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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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하주 청견사에서 호곡 남용익의 시를 차운함[駿河州淸見寺次南壺谷龍翼韻] 해사(海槎) 조엄(趙曮) 86)
해 돋는 동쪽이라 청견사란 절이 있어 日東淸見寺
문을 열면 만 리의 파도를 대하게 되네 門對萬里波
스님이 입정(入定)하자 흰 구름 떠오르고 僧定白雲出
누각(樓閣)이 높으니 나는 새를 내려보누나 樓高飛鳥過
낙산사(洛山寺)도 이처럼 그리면 좋겠구만 洛山同畫可
한국(韓國)의 사신은 시를 많이 부쳤다오 韓使寄詩多
풍광의 바깥일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欲說風光外
언어가 다른지라 어찌하리오 殊音奈爾何
남호곡이 일찍이 이 절을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다 비했으므로 스님들이 이 말에 인하여 낙산사의 그림을 그려 보내달라고 하기에 경련(頸聯)에서 언급하였다.[南壺
谷. 曾以此寺比之襄陽洛山. 僧仍是語. 乞畫洛山. 故頸聯及之.]
『海槎日記』
○ 종일 흐리고 비가 왔다. 길원(吉原)에서 잤다. 제곡(濟谷) 조엄(趙曮)
오늘의 원래 정해진 참(站)은 삼도(三島)에 있는데, 1백 20리가 된다. 그래서 일찌감치 출발할까 했는데, 밤부터 비가 계속 내리고 대령(待令)하는 마필(馬匹)마저 지체되었다. 그래서 행차를 멈추고 싶었지만, 도주(島主)가 이미 떠났기 때문에 부득이 비를 무릅쓰고 늦게 출발하였다.
20리를 가다가 지나는 길에 청견사(淸見寺)에 들렀다. 절은 오산(鼇山)에 있는데 일본에서 유명하므로 앞서의 신사(信使) 중에는 올라서 구경했던 이가 많았다. 앞은 큰 바다에 다다랐으니 안계(眼界)가 트이고, 뒤는 산이 병풍처럼 둘렸으며 화초가 우거졌다. 집들이 우뚝 솟고 폭포는 쏟아졌다. 앞뜰에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어 가지는 옆으로퍼져서 그늘이 세 칸 집을 덮었고, 바야흐로 꽃이 피어서 향기가 한 동산을 풍긴다. 비록 듣던 바만은 못하나 또한 흔히 있는 게 아니라 하겠다.
주지(住持) 주인(主忍)이란 자가 나와 뵙더니, 전후의 우리나라 사람의 시장(詩章) 등본(謄本)을 내어 보이며 시 한 수를 요구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써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어 바친 것에는 볼 만한 게 없었다. 법당(法堂) 문설주에 현판들이 있는데, 하나는 병오년(1606, 선조 39)의 신사(信使)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이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씩이고, 다른 하나는 무진년(1748, 영조 24)의 삼사(三使)가 병오년의 사신들이 지은 운을 따라 지은 것이다. 또 ‘제불택(諸佛宅)’이란 3자가 쓰인 현판이 있기 에 물었더니, 이는 신묘년(1711, 숙종 37)의 제술관 박안기(朴安期)의 필적이라 한다.
전부터 이 절을 논하는 사람이 간혹 우리나라의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다 비유하곤 했는데, 그건 남호곡(南壺谷) 일기(日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절 중이 이 말로 인하여 화사(畫師)에게 낙산사의 화본(畫本)을 요구하는데, 그도 역시 돌아오는 길에 해주겠다고 허락하였다. 세 사신이 한자리에 모여 잠깐 쉬고 곧 떠나는데, 길이 해안(海岸)을 경유하므로 성난 파도가 철썩거리고, 바다 공기 가 사람을 엄습하였다. 길가에 소금 굽는 가마솥이 많이 있는데, 주민들은 소금 굽는 일로 생업을 삼는다 한다. 진흙길을 걸어서 한 준령(峻嶺)을 넘는데 곧 살타현(薩陀峴)이요, 다시 평지로 내려서서 한 주교(舟橋)를 건너니 바로 부사천(富士川)이다. 내는 마치 홍수를 만난 것처럼 넓고 깊었으니, 참으로 건너기 어려운 곳이었다.
좌우로 제방을 쌓았다. 앞서 이른바, 죽부인(竹夫人) 모양처럼 생긴 것을 수없이 펼쳐두었고, 또 가는 대와 조각대를 가지고 주교의 바깥 길가 좌우를 자못 몇 리 넘게 둘러놓았는데, 모래를 쌓아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나무를 둘러서 그 좌우를 한계한 것이다.
