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 조선시대 양양의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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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양양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핫 플레이스」이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양양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갖는데 이번 호에서는 조선 시대 양양의 특산물에 대하여 조명해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
양양 야철지 역사
특히〈표〉에서처럼『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토산(土産)조에는 철(鐵)이 나오는데 현 양양 철광의 위치인‘서선사(西禪寺) 동쪽 봉우리 아래서 나온다.’라는 기록을 보아 오래전부터 철은 양양의 특산물로 진상했지만, 각종 농기구나 무기 등을 만들어 민간에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양양 철의 역사는 양양군 서면 갈천리 산50번지 구룡령 기슭에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야철지(冶鐵地)가 발견돼 학계에서 확인 결과 광석(鑛石)에서 철을 정제해 각종 철제 연모를 만들던 터로 확인되었다.
◈ 또한 강현면 금풍리(金風里)의 옛 이름은 용철야(熔鐵冶: 풀무질로 쇠 녹이던 곳)로 불리다 300년 전에 금풍리가 되었지만, 아직도‘쇠풍골’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특산물과 공납의 변화
토산품 중에는 농산물이나 약초보다는 미역이나, 김 등과 각종 어류(魚類)가 많이 등장하는데 바닷가 고을이라 공납이 지정되었다.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상태로 유통이 되었다. 어류 중 쌍족어(雙足魚)가 300년 이상 물목(物目)에 있는데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어물 중 명태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징어(烏賊魚)는 1940년에 처음 등장한다.
소금을 특산화 하다.
『대동지지』토산조에 소금(鹽)이 처음 등장하는데 염전과 관련한 지명이『양양의 땅이름』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바닷물을 퍼다 가마에 넣고 끓이다가 소금 결정이 만들어지면 가마니에 담아서 정제하는 방식이었다.
◈ 염전 : 조산리 ⇒ 염전거리, 여운포리 ⇒ 염전터, 중광정리 ⇒ 염밭, 정암1리 ⇒ 염전거리.
특산물과 진상품의 차이
『관동읍지』에는 물산조(物産條)와 진상하는 공물(貢物)인 진공조(進貢條)를 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진공조를 보면 물산(物産)보다 훨씬 많은 공물(貢物)을 요구하여 백성을 곤궁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표〉에 없는 약재가 26가지나 포함되어 있으며 상어(沙魚)와 낙산 배(生梨)가 진상품에 처음으로 들어있다.
낙산배 시조목
일제 강점기 공출의 변화
『현산지』물산(物産)조를 보면 일제 강점기(1910~1945)에 접어들면서 호랑이와 곰 가죽에서 수달에 이르기까지 10 여종의 짐승 가죽이 공출(供出)되어 대형동물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양양지방에서 해양성 기후를 이용한 다양한 과일(11종)이 생산되어 영서를 넘나들었다. 특히, 돌고래가 특산품에 처음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 밖의 특산품
이 밖에도 백화사(白花蛇)는 살모사(殺母蛇) 종류의 말린 뱀으로 한약재로 진상했으며 화살대(竹箭)는 ‘죽도에서 나온다’고 하여 현남면 인구리 죽도(竹島)에서 생산되는 것이 최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동지지』에는‘고려 문종 17년(1063)에 돈과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익령현(양양의 옛 이름)에서 황금이 산출되니 공적(貢籍)에 추가할 것을 요청하였다.’하나 지금은 황금을 발견할 수 없다.
◈ 高麗文宗十七年三司奏翼嶺縣産黃金請附貢籍(고려문종17년삼사주익령현산황금청부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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