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양양과 東海神廟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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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상상의 동물로, 물을 주관하며 인간의 길흉화복을 책임지는 존재로 고대사회부터 절대 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삼국사기 9) 에 의하면 용의 화상을 그려 놓고 빌었고 10) , 고려사 11) 에는 가뭄이 계속되면 오해신에게 기우제 12) 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양의 전통적으로 동해용왕의 상주처(常住處)이다. 동해신묘가 양양에 건립된 것은 고려시대 정동이라고 하지만 역사 · 문화적으로 고찰해 보면삼국시대부터 양양은 용왕의 상주처로 많은 사람들이 탐방하고 숭배하였다. 용왕 상주처인 양양은 동해용왕 관련 담론이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남효온(南孝溫) -전략-
낙산사는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인데, 그 절의 중이 그 사적을 전하기를, “의상이 직접 관음(觀音) 대사를 해변 굴속에서 만나니 관음이 친히 보주(寶珠)를 주고 용왕 (龍王)이 또 여의주(如意珠)를 바치기에 의상은 두 구슬을 받았다. 이에 절을 짓고 전단토(旃檀 土)를 가져다 손수 관음상을 만들었다.
지금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굴이 바로 관음의 머무른 곳이요, 뜰 가운데 있는 석탑이 바로두 구슬을 수장한 탑이요, 관음 소상은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이다.” 한다.
의상은 재계 후 칠 일만에 좌구를 새벽 물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안내해 들어가 공중을 향해 참예하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왕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칠 일 동안 齋戒하고 나서 이에 관음보살의 참모습을 보았다.
관음보살이 “좌상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다. 그 곳에 불당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법사가 듣고 굴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당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석으로 생긴것 같았다.
대나무가 다시없어지자 비로소 관음보살의 진신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법사는 자기가 받은두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그곳을 떠났다.
· 세종 18년(1436) 6월 4일. 경상도 감사에게 백성들의 숭배와 신앙을 금하게 하다.
이 앞서 종[婢] 중이(衆伊)란 자가 상언(上言)하기를, “여의주(如意珠)가 경상도 지리산(智異山) 오대사(五臺寺)에 있사오니, 만약에 불러서 서울에서 맞게 하면, 비가 억수로 쏟아질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경상 감사로 하여금 친히 가서 살펴보게 하니, 바로 수정으로 된 구슬(水精珠)이었다.
또 그 절의 비문에 이르기를, “수정(水精) 1매(枚)를 찾아서 무량수상(無量壽像)에 걸었다."하였다. 전에 이 때문에 이름을 수정사(水精社)라 하였고 그것이 여의주가 아님은 명백한 것이었다.
중들이 허탄한 말을 만들어 말하기를, “이 구슬은 바로 동해 용왕의 여의주(如意珠)인데, 용왕이 낙산관음(洛山觀音)에게 바친 것을, 이제 이 절에 옮겼다."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신하고 다투어가면서 숭배하고 믿어 그 괴이하고 허탄한 것을 좋아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임금이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의 숭배와 신앙을 금하게 하였다.
先是, 有奴衆伊者上言, 如意珠在慶尙道智異山五臺寺, 若招迎來京, 則當沛然下雨. 上怪之. 令慶 尙道監司, 使之親往審視, 乃水精珠也. 且其寺碑文曰, 索水精一枚, 懸於無量壽像前因名水精社.
其非如意珠明矣. 僧人等造爲誕妄, 乃曰此珠乃東海龍王如意珠也. 龍王獻于洛山觀音, 今移此寺. 愚 民信惑, 爭相崇信, 其好爲怪誕如此, 上令其道監司, 禁民崇信.
『太宗實錄』 72권, 세종 18년 6월 4일 己亥
·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 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배례 (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 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 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元)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의 종(奴)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 (明宗) 정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 13)
· 의상의 기적(義相異蹟) 이해조(李海朝)
고려의 승 익장의 기문에 낙산사 동쪽 수리쯤 해변에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굴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머물던 곳이라고 세상에 전한다. 굴 앞에 한자리 깔만한 돌이 있어 신라 의상법사가 이에 돌 위에서 전좌배례하며 관세음보살 진상을 진견하려고 14일을 기다려도 볼 수 없어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용이 붙들고 돌 위로 나왔다.
관세음보살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부면서 “내 몸은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를 따라가면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이르면 그곳이 내 이마머리다. 여기에 불전을 짓고 상설안배 하라” 하였다. 용이 바치는 여의주와 보옥을 의상께서 받아가지고 오니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았다. 이에 그 땅에 절을 짓고 용이 바친 옥으로 불상을 마련하여 봉안하니 곧 관음사요 수정염주를 소장한 보물의 절이 되었다.
