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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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에 있는 관음보살의 복장을 보수한 데 대한 문 병송. 최 상국을 대신해서 지음. 최상국은 지금의 진양후다
(洛山觀音腹藏修補文 幷頌代崔相國行,今晉陽侯也)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
운운. 넓게 생각하니 동해 변 낙산 가에 한 승지(勝地)가 있는데 청정하여 티끌 한점 없으니, 수월(水月 물속에 비친 달)의 청수한 실상이 이곳에 의탁하였다. 아, 저 완악한 오랑캐는 무지막심하도다. 모름지기그들이 횡행하며 노략질할 적에 심지어 절의불상까지도 훼손을 입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우리 대성(大聖)의 존구(尊軀)도 또한 그러하여 비록 형체는 겨우 보존되었으나 복중(腹中)의 진장(珍藏)은 모두 수탈당하거 나흩어져서 텅 비었다.
지인(至人)의 경계는 본래 영허(盈虛)ㆍ소식(消息)의 이치가 없는데, 금강(金剛)의 진체(眞體)에 어찌 훼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범부(凡夫)의 보는 바에 있어서는 어찌 상심이 되지 않으랴. 하물며 제자(弟子)로서는 경앙하는 마음이 전부터 간절하였었는데, 이제 복중의 진장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남보다 배나 가슴 아프게 여기고 동시에
용감히 보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전일의 소장된 것을 참작하여 삼가 심원경(心 圓鏡) 2개와 오향(五香)ㆍ오약(五藥)ㆍ색사(色絲)ㆍ금낭(錦囊)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추어 복중을 채워서 완전히 복구하여 예전 것과 손색이 없게 하였으니, 바라던 바에 무슨문제될 게 있겠는가. 운운.
제자는 머리를 조아리고 이마를 두드리며 이어 단송(短頌)으로 다음과 같이 찬(贊)한 다.
마침내 헐어버리지 못할 것은 究竟不毀
금강의 진신이다 金剛眞身
그 밖의 상설이야 外之像設
이루고 허는 일은 사람 成毀由人
사람이 똑같지 않은데 人非一類
공경하거나 업신여기네 或敬或侮
저들은 업신여겨 손상하고 彼侮而殘
나는 공경하여 보수하네 我敬而補 저
이지러진 달과 같아 如月斯缺
얼마 안 가서 다시 둥글었네 未幾復全
모든 사녀(士女)들은 凡百士女
한 마음으로 가라 一心歸處
洛山觀音腹藏修補文 幷頌代崔相國行,今晉陽侯也
云云. 洪惟東海之濱洛山之上. 有一勝境. 淸淨無塵. 水月睟相. 於是乎寄焉. 嗟乎. 憬彼頑戎. 無知莫甚. 方其橫行冠掠也. 至於佛宇梵相. 無不被其殘毀者. 我大聖尊軀亦爾. 雖形體僅存. 而腹中之珍藏. 盡爲搜露散頓. 枵然其空矣. 且至人境界. 本絶盈虛消息之理. 則金剛眞體. 寧且有毀滅耶. 然在凡夫所覩. 得不愴然傷心哉. 況如弟子者. 仰止之心. 自昔滋切. 乃今聞腹藏潰散之事. 能不倍痛於人. 而勇爲之補理耶. 是用挨舊所藏. 謹備心圓鏡二事及五香 五藥色絲錦囊等衆緣. 以充其服. 完而復之. 與昔無損. 庸何傷乎. 所願者云云. 弟子頓首扣 顤. 仍以短頌贊之云.
究竟不毀. 金剛眞身. 外之像設. 成毀由人. 人非一類. 或敬或侮. 彼侮而殘. 我敬而補. 如月斯缺. 未幾復全. 凡百士女. 一心歸虔.
『東國李相國全集』卷第二十五, 雜著
○ 봉명사신으로 관동(關東)에 가는 전 우군(全右軍)을 전송하는 서(送全右軍奉使關東序)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 60)
내가 들으니 산수가 기절하고 수려한 것은 관동(關東)이 제일이다. 이를테면 금란(金 蘭)의 총석(叢石)과 단혈(丹穴),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 익령(翼嶺)의 낙산(洛山)이야말로 비록 봉래(蓬萊) 방장(方丈)을 보지 못했지만 능히 이보다 낫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고들 하네. 나는 일찍이 만일 한 번 보게 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세상 일로 헤매고 천리 길이 멀고멀어 속절없이 동쪽만 바라보며 서글퍼 할 따름이오.
