍상을 겪는 서글픈 마음이 배나 더하였습니다. 읍 동쪽에 작은 서당이 있어 학생 5~6명이 문을 닫고 책을 읽고 있으니, 잔생(殘生)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으나, 하늘이 사람의 욕심을 허락해 줄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산(海山)을 크게 구경한 것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만약 형과 함께다녔더라면 그동안에 지은 주옥같은 시가 의당 많았을 것이니, 형이 이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유쾌하게 여기며 또한 크게 한스러워할 것입니다.
벼슬할 뜻은 식은 재(灰)처럼 싸늘해지고, 세상맛은 씀바귀처럼 쓰며, 조용히 사는 즐거움이 벼슬살이보다 나으니, 어찌 내 몸 편함을 버리고 남을 위해 수고하겠소. 오직 벗에 대한 그리움이 내 마음속에 맺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나기어려우니 회포를 다 풀수 없습니다. 가을 기운이 점점 짙어가니 부디 양친(兩親)을 잘 모시고 양지(養志)를 다하기 바랍니다. 편지로는 말을 다 못하고 뜻도 다 적지 못합니다. 다 갖추지 않습니다.
與石洲書
在洛下得兄江都書. 唁僕失官. 此時僕已戒轄出都門. 來价置而告去. 忙不草復脩謝. 逋慢之罪. 安所逃乎. 僕辭家二日. 抵正卿永平潭墅. 泉壑溪山之勝. 不減昔年. 而所恨者. 臺館不起廢耳. 入室. 醇酒滿甕. 香蟻浮浮. 恨不拉吾兄以大白侑之. 聞之. 必流饞涎也. 至今城壁有孤 竹, 荷谷詩. 淸楚可詠. 又有子敏詩. 悤悤不得和矣. 冒雨宿通溝. 踰斷髮嶺. 遙見萬二千峯環峭拱揖. 如迓吾行. 游興翩翩不自禁. 促馬入長安寺. 日已曛矣. 釋道觀自湖南耒. 稍解文與. 語甚適. 明早携入十王百川洞. 巖峭拔地骨立. 水激瀉. 楓栝參天. 行十五里抵靈源宿. 曉向望高臺. 峽束崖斷. 攀鐵絙僅陟. 小憩於松蘿. 遂入萬瀑洞. 翫揚蓬萊八大字. 筆勢飛躍. 可與 此山爭雄. 回至鳴淵. 夕休於表訓寺. 主僧曇裕設蒲供以待. 明登眞歇臺. 去藍. 步躋開心臺. 萬峯森在眼底. 不可名狀. 其峻拔而仰然. 若君之標秀特立. 其隗俄而頹然者. 若君之醉倒玉山. 對此足以慰吾懷也. 是十七夜. 待月於正陽樓東. 朝飯圓通. 取經於獅子峯. 宿普德窟. 歷 火龍潭. 抵摩訶衍. 風泉杉檜. 徹曉磨站作響. 如笙鶴冷冷於雲表. 卽由雲興登九井峯. 以雨 不克上毗盧. 到寂滅下視星門洞. 衆壑嶙峋. 如長立扇. 海, 濤二僧言. 自此下抵朴達串. 可達於隱身臺. 余治蠟屐. 拂曙從白田而下. 繚曲行五里許. 始石叢立. 悍湍濆其中. 石皆作怪獸 狀. 如欲相搏. 赤足躍流而濟. 午息于紫月庵. 庵正據內外山之間. 悉摠其勝. 蓋游人未嘗到 也. 迤從南崖. 到佛頂臺. 少選風雷起於中壑. 大雲平鋪. 脚底電光. 閃閃轔. 愯不可頫眺. 俄 歇則千瀑快垂於靑壁. 若玉虹爭矯然. 昏抵揄岾. 則鄭生斗源踵至. 玄談五更而睡. 留一日下 山. 從百泉橋取途於迦葉洞. 宿于明波. 蓋三日浦. 舊所慣歷. 爲直向臨瀛計. 不復游也. 翌 日. 見崔東皐於䢘城懽甚. 挽二日留. 且問石洲今作何狀. 盡出其詩文以示. 觸目琳琅珠玉也. 因訪洛山舊踐. 則鄕耆宿俱持壼耒煖脚. 太守又以妓樂侈之. 浩然有安石東山之興焉. 以馬蹇 留五日. 歸江陵外家枌楡. 僕不修謁已八年. 霜露之愴倍切矣. 邑東有小塾. 與學子五六人閉 戶讀書. 欲了殘年. 未知天從人欲否. 海山壯游. 大略如斯. 當時若同吾兄. 則奚囊所收珠璧當富. 兄聞之. 必大愉快. 亦大恨嘅也. 宦情灰冷. 世味茶苦. 靜處之樂. 甚於軒裳. 豈肯捨我 所便而爲人役役耶. 唯是停雲之念. 結於中情. 地遠難聚. 懷不能遺. 秋候漸沍. 幸好侍二萱親. 以畢養志. 書不盡言. 言不盡意. 不備.