이 대나무로 둘러놓은 곳을 건널 때에 풍우(風雨)가 크게 일어서, 인마(人馬)가 거의 쓰러질 뻔하였다. 그 길은 겨우 잘 지났으나 날짜를 헤아려 보니 삼도(三島)에 꼭 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무관(掌務官)을 도주에게 먼저 보내어 내일 떠날 것을 요청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길원에 들어갔는데, 이곳 역시 준하주(駿河州)의 소속이다.
일행들이 거개 후줄근히 젖어 있어 형편상 전진하기어려웠다. 그런데 도주는 내가보낸 심부름꾼을 만나보기도 전에 먼저 이미 떠났다 한다. 이는 미처 요량하지 못한 일일 뿐만 아니라, 저들은 주참(晝站)을 야참(夜站)으로 변경하는 것이 종일 머물며 지체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여긴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지대(支待 먹을 것과 쓸 물건을 이바지하는 일)를 갑자기마련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한 모양이나, 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예의는 전연 알지 못한다고 하겠다.
호행(護行)하는 왜인들 중에 떠나기를 청하려는 자가 있다 하기 에, 나는 ‘지난번 저들이, 주교(舟橋)를 고쳐 놓는다는 핑계로 하루를 대원(大垣)에서 머물고, 또 대정천(大井川)을 건너기 어렵다는 이유로 하루를 지체한 것은 무슨 뜻이었던가? 지금 비가 퍼붓고 해가 저물 때에 떠나기를 청하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일이며, 수역관이 이런 말을 들어와서 고하는 것 역시 매우 온당치 못하다.’는 뜻으로 아울러 엄하게 나무라고, 따라서 유숙(留宿)하겠다는 뜻을 도주에게 통보하게 하였다.
어두워질 무렵에 풍우가 또 일어났다. 만약 전진하였더라면 사람들 중에는 병이 생기는 이가 많고, 옷을 얇게 입은 하례(下隷)들이 혹 중도에서 쓰러지게 되는 염려도 없지않았을 것인데, 다행히 머물러 자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세 사신의 이부자리를 머물러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앞질러 가져갔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들이 모두 ‘비록 침구(寢具)는 없더라도 떠난 것보다는 낫다.’고 하니, 풍우에 시달린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다. 유숙하게 된 길원 지방은 준하주의 소속이다. 일공(日供)은 비록 갑자기 변통하여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전수를 제감하도록 허락하면 후일의 폐단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또 사체(事體)에도 어떨지 몰라서 바치게 하였더니, 준례대로 준비되었으나 과연 두세가지 갖추지 못한 잡종이 있다 하기에 그것은 제감하게 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陰雨終日. 宿吉原. 今日元定站實在三島. 將爲百二十里. 必欲早發. 自夜雨下不止. 且馬匹之待令遲滯. 欲爲停行. 而島主已發. 不得已冒雨晩發. 行二十里. 歷入淸見寺. 寺在鰲山. 而有名於日東. 故從前信使輒多登覽. 而前臨大海. 眼界廣闊. 後山圜屛. 花卉成林. 傑構嵬嵬. 懸瀑淙淙. 前庭有一梅樹. 枝幹旁達. 蔭覆三間. 花蘂方開. 香濕一院. 雖不及於所聞. 亦可謂稀有也. 住持僧主忍者出謁. 進前後我國人詩章謄本. 仍乞一詩. 以歸路書給答之. 而渠之製呈者無可觀矣. 法堂門楣有兩懸板. 一是丙午信使呂祐吉, 慶暹, 丁好寬七絶一首. 一是戊辰三使所次丙午韵者也. 又有諸佛宅三字懸板. 問是辛卯製述官朴安期筆也. 自前論此寺者. 或 比之於我國襄陽洛山寺. 觀於南壺谷日記則可知矣. 