지금 그대가 용절(龍節)에 의지해 황화(皇華)를 빛내며 경장(輕裝)을 떨치고 가며 잘달리는 말위에 앉아서 마치 양쪽 겨드랑에 날개가 돋치어 천지의 밖으로 날아가는 것같이 가니, 사람으로 하여금 그지없이 부럽게만 하오. 높은 곳에 올라 옷소매를 잡고손수 술잔을 들어 전송을 하지만, 이 이별이 오래가지 않을 텐데 어찌 반드시 눈물 콧물을 많이 흘려야만 하겠는가.
상상하건대 그대는 산 하나 물 하나를 만날 때마다 나를 생각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만약 맑은 물과 붉고 푸른 봉우리를 편지에 봉함하여 부쳐 주지 못한다면, 오히려 시를 써서 수습하여 바람 편에 보내어 동해의 산수가 나의 눈앞에 삼삼하게 하면 그로써 만족 하겠네 어찌 반드시 직접 구경해야만 되는 것이겠는가. 여러 사람이 시를 지었 으니, 나는 서를 써서 첫머리에 싣다.
予聞山水之奇秀. 關東爲最. 若金蘭之叢石丹穴. 高城之三日浦. 翼嶺之洛山. 則雖未覩蓬萊方丈. 想不能過此也. 僕甞以爲苟得一見. 雖死無恨. 但塵驂未鞭. 千里悠然. 空悒悒東望而已. 今足下杖 龍節耀皇華. 振輕裝而言邁. 跨逸駕之如飛. 軒軒. 若傅翰兩腋. 飛出六合之外. 而令人歆豔之不已也. 登高挹袖. 手酌送行. 此別不久. 何必多淫涕耶. 想足下每遇一山一水. 不得不思我也. 如不能緘 淸漪封紫翠以寄之. 尙可詩以收拾. 因風有寄. 使東海山水. 森列我眼界足矣. 何必親賞也. 群子賦詩. 予以序冠之.
『東文選』卷之八十三, 序, 送全右軍奉使關東序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치사 유공 묘지명(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庚公墓誌銘)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
예로부터 사대부들을 보면, 처음에는 일찍이 염치로 조심하여 가득 차지는 않을까 주의하지 않는 이가 없다. 부하고 귀한 데에 처하게 되면 대체로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태연히 물러갈 줄을 모르는 자가 많았는데, 우리 복야부군(僕射府君)은이와 아주 달랐다. 나이 64세에 이미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니, 거기서 3정승까지 가는 데에 몇 등급이 있는데 그 지위를 밟지 않았는가. 이보다 앞서 6년 전에 물러났으니, 은총이 넘치는 것을 피하여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전에 벌써 최고 지위에 이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주역』에 이르기를 진퇴존망을 알아서 그 바른 것을 잃지 않았다.
유씨(庾氏)는 근원이 금성(錦城)의 무송(茂松)에서 나왔으며, 문벌에 있어서 갑족(甲族)이 되는데, 공은 그 출신이다. 공의 휘(諱)는 자량(資諒)이요, 자는 담연(湛然)이다. 증조부의 휘는 모씨인데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였으며, 조부의 휘는 모씨인데 검교태자 태사(檢校太子太師)였다. 아버지 모씨는 종묘에 배향한 공신으로, 문하시중수문전대학사판이부사증공숙공(門下侍中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贈恭肅公)이며, 어머니 장씨(張 氏)는 상의봉어(尙衣奉御) 휘 찬(贊)의 딸로, 이것이 공의 세계(世系)이다. 공은 사람됨이 중화(中和)하고 순수하며 장중하고 말이 적은데, 어질고 미더운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며, 청렴하고 검소한 것은 세상을 다스릴만하니, 이것이 공의 타고난 천품이다. 의묘(毅廟 의종) 때에 이르러 문신(山東 즉 동반의 의미)들이 점점 성하였는데, 공의 나이 16세에 귀한 가문의 자제들과 더불어 언약하여 친교간이 되었다.