『惺所覆瓿稿』卷之九 文部六, 書
○ 낙산기유로 암 노석에게 주며(洛山記遊贈嵒老釋) 교산(蛟山) 허균(許筠)
설악산 높은 창공에 꽂혔으니 雪嶽之山高揷空
많은 옥이 다투어 푸른 노을 중에 솟았네 萬玉爭聳靑霞中
한줄기 꿈틀거려 오봉을 지어내니 蜿蜒一脈作五峯
바닷가에 금빛 연꽃 봉우리 우뚝이 빼어났네 海上秀出金芙蓉
영도(주역의 팔괘) 암암리에 낙산사와 어울려라 靈圖暗與寶陁合
그윽한 동굴은 예부터 원통이 장엄하네 幽窟自古莊圓通
용천팔부 시종들이 베풀며 법을 따르니 龍天八部設法從
백호(白毫)는 빛을 내어 동쪽 바다 비추네 白毫光照滄溟東
금산의 늙은 스님은 부처님의 후신이라 金山丈老佛後身
석장 짚고 여기 와서 이궁을 얻었다네 一錫來瞰得異宮
관음보살의 진상으로 나타나서 白衣大士現眞相
여의주 내려주어 지난 업보 없앴다네 投下摩尼除宿障
부처님께 바쳐 대가 땅에 솟아나니 旃檀貢玉竹湧地
쩗은 시간에 절을 구름 밖에 세워졌네 頃刻花宮雲外創
채색 노을 창에 비쳐 벽에 어린 붉은 색깔 彩霞射牖丹寫壁
나는 듯 솟은 누각 빽빽이 마주보네 飛樓聳閣森相向
일곱 겹의 구슬발이 주전을 가리우고 七重珠網鎖珠殿
세 발 달린 금오가 금방으로 날아들어 三足金烏翥金牓
향화에 정근한 지 자그마치 일천 년이라 精勤香火一千年
장엄한 그 공덕 진실로 끝이 없네 功德莊嚴信無量
어느 해에 임금께서 자해를 순행했나 何年淸蹕慈海巡
암자마다 연이어 채장을 옮기었네 嵒竇聯翩移彩仗
임금께서 만월의 용모를 알아보니 重瞳親識滿月容
법뢰는 소리 흘려 공악이 울렸어라 法雷流音空樂響
새는 꽃비 머금어 천의에 떨어지고 鳥銜花雨墮天衣
용은 향운을 뱉어 어장을 감쌌다오 龍吐香雲籠御帳
그 향운 그 꽃비가 공중으로 사라지니 香雲花雨入空去
임금 행차 아득아득 물을 곳 없네그려 縹緲宸遊問無處
산문의 성사가 이보다 더할쏜가 山門盛事此最雄
노승들 이야기지금도 들려주네 只今猶聞老僧語
내가 온 때 바야흐로 팔월달 맑은 가을 我來正値淸秋節
죽장에 짚신 신고 숲 속을 걸어가네 竹杖芒鞋步林樾
바다에 부는 천풍 산악을 뒤흔들어 天風吹海動雲根
바라보니 놀란 파도 불골에 침노하네 笑看驚濤侵佛骨
이화정 가에서 달 뜨기를 기다리니 梨花亭畔待初月
옥바퀴 돌아돌아 하늘로 떠오르네 玉輪輾出琉璃滑
계수나무 그림자 금계를 뒤덮으니 千巖變作瓊瑤窟
선들선들 마치도 바람탄 열자인 듯 冷然似馭列子風
황학의 등에 올라 부구를 붙들고자 欲挹浮丘跨黃鶴
함께 간 풍류승이 티끌 생각 벗어나니 同遊韻釋出塵想
총채를 휘두르며 선 이야기 싫지 않아 揮麈談禪也不惡
법라의 혀끝으로 인천을 다 흔드니 人天掉盡法螺舌
부생이란 주착이 없다는 걸 깨달았네 頓覺浮生無住著
사리가 재촉하여 오경종을 두들기니 闍梨催打五更鍾
새벽녘 동쪽 방에 비단발을 걷는구나 曉上東房褰綉箔
둘러싼 향기 구름 양곡을 가렸는데 繚繞香雲掩晹谷
고래가 화주 끌고 푸른 하늘 날아가네 鯨引火珠騰碧落
문을 닫고 향 피우니 일 만 생각 맑아져서 焚香閉閣萬慮淸
부처님 설법하신 미타경을 다 읽었네 讀盡佛說彌陀經
미진을 건너갈 보벌도 빌렸어라 迷津已借寶筏渡
각로에서 다시 또 금승을 찾아가네 覺路更覓金繩行
이 몸은 황홀하게 극락 땅에 와 있는데 恍然身在極樂土