寺僧因是語乞得洛山寺之畫本於畫師. 故 亦許歸路. 三使同會少休卽發. 路由海岸. 怒濤崩騰. 海氣襲人. 路邊多有鹽釜. 而居民以煮鹽爲業云. 衝泥而行. 踰一峻嶺. 卽薩陀峴也. 轉下平地. 渡一舟橋. 卽富士川也. 川廣而深. 若値潦水. 誠難渡涉處也. 左右爲堤堰. 鋪列前所云竹夫人樣子者. 不知其數. 且以細竹片竹作圍於舟橋外路傍左右者. 殆過數里許. 以其築沙爲路. 故以竹圍限其左右也. 渡竹圍之時. 風雨大作. 人馬幾乎顚仆. 僅能趲程. 而商想日力. 必不及於三島. 故先送掌務官於島主. 要 以姑待明日作行之地. 日暮始入吉原. 亦屬駿河州. 一行擧皆沾濕. 勢難前進矣. 島主則未承吾伻之前. 先已作行云. 而非但未及料量. 彼人輩以晝站之改爲夜站. 極爲持難. 有甚於終日之留滯云. 雖以支待之猝難辦出爲慮. 其於待客之禮. 可謂全不知也. 護行差倭等有欲請行者云. 故余以向日渠輩托以舟橋改鋪. 淹留一日於大垣. 又以大井川之難涉. 遲滯一日者何意. 今欲請行於雨注日暮時者. 極爲無據. 首譯之以此語入告者. 亦甚未安. 並嚴責之. 仍以留宿之意. 使通於島主. 初昏風雨又作. 若或前進. 則多人必多生病. 衣薄下隷. 或不無中路顚仆 之患. 而幸而止宿. 三使則衾籠留待. 而餘並先去. 諸人皆以爲雖無寢具. 有勝於作行. 可想其風雨之苦狀也. 止宿吉原. 地屬駿河州. 而日供雖是不時辦備. 若許全減. 則非但後弊有關. 且於事體如何. 故使之捧上. 則依例準備. 而果有數三雜種未備者云. 故此則使之除減. 是日行七十里.
『海槎日記』
○맑음. 청견사에서 점심을 먹고 강고(江尻)에서 잤다. 제곡(濟谷) 조엄(趙曮)
밥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주교에 이르렀는데, 냇물이 사납고 급하였으니게려(揭厲)하기는 이미 어려웠다. 배를 연결해서 다리를 놓았는데 과연 힘을 많이 들였 으니, 이틀 동안 체류한 것은 사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또 19여 리를 가서는 도주가 앞서고 반드시 모여서 가지 않았다.
잠깐 다옥(茶屋)에 들어갔는데, 다옥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있었다. 바다는 바로 내양(內洋)인데 백 리쯤 산을 에워싸고 거울 면처럼 평평하였다.
문에 작은 간판이 있는데 ‘임해정(臨海亭)’이라고 씌었다. 이는 저들의 글씨인데, 필법이 이미 졸렬하고 내용도 무의미하였다. 서중화(徐中和)를 시켜 ‘경호정(鏡湖亭)’이라고 세 글자를 큼직하게 써서 벽에 붙이게 하였다.
앞으로 나아가 청견사에 들어갔다. 매화는 비록 떨어졌지만 연약한 푸른 잎은 그늘을이루고, 괴이한 화초는 새잎이 많이 돋았으며, 폭포는 비 뒤에 수세를 더했다. 절은 더욱 깊숙하고 경치는 퍽 그윽하였다.
‘푸른 그늘 꽃다운 풀, 꽃 피는 시절보다 낫구나(綠陰芳草勝花時)’라는 것은 참으로 헛말이 아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러싸인 것은 비록 통활(通豁)한 도포(鞱浦)만은 못하더라도 사시(四時)의 장춘(長春)은 실로 도포에는 없는 것이었으니, 만약 일본의 절경을 논한다면도포와 서로 백중(伯仲)을 할 만하다고 하겠다.
주지(住持) 주인(主忍)이 또 칠언 절구 한 수를 바치고 세 사신에게 화답을 요구하기에, 모두 붓을 날려 수응(酬應)하고, 또 남호곡(南壺谷) 시의 ‘다(多)’ 자에 차운한 것을 여기에 두고, 또 낙산사(洛山寺)의 화본(畫本)으로 앞서 간절히 요구하던 뜻에 부응(副 應)해 주었다. 그리고 따라서 종이ㆍ붓ㆍ먹 및 호두[胡桃] 등을 주었으며, 앞서 사람을보내어 꽃을 달여서 수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맛보였다.
이 절의 경치는 족히 하룻밤 묵을 만한 인연이 있었으나, 참소(站所)가 아닌 때문에 횃불을 들고 전진하여 초경(初更)에 강고(江尻)에 들었다. 산승(山僧)이 사의(謝意)를 표명하기 위하여 뒤따라 와서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게려(揭厲)는《시경》주(註)에 “옷 입은 대로 건너는 것을 여, 옷을 걷고 건너는 것을 게라 한다.[以衣而涉曰厲 蹇衣而涉曰揭]”라고 하였다.