고려 유자량이 병마가사 되어 관음굴 앞에 이르러 분향재배하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 노래하며 꽃을 두건 위에 떨어뜨렸다. 유자량의 시에 명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청조를이 사람이 만나 것이라고 말했다. 굴 왼편 한 기슭에 바다에 우뚝 솟아 예부터 의상이 머물던 곳을 이름 하여 의상대라 하였다. 대 앞에 구불구불 서린 여러 그루의 고송이 볼만하다.
高麗僧益壯記. 洛山寺東數里許海邊. 有窟可容舟. 世傳. 觀音大士所住處. 窟前. 有石可鋪一席.
新羅義相法師. 乃於石上展拜. 求見觀音眞像. 二七日未獲覩. 便投身海中. 有神龍扶出石上. 觀音 卽於窟中. 伸臂授水晶念珠曰. 我身不可覩. 但從窟上. 行至雙竹湧出處. 是吾頂上. 於此. 可營一殿.
安排像設也. 神龍獻如意珠及寶玉. 義師受珠玉而來. 有雙竹自抽. 乃於其地創殿. 以龍所獻玉. 造像 安之. 卽觀音寺. 藏珠於是. 寺傳寶之. 高麗庾資諒爲兵馬使. 到窟前拜稽. 有靑鳥啣花飛鳴. 花墜幞 頭上. 庾資諒詩. 明珠非我欲. 靑鳥是人逢云云. 窟左 一麓陡起入海. 舊稱義相所憇處. 名以義相㙜.
㙜前數株古松蟠屈可玩.
의상대사의 황홀한 일 義師事怳惚
바다에 투신하여 진상을 구했네 投海求眞像
용이 의상을 감싸 안으니 神龍護袈裟
석상에 오래도록 엎드려 있었네 宛在舊石上
스님이 머물던 곳 아득하여 蒼茫住錫處
옛날 누대는 천 길 벼랑에 서있구나 古㙜立千丈
대 앞의 소나무는 가지는 㙜前松樹枝
언제나 동쪽으로 향하리 幾時復東向
명암집 『鳴巖集』
· 세종 4년(1422) 1월 25일. 사헌부에서 전 판정주목사 변처후를 국문하기를 아뢰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전 판정주목사(判定州牧事) 변처후(邊處厚)가 일찍이 양양(襄陽)에 군수(郡守)로 있을 때, 군아(郡衙) 안에 간직된 추포(麤布) 90필, 건어(乾魚) 1백 50마리, 소금 10말 등의 물품을 온 곳에 바로 공문으로 회답하지 않았으며, 또 군아 안에 있는 건어와 관청 안에 있는 건어 합계 1 백 50마리, 해곽(海藿) 40속(束)으로 생고치(生繭) 6석(石)을 바꾸어 사사로이 사용하였다.
또 무녀(巫女)의 놋쇠 11냥(兩)을 거두어 군아 안에 있는 놋쇠까지 합하여 놋주발을 만들어 사사로이 썼으며, 또 경내(境內) 낙산사(洛山寺)의 진수정 염주(眞水精念珠) 21개를 비밀리 사고, 또 경내(境內)의 산성포 만호(山城浦萬戶) 이양수(李養脩)에게 소금을 청하여 면화(緜花)와닥나무(楮)를 바꾸었습니다.
공사(供辭)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은 명백히 공사에 자백(自白)하였는데도 처후(處厚)는 승복 하지 않으니,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범죄가 사죄(赦 罪) 전에 있었으므로 논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司憲府啓, 前判定州牧事邊處厚曾任襄陽時, 衙中所藏麤布九十匹, 乾魚百五十首, 鹽十斗等物來 處不直答通. 又以衙中乾魚及官中乾魚幷百五十首. 海藿四十束, 換生繭六石私用. 又收巫女鍮鐵十 一兩幷衙中鍮鐵,造鍮鉢私用. 又密買境內洛山寺眞水精念珠二十一枚. 又請鹽于境內山城浦萬戶李養 脩, 換緜花及楮. 辭連各人, 明白納招, 而處厚不承, 請收職牒鞫問. 上以犯在赦前命勿論.
『世宗實錄』15권, 세종 4년 1월 25일 癸未
· 『世宗實錄』권72, 18년(1436) 6월 4일(기해)
왕이 동해용왕이 낙산관음에 바친 여의주를 믿는 백성들이 숭배와 신앙을 금하게 하라, 백성 들의 절대적인 용왕숭배사상의 풍속을 알 수 있다.
· 『高麗史節要』권19, 원종(元宗) 14년(1273) 3월에 여의주를 송분에게 주어 원나라로 보내다.
3월 마강이 돌아갔는데 대장군 송분(宋玢)과 동행하여 가게 하였다. 원나라 왕후 가 일찍이 낙산사의 여의주 보기를 원하였으므로 분(玢)을 시켜 드리게 하였다.