묘오에 어찌 꼭 명성을 봐야 하나 妙悟何必看明星
내 한평생 발걸음 모두 길을 잃었는데 平生投足摠失路
무슨 일로 하늘이 이 구경 막지 않지 何事玆遊天不阻
원컨대 이 몸을 유마에 기탁하여 願將身世寄維摩
우리 스님 짝을 삼아 부처님께 참여하리 長伴吾師參佛祖
언젠간 벼슬 놓고 행각을 머물리니 投簪他日住行脚
청련의 한 탑 자릴 나에게 허해주네 一榻容我靑蓮宇
『惺所覆瓿稿』卷之二, 附錄 蛟山憶記詩
○ 양양의 이명부를 배알하러 가는 양비로를 보내면서 이어 뜻을 붙임(送楊毗盧謁襄 陽 李明府因以寄意)
교산(蛟山) 허균(許筠)
사군님 일이 없어 중관을 닫았으니 使君無事掩重關
빈 뜰에 형구(形具)가 한가함을 짐작하리 見空庭木索閑
천리라 옛 친구는 아직도 적막한데 千里故人猶寂寞
일 년의 봄 흥치는 하마야 늦었구려 一年春興已闌珊
형용은 쇠약해라 시름 가운데 늙고 形容潦倒愁中老
향국은 분명히도 꿈속에 돌아가네 鄕國分明夢裏還
나그네 신세로 더구나 손 보내니 爲客不堪兼送客
배꽃이 활짝 핀 낙가산을 배신했네 梨花辜負洛迦山
황당이라 고요한 낮 옥사가 울리는데 黃堂晝靜玉絲鳴
웃음으로 평번하여 정무는 이뤄졌네 博笑平反政已成
바다의 장기(瘴氣)는 지난 꿈을 깨고 瓊海瘴煙醒昨夢
육혼의 산수는 그윽한 정 알맞구만 陸渾山水愜幽情
마을 연한 도리에는 동풍이 따사롭고 連村桃李條風暖
성곽 두른 상마에는 곡우가 개었구려 繞郭桑麻穀雨晴
그 누가 생각하리 옛날 말탄 나그네가 誰念舊時騎馬客
이 한 봄 허송하여 습지에도 못 가는 걸 一春虛擲習池行
등불이 나부끼어 병초가 어둑해라 釭飄蘭燼暗屛蕉
바람 장막 향기어리고 밤은 적막하구나 風幔凝香夜寂寥
봄빛은 성에 가득 꽃이 만발하였건만 春色滿城花正發
객의 시름 바다 같아 술로도 풀지 못해 客愁如海酒難消
도원의 송죽은 삼경이 묵었는데 陶園松竹荒三逕
반현의 현가는 구소가 격했구려 潘縣絃歌隔九霄
현산의 반마하던 그곳을 추억하니 仍憶峴山盤馬地
붉은 난간 다리 밖에 천 가지 능수버들 赤欄橋外柳千條
적막한 빈 집에 병 앓고 누워 空齋寂寞抱沈痾
남당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릴 듣네 臥聽南塘一部蛙
비 맞은 해당화는 붉은 비단 찬란하고 經雨海棠紅錦爛
바람맞은 강버들은 푸른 실이 비꼈구나 受風江柳翠絲斜
비환은 꿈에 들어 애가 끊기려 하고 悲歡入夢腸堪斷
이별은 마음 놀라라 귀밑머리 희어지네 離別驚心鬢易華
생각건대 대제엔 봄빛이 무르익어 遙想大堤春色老
새로 불은 벽계에 복사꽃이 떴으리라 碧溪新漲泛桃花
『惺所覆瓿稿』卷之二, 附錄 교산억기시
○ 절구(絶句) 교산(蛟山) 허균(許筠)
이설당 가운데 비단 장막 나지막하고 梨雪堂中錦幕低
석양이 막 화란의 서쪽으로 내려가네 夕陽初下畵欄西
오는 이 없이 문 닫아 적적도 한데 閑門寂寂無人到
다만 산새만이 마음껏 울어대노라 只有山禽盡意啼
경함이 십년 만에 선관을 작별하고 經函十齋別禪關
삼월 명주에서 귀밑머리 희끗희끗 하구나 三月溟洲鬢已斑
해당화 다 떨어져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고 落盡海棠行不得
밤만 되면 꿈에 오봉산을 찾는다오 夜來歸夢五峰山
홍농의 제자들은 사화가 풍부해 弘農才子富詞華