*푸른 그늘 꽃다운 풀, 꽃 피는 시절보다 낫구나[綠陰芳草勝花時]
晴. 淸見寺中火. 宿江尻. ○食後發行. 行二十里. 到舟橋. 川流悍急. 旣難揭厲. 連舟成梁. 果多費力. 兩日留滯. 勢所使然矣. 又行十餘里. 島主在前. 不必攢去. 暫入茶屋. 屋在海邊岸 上. 海是內洋. 百里環山. 平如鏡面. 門楣有小板. 書以臨海亭. 此乃彼人之書. 而筆法旣拙. 義意無味. 使徐中和大書鏡湖亭三字. 付之壁上. 前進入淸見寺. 梅花雖落. 嫩綠成陰. 異卉 多抽新葉. 飛瀑益添雨後. 寺愈深邃. 景多窈窕. 綠陰芳草勝花時者. 誠非虛語也. 環海三面. 雖讓韜浦之通豁. 長春四時. 實是韜浦之所無. 如論日東形勝. 可謂與韜浦相伯仲矣. 住持僧 主忍. 又呈七絶一首. 而乞和於三使. 皆以走筆酬之. 又以次南壺谷多字韻者留之. 且以洛山 寺畫本. 以副前懇. 因給紙筆墨及胡桃等物. 先送人煮花. 分嘗隨行諸人. 此寺景致. 足留一 宿之緣. 而以其非站所. 故擧火前進. 初更入江尻. 山僧爲致謝意. 隨後而來. 復呈一詩矣. 是日行七十里.
『海槎日記』
○ 준하주(駿河州) 청견사(淸見寺)에서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의 시를 차운함 제곡(濟谷) 조엄(趙曮)
해 돋는 동쪽이라 청견사란 절이 있어 日東淸見寺
문을 열면 만 리의 파도를 대하게 되네 門對萬里波
스님이 입정(入定)하자 흰 구름 떠오르고 僧定白雲出
누각(樓閣)이 높으니 나는 새를 내려보누나 樓高飛鳥過
낙산사(洛山寺)도 이처럼 그리면 좋겠구만 洛山同畫可
한국(韓國)의 사신은 시를 많이 부쳤다오 韓使寄詩多
풍광의 바깥일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欲說風光外
언어가 다른지라 어찌하리오 殊音奈爾何
남호곡이 일찍이 이 절을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다 비했으므로 중들이 이 말에 인하여 낙산사의 그림을 그려 보내달라고 하기에 경련(頸聯)에서 언급하였음.
제천의 길에 해가 갓 떨어지자 日落諸天路
바람이 일어 한바다 물결이 뒤집히누나 風翻大海波
법의 인연은 비록 이제야 맺었지만 法緣憐始結
시구를 남기 어 지나간 일 기억되네 詩句記曾過
폭포에 비쳐서 등불빛 요란하고 瀑布燈光亂
포단에 누웠으니 잠 맛이 퍽 좋네 蒲團睡味多
나그네 걸음이라 머물러 쉴 수 없으니 客行留不得
더구나 밝은 저 달을 저버리면 어떡하나 其奈月明何
원운(原韻)
삼청의 세계에 탑은 우뚝 솟았는데 塔聳三淸界
문을 열면 만 리 바다와 마주치누나 門開萬里波
고기잡이 배들은 연파 밖에서 돌아오고 漁舟煙外返
사신의 행차는 빗속을 지나가네 征節雨中過
새 매화는 곱게 피어 온 땅에 가득하고 滿地新梅好
하늘에 거의 닿은 고목들 많기 도 하네 參天古木多
다른 나라에 들어와 물색을 읊게 되니 殊邦題物色
나그네 고향 시름 어찌 견디란 말인가 其奈客愁何
부사(副使)
숲 속을 거닐으니 잇따라 취미가 나네 林行轉生趣
오래도록 배만 타서 풍파에 시달렸기에 舟楫久風波
육오의 등에 업혀 누각(樓閣)은 둥둥 떴고 樓泛六鼇戴
사모가 지나가니 중들이 환영하네 僧迎四牡過
꽃 속에 숨은 폭포소리 아스랗게 들려오고 花深聽瀑逈
청산이 가까우니 구름 구경 많이 하네 山近見雲多
눈을 들어 저 하늘 극동(極東)을 바라보니 縱目天東極
부상은 아직도 얼마나 남았는지 扶桑且幾何
종사관(從事官)
청정(淸淨)의 세계는 연록에 의지하고 淨界依蓮麓
드높은 창문은 눈빛 파도를 내려다보네 高窓瞰雪波
누대를 돌아보니 시권이 걸려 있으니 樓臺詩卷在
고금의 사신들 지나간 흔적이로세 今古使車過
꽃향기에 감싸여 제천 87) 이 어둑하고 花氣諸天暗
폭포 소리 끊임없어 가랑비가 흩날리네 泉聲細雨多
앞날의 기약이 분명 멀지 않을 텐데 前期知不遠
매화꽃이 그때 가면 어떻게 되려는지 梅蕊更如何
남옥
불연이 정청의 땅에 머물러 있어 佛緣留淨地
누대(樓臺)의 그림자 창파에 둥둥 떴네 樓影泛蒼波
