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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35호

    2월 - 사림사(선림원지)와 홍각선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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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에 자리한 사림사의 원명은 억성사(億聖寺)이고 이곳에서 홍각선사가 한국 선종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그 자취를 살피고자 한다.



    억성사에 세워진 홍각선사탑비


    880년 10월 21일 승려 김이관이 입적하자 이듬해 신라 헌강왕은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그의 법명을 홍각선사(弘覺禪師:830~880)로 하였고 탑명을 선감지탑(禪鑑之塔)이라 정하여 탑비와 승탑을 세우라고 하였는데 정강왕 원년(886)에 억성사에 세워졌다.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전체 문장을 번역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법이란 것이 본래 진(眞)도 아니고 가(假)도 아님을 알아야 선종의 근본에 도달하게 된다.’, ‘말을 잊고 고요한 경지에 이른 이가 홍각선사가 아니겠는가!’‘홍각선사는 정신이 뛰어나게 맑고 시원하며 본성의 깨달음이 비범하여, 법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나루터이자 다리였다.’라는 취지가 적혀있다.

    이런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미천골에 위치한 억성사와 그 절에 주석하였던 홍각선사가 한국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억성사의 강원(講院), 선림원


    경서와 사서에 능통한 홍각선사는 17세에 해인사(海印寺)로 출가하여 선지식을 찾았고 영암사(靈巖寺)에서 참선에 정진하였는데 그 모습과 풍채도 준엄하였다 한다. 억성사에 주석하던 염거화상이 입적하자 홍각선사는 원감대사(圓鑑大師, 787~868)를

    찾아가 수학하고 870년경에 다시 억성사(億聖寺)로 돌아온다.

    홍각선사는 억성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선종의 강원(講院)을 운영하였는데 그 당시 적지 않은 타종단의 승려가 선종으로 이적한 것으로 유추된다. 이때 스님들이 먹을 쌀을 씻은 물이 미천골(米川谷)을 채웠다하니 억성사의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1605년 을사포락 때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선림원지를 최근 발굴하였는데 남서 길이 29.2m, 북동 길이 25m, 너비 13m의‘ㄱ’자형 대형 승방지와 여러 동의 부속 건물지와 강원 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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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림원지 발굴모습 (2015.7~2016.11)



    사림사와 선림원지


    양양부사 이해조가 지은『양양삼십영』의 한시와『현산지』의 사찰조 및『여지도서』등 자료에 의하면 신라 사찰 억성사가 조선시대에는 사림사로 불리었다. 그런데 1964년 정영호박사가 사지를 최초로 조사한 후 석조물인 보물제444호 삼층석탑 등 4점을 1966.9.1일 문화재로 지정할 때 사지의 명칭을 ‘선림원지’로 기록하므로 사림사지가 선림원지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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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각선사탑비문 실물



    홍각선사탑비의 수난


    헌강왕의 명령으로 병부랑중 김원(金薳)이 비문을 지었고, 그 비문을 승려 운철(雲撤)이 왕희지체로 썼고, 비명은 차성현령 최경[崔瓊:일부에서는 최형(崔夐)으로 기록되어있다]이 전서체로 썼는데 이를 보덕사 승려 혜강(慧江)이 새겼다. 이 비문에 사용된 왕희지체는‘점획이 팔팔 뛰려는 것 같고 삼장(三藏)의 서문과 겨루어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한다.

    『관암전서』, 『양양부읍지』등에 의하면 조선 후기 양반들이 이 비문을 앞 다투어 탁본하려 하였는데 이로 인해 민중들이 탁본 부역에 시달리게 되자 화재를 일으켜 비문의 몸돌이 파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그 후 양양부사 안경운(安慶運,1745~1747)이 파편을 수습하여 양양부의 창고에 보관하던 것을 1913년 조선총독부의 금석문수집 통첩에 따라 이 비의 파편 일부가 1914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또 1985년도 발굴조사 시 출토된 비석 조각 일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홍각선사의 비문은 신라 말기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008년 홍각선사탑비를 복원하다


    홍각선사탑비의 탁본 된 비문을 연구한 결과 글자 수는 1,340자 정도로 밝혀졌는데, 현재까지 약 710자를 확인하여 가로 32행, 세로 48자의 비문을 너비 94.5㎝, 높이 173.5㎝, 두께 19㎝의 비 몸돌에 음각하여 사지(寺止)에 남아 있던 높이 73cm의 거북 받침돌에 세우고 5.23cm의 머릿돌을 덮어서 선림원지에 세우므로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탑비가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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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각선사탑비 (보물제4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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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각선사비명 (弘覺禪師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