개인 날 남전에 고운 노을 일었네 晴日藍田壁絢霞
서창 향해 좋게 취한 꿈 되새기니 好向西窓拚醉夢
이백의 큰 붓은 단정하게 꽃 피우리 謫仙椽筆定生花
단양의 시객이 동파를 배웠고 丹陽詩客學東坡
은황을 내리쏟아 세상이 자랑하네 屈注銀湟世共誇
반산의 두보처럼 바짝 여위려 말고 莫似飯山成杜瘦
규합 좇아 명하나 지어보소 好從閨閤賦明河
일찍이 개원 시격을 공부하여 早向開元着力多
사구 지으면 음갱 하손보다 절묘했지 發爲詞句妙陰何
그 누가 알리오 강서사로 타락하여 誰知晩墮江西社
큰 바다 고래를 못 끌어 올릴 줄이야 未掣鯨魚碧海波
점필재 김종직 두 소릉에 가깝지만 佔畢金公逼杜陵
백년 구학에 등굴만 얽혔구나 百年丘壑蔓寒藤
유편의 남은 향기지금도 싱그러워 遺篇媵馥今追丏
구옥같은 그 문장 그 누가 계승하리 玉佩瓊琚嗣未能
손곡이 시를 읊어 머리가 희었고 蓀谷吟詩到白頭
백 편의 시 화려함이 수주에 가깝구나 百篇穠麗近隨州
지금 사람 육안으로 아무리 비웃지만 今人肉眼雖嗤點
만고에 흐르는 강하를 어찌 폐하리오 豈廢江河萬古流
비로가 북으로 가 양양을 배알하니 毘盧北去謁襄陽
말달림 도리어 술취한 갈강 같네 馳馬還同醉葛彊
응당 이화정 달을 구경하면서 應踏梨花亭畔月
벽해의 옹달샘처럼 바라보며 잔 들리라 盃看碧海倒瓊腸
『惺所覆瓿稿』 附錄
○ 가는 길에 낙산을 바라보며(道中望洛山) 교산(蛟山) 허균(許筠)
향로봉에 흩어져서 족운반이 지어지니 香纑散作族雲盤
푸른 빛 쌓인 사이 채색 우리 노상 밝네 彩暈長明積翠間
낙산사를 물어 하룻밤 자자 하니 欲問洛迦禪寺宿
길 가는 사람 멀리 오봉산을 가리키네 行人遙指五峰山
『惺所覆瓿稿卷』卷之一, 詩部
○ 중수 동해용왕묘비(重修東海龍王廟碑) 교산(蛟山) 허균(許筠)
만력 갑진년(선조37, 1604) 7월 양양부 동산(洞山)에 사는 어부 지익복(池益福)이 배를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一晝夜)를 달려 동쪽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왕국으로 데리고 갔다. 왕궁에 나아가니 정원에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 천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 어 이곳에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하여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으므로 너의 힘을 빌어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 땅 내 집에 돌아 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 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되어 동해 가에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향임(鄕任) 이석림(李碩霖)에게 말하여 관에 보고하게 하였다.