공이 무관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있는 오광척(吳光陟), 이광정(李光挺) 등을 끌어들여 참여시키려 하자, 여러 사람들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공이 특히 나서서 의논하기를, “비록 사사로이 노는 중에도 문ㆍ무가 구비하면 역시 잘 될 것이지,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후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얼마 안가서 경인년의 난리가 일어 나고 문신들이 거의 탕진(湯盡)되었는데, 무릇 그들과 친교가 있는 사람은 모두 화를면하니, 이것은 오(吳)ㆍ가(李) 두 장수가 구하느라고 많이 힘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이 젊어서부터 벌써 기미를 아는 도량이 있었다.
나이 들자 재상의 아들이라 하여 바로 수궁서 승(守宮署丞)에 보직되었으며, 마침내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전근되었다. 좀 있다가 나가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었으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사리와 대체를 잘 알아 적발하기를 귀신 같이 하니, 한 지방에서 이름이 났는데 이는 공이 처음 고을을 다스린 것이다. 여러 번 역임하여 어사 상의봉어시어사 호부낭중 어사잡단(御史尙衣奉御侍御史戶部郞中御史雜端)이 되었으며, 사금자 대부소경(賜金紫大府少卿)으로 병 형부 시랑ㆍ대부경ㆍ지삼사사(知三司事)ㆍ판대부사재사(判大府司宰事)ㆍ태자첨사(太子簷事)ㆍ판합문(判閤門)ㆍ지다방사(知茶房事)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관직 등급은 모두 정의대부(正議大夫)였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관직 등급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니, 이것은 공의 역임한 관직 차례이다. 동남쪽 지역을 염문 안찰하고, 동북쪽 지역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에는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짐과 미더움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니. 이 때문에 공이 사명을 받들어 나가서도 칭찬을 들었다.
대개 정 3품의 작위는, 들어가서 정승이 될 수 있는 자리이지만, 공이 판사재(判司宰) 로 있을 때에는 도리어 지방관이 되기를 간절히 청원하였으며, 호부상서로 나가 남경유수(南京留守)가 되었으니, 이것은 공이 가득 차는 것을 사양하고 꺼려서이다. 공은 항상 선군사(選軍使)로 군정(軍政)을 시행하였는데, 청사 위의 기울어진 기둥이 저절로 일어서니, 당시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떠들어 전하였는데, 이것이 공의 공평무사에서 얻어진 일이다.
관동 지방에 장수가 되어 갔을 때에는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관음보살에게 예하였 는데, 좀 있다가 두 마리의 푸른 새가 꽃을 물어다 옷 위에 떨어뜨렸으며 또 바닷물 한움큼 쯤 솟아올라서 그의 이마를 적셨다. 세상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이 곳에 푸른 새가 있는데 부처에게 배알하는 자로서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하니, 이것은 공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미더움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숭경(崇慶) 2년 계유(강종 (康宗) 2년)에 연로함으로 하여 퇴직 청원하기를 매우 간곡히 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 하여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로 사면하고 집에 있게 되었다.
당시 경상(卿相)들 중 퇴직하고 편안히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기 로회(耆老會)를 만들어서 때로는 혹 술자리를 만들어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는데 태평하게 놀며 성품을 수양한지 17년이니, 이것이 공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내던 낙이었다. 기축년 8월 7일에, 기로회에 나가서 조용히 잔치하여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음날 정오 때에는문득 팔계문(八戒文 불교의 8개조 계문)을 열람하였으며, 밤에는 세수 목욕하고 편하게 취침하였다. 아침이 되자 집안사람을 불러 시간을 묻고서는 홀연히 저승으로 가니, 향년 80세인데, 이것이 공의 마지막이다. 이에 앞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어말하기를. “죽어서 한 곳에 가니 궁전 누각이 매우 장엄한데, 지키는 자가 있다가 말하기 기를, ‘여 는 유복야(庾僕射)가 올 곳이다.’ 하였다.” 하였다. 그 말이 비록 황당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공의 행적이 이미 부끄러울 것이 없고, 그 세상을 떠남이 이러하였은즉, 그 말도 역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공이 선한 곳에서 살아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좌승선(左承宣) 김씨 휘 존중(存中)의 딸에 장가들었는데, 3남 2녀가 있었다.
