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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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의 답답함을 유 공회에게 보여주며(山中悶甚示柳公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54)
객관에서 무료하여 술에 반쯤 취했는데 客館無聊酒半醺
예쁜 꽃 한 송이가 좋은 향길 풍기누나 好花日朶吐奇芬
사내들 곳곳마다 풍류 벌어지니 男兒到處風流在
날마다 고당(이름난 기생)과 채색 구름 꿈꾸네 日日高唐夢綵雲
서쪽으로 장안을 바라보니 갈 길은 멀다마는 長安西望道途遙
양양 고을 기생들이 특별히 아름답네 花語襄陽特地嬌
내일도 점점 복잡해도 마음 아니 조이는데 明日漸多心不迫
버들가지 이제부터 긴 가지에 얽히었어라 柳枝從此綰長條
양양은 예부터 풍류가 심하였는데 襄陽自古甚風流
지금까지 숙부님의 정사가 가장 우수하네 叔父于今政最優
행장차려 서쪽으로 웃고 가지 말고 且莫俶裝西笑去
맑은 술로 국화 필 때 한 잔 하세 淸樽相對菊花秋
『梅月堂集』 卷之三
○ 낙산 노장(老丈)의 방 좌하(座下)에서(洛山丈室座下) 5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바다 위 푸른 봉우리 바다 속을 비추니 海上靑峰映海心
고승이 편히 앉아 자단(紫檀), 침향(沉香)을 피우네 高僧宴坐䕭檀沈
열반(涅槃)을 강의하는 곳엔 모진 돌도 신통해 지고 涅槃講處神頑石
찰리(왕족)가 교차될 때 도관(道觀)도 회복되네 刹利交時復道林
나 인연 있어 법석(法席)에 참예한 것 기뻐하고 喜我有綠參法席
대사 추하게 아니 보아 불설(佛說) 들려주셔 감사하네 感師不鄙唯圓音
멀리서 사알룡(裟謁龍) 와서 들으니 알겠고 遙知娑謁龍來聽
제일 화엄경 말끝마다 금이 나온다네 第一華嚴口口金
선사는 숭고하고 기략과 말을 잘하여 禪師高峻有機鋒
일찍이 제사(提裟)의 육상종(六相宗)을 논파했네 曾破提娑六相宗
명월과 청풍은 함께 하기어렵고 明月淸風難共友
높은 산 흐르는 물에는 만나는 사람 적구나 高山流水少人逢
창에 반쯤 가린 푸른 대에 우수수 빗소리요 半窓翠竹蕭蕭雨
뜰에 가득 누런 꽃 아래 귀뚜라미 소리 滿切黃花晣晣蛬
만일 서쪽에서 온 뜻 분명히 묻는다면 55) 若問西來端的意
두루 끄집어내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함도 무방하리 不妨拈出豁人胸
현각스님 고귀한 가문 세상에선 둘도 없는데 永嘉右族世無雙
그 다 버리고 여러 해 동안 말 복잡한 것 배웠네 抛累年來學語哤
보타산 그 앞에는 사나운 호랑이 엎드렸고 寶陀山前獰虎伏
사바 바다 그 가에는 독룡이 항복했네 薩娑海畔毒龍降
미투리에 대 지팡인 선사의 사는 방도요 芒鞋竹杖禪生計
불경과 향로 이 둘은 계율의 표당(깃발)일세 經卷香爐戒幖幢
장로님의 마음 근본을 사람들은 아는가 長老心源人會否
바퀴 같은 달이 소나무 창에 비추네 一輪明月照松窓
고향의 형님, 아우는 유림에 발탁되었는데 舍兄及弟擢儒林
등 같은 불법 전해 받아 아우는 불심에 합했네 阿弟傳燈契佛心
부처님과 소왕(素王)이 모두 다 한 궤도를 걸어가니 覺帝素王同一軌
대나무 생황 오동나무 슬(瑟) 같은 음을 갖추었네 竹笙桐瑟備諸音
십년 세월 형설 끝에 불경 열어 다 통했네 十年螢雪窮經達
만겁 단(檀) 같이 닦아 도 깨닫기 깊었다네 萬劫檀修悟道深
만일에 그 공부가 같고 다름을 묻는다면 若問功夫同與別
장차 같을 게 없다는 밖에 다시 무엇을 찾으랴 將無同外更何尋
난수정(難水亭) 그 앞에선 뜬 갈매기와 친했고 難水亭前押泛鷗
의상대 난간에 서서 조각배를 바라보고 있네 義湘臺畔看扁舟
참선 마음 맑고 고요하긴 망망한 창해 바다요 禪心淡泞如蒼海
법상(法相) 평화롭고 조용함은 흰 소와 같다네 法相雍容似白牛
늙어가니 이마에도 응당 눈이 있을 게요 老去頂액應有眼
한가해도 구름 달밖엔 다시 짝할 이 없네 閑來雲月更無儔
파도소리 산 빛은 썩 작은 티끌의 게(偈) 56) 요 波聲山色微塵偈
지각없는 사람 앞에선 꿈 이야기 그만 두었네 無智人前說夢休
『梅月堂集』 卷之三
낙산사에서 선 대사에게 주며(洛山寺贈禪上人) 3首.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57)
한번 보니 깨끗한 그 태도는 옛 친구 같은데 一見淸標似舊知
모습을 사모한 지 벌써 오래 되었네 羨墻面目已多時
절조(節操) 크기는 높은 소나무와 대나무 모양 節操落落松筠態
몸가짐 밝고 높아 난새, 학의 의표 이네 容止昻昻鸞鶴儀
고요한 참선 의자에서 창해의 달을 보는데 禪榻靜看滄海月
다천(茶泉)에는 한가로이 푸른 못의 교룡(蛟龍) 흔드네 茶泉閑擾碧潭螭
대사 따라 도(道)를 물으러 어느 땐가 가게 되면 從師問道他時去
검은 눈동자에 쌓인 백태 긁어내는 금칼 되리라 積瞖玄眸肯刮錕
방장(方丈)은 봉래(蓬萊)가 가까이 있는데 方丈蓬萊指顧中
흰 구름 누런 학은 긴 구름 타고 가네 白雲黃鶴馭長風
신기루 그림자 교인(鮫人-인어)의 집을 눌렀고 蜃樓影壓鮫人室
금 불전의 광채 해약(海若-바다 신)궁에 뚫고 드네 金刹光穿海若宮
담소하며 용은 밑 없는 바리때에 항복하고 談笑降龍無底鉢
경행(經行)으로 뱀 범 갈고리 있는 지팡이에 굴복하네 經行伏虎有鈷?