부사 홍여성(洪汝成)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전고(典故)를 들어 상고해 보니 가정(嘉靖-명 세종 연호) 병신년(중종31년)에 사당이 강릉부 정동촌에서 이곳으로 옮겨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귀신의 말을 인용하지 못하고 폐해기많다는 이유로 옛 문서를 돌려주기를 방백(方伯)에게 청하였으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해 을사년(선조38년, 1605) 7월 관동지방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안변, 통천에서부터 남쪽으로 안동까지 수십 군이 혹독한 수해를 입어 백성과 가축 죽은 수효는 수만에 이르렀는데 강릉이 특히 심하였다. 부사 홍공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여 지방 관리와 백성을 불러 의논하기를
“귀신이 사당을 옮기 지 않으면 해를 내린다고 우리에게 경고한지 1년 만에 수해가 이지경이니 이는 과연 그 징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의 힘으로는 옮길 수 없으나 그 사당을 보니 퇴락하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지 않고 있다. 어찌 우리가 서로 이를 새롭게단장하여 우리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의 할 일을 수행하고 정성으로 받든다면 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드디어 녹봉을 떼 내어 공장이와 인부를 모아 향임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여 기와를 갈고 벽을 바르고 담장을 둘러쌓고 신문(神門)을 만들고 마당 고르는 일을 두어 달 만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이 몸소 제사를 지내니 이때부터 양양이 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글을 청하기에 나는
“우리나라는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지리의 중앙을 가려 설치하였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이며 더욱이 고을 한가운데가 상개(爽塏-앞이 탁 트여 밝은 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정동이라 이름하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제사지냈다. 그런데 공희왕(恭僖王-중종) 때 강릉부 사람으로 장원급제한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光)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든다고 하여 방백에게 말하여 상께 글을 올리고 까닭없이 옮겨버렸다. 근래 편찬한 여지서(輿地書)에는 ‘동해 용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평안히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니 귀신의 노여움도 당연하다 하겠다. 언광형제의 몰락도 이것 때문일 것이며 을사년 바람과 비의 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신이 사람에게 밝게 고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하기 때문이다. 부사의 사당 개수는 예에 들어맞는 처사이니 어찌 그를 덮어 둘 것인가”하고 갖추어 기록하고 이에 송(頌) 을 드린다.
바다는 천지간에 海於天地
가장 큰 것이다 爲物甚鉅
그 누가 왕이 되어 孰王其中
바람 불고 비 오게 하는가 以風以雨
강하고 강한 용왕신이라 矯矯龍神
하늘의 용은 이것 같음이 없네 天用莫如
복 내리고 화 내림에 降福降沕
신령스러운 응보 매우 진실하네 靈應孔孚
그 누가 그 곳 낮은 데에 疇就其庳
내 집 옮기게 하였는가 俾徒我宇
적은 비용 아끼니 惜其小費
신의 노여움 마땅하네 宣神之怒
귀신이 계신 곳은 神之所都
조개집 구슬 궁궐이네 貝闕珠宮
세상의 오두막집 俗之陬居
뭐라 연연하여 섭섭해 하겠는가 奚戀以恫
아니로다 정성은 不然誠敬
신의 흠향하시리라 神所享者
불경한 자가 방자하고 不敬者慢
불선하면 게으른 법 不誠則隋
땅을 쓸고 물 떠 놓아도 掃地酌水
정성껏 공경하면 강림하리 誠敬則臨
좋은 자리 좋은 음식 차려 놓아도 玉寢瓊饔
방자하면 흠향하지 않는다네 慢則不欽
옮겨 놓고 더럽힘은 移以汚之
게으르고 방자한 일 卽隋則慢
어찌 제수의 많고 적음에 豈以豊殺
기뻐하고 탄식할까 而爲忻歡
알려줘도 안 따르니 告以不從
홍수피해 마땅하네 宜水之洪
온화한 원님이 溫溫邦侯
공경으로 신 받드리 事新以恭
새로 사당 단장하고 乃新其構
제수차려 제 올리오 乃腆其饗
신이 돌아보고 기뻐하여 神顧以喜
바람같이 와 흠향하네 風來悽愴
공경을 다 하여 정성껏 받든다면 克敬克誠
어찌하여 강릉, 양양 가리겠는가 奚擇江襄
원컨대 이곳이 길이 진정하시어 顧此永鎭
해마다 풍년들게 도와주시오 資歲禳禳
백성들 상하지 않으며 民無札傷