장자 모(某)는 국학학유(國學學諭)가 되었다가 일찍 죽었으며, 차자 모는 지금 판대복사 지어사대사 보문각직학사 지제고(判大僕事知御史臺事寶文閣直學士知制誥)가 되었으며, 계자(季子) 모는 내시의 모 관이 되었는데, 역시 공보다 앞서 죽었다. 장녀는 모 관모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계녀는 모 관 모에게 시집갔다가 지금 과부로 있다. 장사를 지내려면 지대(知臺) 군이 공의 행적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문을 청탁하니, 내가 글을 받들고 울며 또 말하기를, “아, 옛날에 남긴 정직한 이여, 내가 다시 공과 같은 인인 군자(仁人君子)를 볼 수 없게 되었도다. 명문을 감히 사양할 것이랴.” 하고, 드디어 명문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드러나게 진실한 대신이여 顯允端揆
이 나라의 기강이었네 惟邦之紀
백성들은 마음으로 공을 우러렀는데 民方注心
공은 문득 지위를 버렸네 遽釋其位
지위가 지극한데 이르지 않음은 位不至極
공 스스로 피하신 것이라네 公所自避
공은 스스로 피하였지만 公則自避
사람들은 부족하게 생각하였네 人歉其意
머릿털 누렇게 오래 사시는 일 黃髮壽考
공은 원하지 않았네 公所不蘄
공은 원하지 않았지만 公雖不蘄
하늘이 진실로 도우셨네 天固相之
정직한 마음 신을 감동시켜 正直感神
기울어진 기둥서고 새가 날아드니 柱立鳥馴
공에게는 보통이지만 於公爲常
사람들 보기 에야 이상한 일 아닌가 怪者維人
아 嗚呼
옛 덕 있는 이 가고 마니 舊德云亡
세상의 모범 뉘게서 찾으리 模範疇倚
저 산은 높고 높은데 有山巖巖
물 흘러 그 아래로 감도니 水灌其趾
이곳이 공의 계신 곳 是公之宮
서기가 감도는구나 吉祥止止
돌에 새겨 광 속에 넣으니 鑱石納竁
만년토록 밝아 있으리라 眉目萬祀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 銘
觀自古士大夫. 其始未甞不以廉恥操心滿盈爲 戒. 而及富貴方酣. 率翫惜日月. 恬不知退者多矣. 我僕射府君大異於是. 年六十有四. 已登端揆. 則 其去台鉉能有幾級. 而未踐其地耶.
但先六載引 退. 求避溢寵耳. 不然久已升極秩. 而猶有餘矣. 此 易所謂知進退存亡. 不失其正者歟. 庾氏源于錦 城之茂松. 在版籍爲甲. 而公其出也. 公諱資諒字 湛然. 曾祖諱某. 皇 檢校太子詹事. 祖諱某. 皇檢校太子太師. 考諱某. 皇配某廟功臣門下侍中修文 殿大學士判 吏部事. 贈恭肅公. 母張氏尙衣奉御 諱贊之女. 此公之世系也. 公爲人中和毓粹. 莊重 寡言. 仁信足以感人. 淸儉足以律世. 此公之受之 天也. 方毅廟時. 山東寢盛. 公年十六. 與貴門子 弟 約爲交契. 公欲引虎官御牽龍行首吳光陟, 李光 挺等與焉. 衆莫肯之. 公挺然議曰. 雖私遊中. 文虎 俱備亦得矣. 何有不可乎. 後必有悔矣. 衆咸以爲 然. 於是使之參焉. 未幾庚寅亂. 文臣幾蕩盡. 凡人 交契者皆得免. 以吳, 李二將營救甚力故也. 此公之自少已有知幾之量也. 年若干. 以宰相子直補 守宮署丞. 尋遷大樂署丞. 俄出爲龍岡縣令. 其爲 政諳練理體. 擿發如神. 一方稱之. 此公之始莅郡 也. 累歷御史, 尙衣奉御, 侍御史, 戶部郞中, 御史雜端. 賜金紫大府少卿, 兵刑部侍郞, 大府卿, 知三司 事, 判大府司宰事, 太子詹事, 判閤門, 知茶房事. 階 皆正議. 尙書右僕射. 階光祿. 此公之所歷官序也. 其或廉察東南. 秉鉞東北. 則威風所及. 無不股弁. 然濟以仁信. 故民便之. 此公之奉使延譽也. 夫三 品正秩. 入相可兾. 而公之判司宰也. 反乞郡痛切. 以戶部尙書岀知南京留守. 此公之辭滿忌盈也. 公常以選軍使聽軍政. 其廳事上欹柱自立. 時譁 傳以爲異事. 此公之公平無私所感也. 其帥關東也. 到洛山禮觀音. 俄有二靑鳥含花落衣上. 又海 水一掬許湧灌其頂. 世傳此地有靑鳥. 凡謁聖者 非其人則不見. 此公之惇德至信所致然也. 越崇 慶二年癸酉. 引年乞退甚篤. 上不得已允之. 以銀 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 得謝家居. 與當時卿相 之退逸者. 爲耆老會. 時或置酒盡歡. 凡優游養性 十有七年. 此公之懸車閑適之樂也. 歲己丑八月七日. 詣耆老會. 從容宴飮. 還于第. 明日方午. 忽覽 八戒文. 夜盥浴尙安然就寢. 及旦呼家人問時. 然 後翛然而化. 享年八十. 此公之終也. 先是人有死 復生者. 自言死至一處. 宮觀甚嚴. 守者曰此庾僕 射至處 也. 其說雖荒唐. 考公之行已無愧. 及其終 如此. 則其言亦不可不信. 公之生善處也必矣. 娶 左承宣金諱存中女. 凡生子三女二. 長曰某爲國 學學諭早卒. 次曰某今爲判大僕事, 知御史臺事, 寶文閣直學士知制誥. 季曰某爲內侍某官. 亦先 公卒. 女長適某官某早寡. 李두001適 某官某今寡. 方葬也. 知臺君具公之行錄. 託予以銘. 予奉書泣. 且曰. 嗚呼. 古之遺直也歟. 吾不復見仁人君子之若公 者矣. 銘其敢辭乎. 遂銘曰.