바위 속에 편안히 앉았으니 하늘 꽃이 비 오듯 내리는데 嵓中宴坐天花雨
풍진 세상의 뜨고 잠김이 별안간 공(空)이 되네 塵世浮沈轉眼空
흐리고 무지한 인간이라 만 가지 일 다 글렀는데 貿貿人間萬事非
장자와 열자 따라 삼기(三機)를 배웠네 欲從莊列學三機
뜬 인생 한 되는 건 바람 앞에 등불인 양 변화하는 것 浮生有限風燈變
부질없이 죽는 게 새끼 새 나는 데 무슨 도움되리 浪死何稗鷇鳥飛
선녀가 차(茶를) 받드니 향주(香廚-절의 부엌)가 깨끗하고 天女供茶鄕廚淨
산(山) 잔나비 바리때 받드니 도(道) 기름지고 살찌네 山猿擎鉢道瞍肥
그 무슨 인연 얻어 생(生) 없다는 말씀 늘 들으며 何緣恒聽無生話
돌집 소나무 다락에서 그대와 함께 의지하리 石室松龕共爾依
『梅月堂集』 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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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김시습(1435년,세종17-1493년,성종24)의 본관은 강릉(江陵) ,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이고,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선조는 신라 무열왕의 6대손인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김시습은 5세에 학문과 문장으로 신동으로 알려져 당시 정승 허조와 세종대왕 에게 문장능력을 인정받고 미래를 약속 받았다. 하지만 단종 폐위 사실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고 방랑을 시작하였다.
단종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최초의 한문소설인 『金鰲新話』를 지었다. 조선조 최고의 문인이지만 불우한 현실에서 기인이고, 미치광이로 대접받으면서도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자신의 가문과 철학, 불교관, 인생관 등 자신을 인정하고 위로하였던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서신으로 예의를 갖추었고, 서신의 내용이 김시습과 당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유자한(柳自漢.?-?)의 본관은 진주이다. 1459년(세조5) 평양별시문과(平壤別試文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1464년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이 되었다. 이듬해 중시문과(重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1466년 지평을 지냈다. 1475년(성종6) 홍문관부교리가 되고, 1478년 예문관응교·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낸 뒤 1482 년 행사간(行司諫)을 지냈다.
1486년(성종16) 양양부사로 재임하면서 의창(義倉)의 환자〔還上〕에 따른 폐단을 상소하여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양양부사로 있으면서 양양의 백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유부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유배지에 죽었기 때문 으로 보인다. 특히. 단종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방랑생활을 하였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과서로 위로하며 가까이 지냈다.
김시습에 관한 가문과 어린 시절, 그리고 많은 일화들이 양양부사 유자한의 서신에 나타나 있다. 유부사는 양양의 여인을 김시습에게 소개하여 편안한 가정을 꾸밀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평생 전국을 방랑하였지만 유부사 때문인지 몰라도 문집 속에 양양에 관한 기록과 설화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오세암의 전설을 보면, 매월당 김시습이 이 절에서 주로 은거하여 오세암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시는 부사 유자한의 접대로 양양 객관에서 머물며 술이 취해 예쁜 꽃송이를 보고 지었다. 양양의 전통적인 풍류와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만약~묻는다면: 달마가 서쪽에서 중국으로 온 뜻을 묻는 것임.
56) 게(偈): 부처의 공덕이나 교리를 찬미하는 노래글귀.
57)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전통적인 유가의 집안에서 유가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단종폐위 이후 불자임을 자처하며 불자의 길을 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사찰과 고승들과의 교류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낙산사를 자주 찾았다. 이 시는 낙산사의 법연에서 화엄경을 들려주는 스님에 대한 고마움을 읊고 있다. 화엄경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돌아와 낙산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창시하였다. 화엄종은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첫 제자에게 최초로 설법 한 것이 화엄종으로 설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면 소중함을 표현하고 있다.
김시습은 유가이면서도 불가에 심취하여 설점이라는 법호를 사용하며 불가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자신의 고향이고 근본인 강릉과 관동지방을 자주 왕래하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이 지방 에는 김시습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첫 수에서 선대사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대 사를 사모하여 만나보니 옛 친구처럼 느껴졌고, 그 스님의 모습은 정결하고 절개는 송죽처럼 굳고 몸가짐 또한 밝고 높아 난새와 학의 모습인 선대사의 태도와 모습을 칭송하며 심회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세 째수에서는 자신의 삶이 현실에서 어긋나 불행하지만 항상 책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체험한 심회를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