전란이 미치지 못하게 하오 五兵不入
길이길이 만년토록 於萬斯年
우리 고을 도와주소서 祐我獘邑
『惺所覆瓿稿』 附錄
○ 가는 길에 낙산을 바라보며(道中望洛山) 교산(蛟山) 허균(許筠)
향로봉에 흩어져서 족운반이 지어지니 香纑散作族雲盤
푸른 빛 쌓인 사이 채색 우리 노상 밝네 彩暈長明積翠間
낙산사를 물어 하룻밤 자자 하니 欲問洛迦禪寺宿
길 가는 사람 멀리 오봉산을 가리키네 行人遙指五峰山
『惺所覆瓿稿卷』卷之一, 詩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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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허균(1569년 선조 2-1618, 광해군10)의 본관이 陽川이고, 자는 端甫, 호는 蛟山, 惺叟, 惺惺翁, 白月居士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허엽은 문장가로서 文名이 높았으며 大司 諫․承旨․副提學․大司成․大司憲․吏曺參議․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강한 성격과 그리고 명나라 進賀使가 되어 皇太子의 冊封을 祝賀하는 외교가로서 그리고 당쟁시대 중심인물이었다.
草堂의 前妻는 韓叔昌의 女로 큰 누이는 朴舜元에게, 次女는 禹性傳(문과급제,대사성에 이르렀고, 임란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움)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伯兄 筬 이 있고, 후처인 金光轍(예조참판)의 女는강릉김씨로 仲兄 篈과 작은누이 蘭雪軒 그리고 筠은 후처소생이다. 이처럼 균은 후처소생으로 가정 내에서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정신적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그가 가정 내의 정실과 서얼문제에 관심을 갖고 소설로 형상화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草堂의 前妻는 韓叔昌의 女로 큰 누이는 朴舜元에게, 次女는 禹性傳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伯兄 筬 이있고, 후처인 金光轍(예조참판)의 女는 강릉김씨로 仲兄 篈과 작은누이 蘭雪軒 그리고 筠은 후처소생이다.
9세(1577)에 부친을 따라 건천동에서 庠谷(明禮坊)으로 이사 하였다. 『於干野譚』에 의하면 총명하고 영특 하여 9세(1578, 선조 11)에 능히 作詩하였다.
교산 허균은 황해도 도사, 성균관 전적, 수안군수, 공주목사, 삼척부사, 형조참의 추천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형조판서, 좌참찬 등을 엮임 했으나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홍길동전과 문집 성소부부고 등이 있다.
25세(1593년, 선조26) 낙산사에서 두보의 시를 공부하였다. 허균은 낙산사에서 임진왜란 중에 아내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학문정진에 힘써 26세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낙산사는 푸른 동해를 접하고 있고,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글을 읽으며 당쟁과 불합리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자신의 이상을정립한 곳이다. 청정하고 원대한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상적 근원과 철학을 정립한 곳으로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
허균은 벼슬길에서 잦은 파직과 유배를 당하면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다. 조선조에 허균만큼 영옥의 삶을산 사람도 없다. 이러한 삶속에서 교산은 불가의 세계를 좋아하여 불서와 불교사상을 심취해 있었다. 낙산 사를 찾아 당대의 고승들과 교류하며 자신세계를 넓혀 왔다. 이 시는 낙산사를 찾아 묵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세속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된 인연이 멀어짐을 아쉬워하며 노래하였다.
59) 석주에게 준 서찰에 의하면 옛 부임지인 낙산(洛山) 땅을 찾으니, 그 고을의 노인들이 모두 술병과 장작을 가지고 와서 다리를 덥혀 주었고, 태수(太守)가 또 기생과 풍류로 호사를 더해 주니 호연히 안석(安石)의동산(東山)에서 노닐던 흥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파직되어 산수를 유람하던 허균에게 양양인의 변하지 않는 의리와 여유 있고 아름다운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허균과 양양, 그리고 낙산사는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