설납은 시권(詩卷)을 손에 들고 기다리는데 雪衲携詩待
사신의 가마는 비를 맞으며 지나가네 星軺帶雨過
층벽에서 떨어져 폭포는 가직하고 瀑流層壁近
온 뜰은 매화나무 많기도 하군 梅樹一庭多
운림의 언약을 다시 다짐하지만 更證雲林約
돌아가는 시기가 어떻게 되려는지 歸時定若何
성대중
동해의 막바지에 부사산(富士山)이 솟아나서 富嶽窮東海
선루가 창파(滄波)를 관리하고 있군 그래 禪樓領漫波
곤어(鯤魚)와 붕(鵬)새는 난간 앞에 나타나고 鯤鵬當檻出
해와 달은 주렴(珠簾)을 스쳐 지나가누나 鳥兎半簾過
빗방울이 성글어라 샘소리 생동하고 疎雨泉聲活
깊숙한 운림(雲林) 속에 불영도 많도다 幽林佛影多
황화의 사명을 매화가 알 터이니 皇華梅樹識
예와 이제 비교하면 생각이 어떠하오 今古意如何
원중거
매화 향기부처님 뼛속에 스며드는데 梅香透佛骨
절집 그림자 유유히 바다에 떨어지누나 寺影落鯨波
법의 세계 삼천이 열려 있고 法界三千闢
사신의 배는 열한 번을 지나갔네 仙傞十一過
폭포 소리 죽림(竹林) 사이로 아스라이 들리는데 瀑聲穿竹遠
용의 기운 무럭무럭 주렴(珠簾)을 뚫고 드네 龍氣入簾多
사문(沙門) 88) 의 밖에서 문득 말을 세우고 보니 立馬沙門外
더구나 부슬비에 시의 시름 어찌하리오 詩愁奈雨何
김인겸
매달린 사다리는 불당(佛堂) 길과 통하는데 懸梯通佛路
싸늘한 석경(石磬)소리 봄물결에 메아리치네 寒磬響春波
선인장(仙人掌) 위에는 노을이 갓 걷히고 仙掌霞初捲
매화 피는 시절에 나그네 잠깐 지나가누나 梅花客暫過
경계(境界)는 맑고 조촐한데 개척된 땅은 적고 境淸開地小
날이 활짝 개면 보이는 하늘은 퍽이나 많네 晴見得天多
선인(仙人)의 피리와 학이 서로 기 다릴 터이지만 笙鶴宜相待
사명(使命)을 맡은 길이라 기한 바빠 어찌하리 王程有限何
이해문
하늘을 능지를 듯이 높이 솟은 저 누각(樓閣)은 高山凌霄閣
해가 목욕하는 물결에 닿아 있군 그래 平臨浴日波
나그네 앉은 자리 흰 구름 일어나고 白雲生客坐
신선이 떠난 뒤라 황학이 아득하구나 黃鶴杳仙過
매백은 때마침 삼춘의 절반인데 梅柏三春半
연하의 승지여서 십경이나 되게 많다는군 煙霞十景多
황화의 사신이 대필을 남겼으니 皇華留大筆
시의 예술은 음하의 옛 솜씨를 이었구려 藻思續陰何
홍선보
『해사일기(海槎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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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조엄(1719,숙종45∼1777,정조1)의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이조판서상경(商絅)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유배 중에 아들 진관(鎭寬)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 을 아울러 보급하였다.
1794년(정조18)좌의정 김이소(金履素)·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覈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 되고, 1814년(순조 14)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 일기』가 전하고 있다. 문익(文翼)이다.
87) 제천(諸天): 불가(佛家)의 용어(用語). 불경(佛經)에서 삼계(三界)의 28천을 제천(諸天)이라 일컫는데, 천(天) 이란 청정(淸淨)하고 광결(光潔)함을 말함.
88) 사문(沙門): 중[僧]을 사문(沙門)이라 칭하는데 범어(梵語)로는 근식(勤息)이란 뜻이다.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