顯允端揆. 惟邦之紀. 民方注心. 遽釋其位. 位不至 極. 公所自避. 公則自避. 人歉其意. 黃髮壽考. 公所 不蘄. 公雖不蘄. 天固相之. 正直感神. 柱立鳥馴. 於 公爲常. 恠者維人. 嗚呼. 舊德云亡. 模範疇倚. 有山 巖巖. 水灌其趾. 是公之宮. 吉祥止止. 鑱石納竁. 眉目萬祀.
『東文選』卷之一百二十二, 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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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이규보(1168, 의종22-1241, 고종28)의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이고 초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 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다. 시, 거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라고 불렀다.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다양한 서책을 섭렵하여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불렀지만 사마시에서 계속 낙방하였다.
1191년(명종20)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이 돌아가시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장자사상에 심취하였다. 1230년(고종17)잠시 위도에 귀양 갔다 다시 기용되어 집현전대학사, 정당문학, 태자소부,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1237년(고종24)문하시랑평장사로 관계에서 사퇴하였다.
6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문란한 정치와 사회적 혼란을 보고 동명왕편(東明王篇)을지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전반기에는 불운하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 최충헌 정권에 노력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환로에서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의 행적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무신 권력에 아첨한 지조 없는 문인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은 역대 최고의 문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저서로는 『東國李相國集』, 『白雲小說』, 『麴先生傳』 등이 있다.
최고의 문인으로, 자신의 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다. 그의 문학적재능은 우리 문학사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文士이다. 이러한 이규보가 낙산사에 있는 관음보살의 진신이 거란의 침략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관음상의 형체만 보존되었으나 복중의 귀중한 물건들이 모두 수탈당하여 텅 비어 있었다. 이에 최우는 명에 의하여 완전히 복구하고 이규보로 하여금 복장을 보수하고 보수문을 짓도록 하였다. 이에 이규보가 칭송하며 찬한 이 작품은 양양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