· 『풍악록(楓岳錄)』백호(白湖) 윤휴(尹鑴)
-전략-
홍녹문의 원운은, ‘낙산사에서 노두(老杜)의 운으로’,
이곳이 용왕의 집자리인가 地卽龍王宅
어느 해에 절이 열었는가 何年梵宇開
하늘은 푸른 바다에 떠가고 天浮靑海去
산은 백두산에서 왔다네 山自白頭來
가을 풍경을 실컷 보고 縱目觀秋色
석대에 올라 쉬었네 扶笻倚石臺
여기에 올라 세월의 무상함을 登臨撫今古
생각하니 이런 일 저런 일 끝이 없어라 俯仰恩悠哉 후략
· 낙산사(洛山寺)에서 양양 부사(襄陽府使)인 이여복(李汝復) 경용(景容)종장(宗丈) 14) 을 만나서.
이날 눈이 크게 내렸다. 3수 택당(澤堂) 이식(李植)
누가 용왕 불러내어 옥가루 뿌리게 하였는가 誰喚龍公撒玉塵
머리 돌려 바라보니 절의 광경 새롭네 琳宮光景轉頭新
은백색 포말(泡沫) 거꾸로 쓴 푸른 바다요 滄溟倒接銀濤沫
봄철인 양 담복(薝葍)으로 하얗게 단장한 기수로세 祇樹粧成白葍春
세모에 올라와 굽어보니 그대로 마냥 절승(絶勝) 歲暮登臨仍勝地
하늘 끝 타향 만나 뵌 분 바로 우리 집안 어른 天涯會合是宗人
귀로에 도롱이 젖은들 무슨 걱정 있으리까 不愁歸路簑衣濕
구속 떨쳐 내버리고 술이나 한껏 드세 且鬪樽前漫浪身
지인도 창주의 취향이 있었던지 至人亦有滄洲趣
신령스런 그 자취 동해안에 남겼네 靈迹曾留海岸東
자비로운 천수 관음(千手觀音) 동방에 한 손길 뻗쳐 줌에 一手慈悲奔鰈域
웅장한 절 천추토록 홍몽을 제압하였네 千秋臺殿壓鴻濛
경어 우는 소리에 스님들 발우(鉢盂) 공양했고 鯨魚自吼僧催鉢
보배 기운 감돌면서 벽에서 무지개 뿜었네 寶氣常騰壁吐虹
백화 왕자가 지은 찬 한번 본떠 보려 해도 欲效白華王子讚
솜씨 겨룰 기막힌 시어(詩語) 없는 것이 부끄럽네 愧無奇語與爭工
진해(鎭海)의 낙가산(洛伽山)을 소백화산(小白華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곳도 바로 관음(觀音) 의 도량(道場)이다. 왕자 안(安)이 이에 대해서 찬(讚)을 지었는데, 무척이나 기이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15)
『澤堂先生集』
· 관세음보살의 신상(觀音神像) 이해조(李海朝)
쌍죽이 솟아 바다는 깨끗하고 雙竹湧海湑
법당의 불정은 한없이 높구나 孤棟架佛頂
관음상을 아름다운 옥으로 만들고 神像巧鑱玉
깊은 동굴 배 모습과 흡사하네 深窟恰容艇
청조가 천화를 물어다 떨구고 鳥銜天花墜
용이 토한 여의주가 빛나네 龍吐驪珠烱
옛 자취를 어루만지고 싶어 舊迹欲摩挲
오래 앉아 있으니 바람만 차구나 坐久風凄冷
명암집 『鳴巖輯』
· 관음굴(觀音窟)에서 노닐며 춘정집 (春亭) 변계량(卞季良)
나무꾼 따라서 산 속으로 들어가니 獨隨樵者入山門
양쪽 언덕 솔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었지 夾岸疎松路自分
몇 조각 채색기는 석양빛에 찬란하고 幾片彩幡明夕照
묏부리의 풍경은 가을 구름 가리었네 一峯寒磬隔秋雲
밤 연못에 하얀 기는 용이 살기 때문이고 夜潭白氣龍曾蟄
솔 달에 맑은 소린 출중한 학 때문이지 松月淸音鶴不群
송도를 돌아보니 십 리도 안 되는데 回望京都無十里
수레가 남북으로 시끄럽게 왕래하네 輪蹄南北正紛紜
『春亭集』
· 관음굴(觀音窟)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
운무 속 암자가 거센 물결을 누르는데 雲龕壓驚瀧
날아오를 듯한 서까래는 천정에 걸쳐있네 飛棟跨其頂
백길 깊은 곳에 현묘한 굴이 있어 玄窟百丈深
찬 등불 밤새도록 반짝이는구나 寒燈永夜炯
용의 궁궐 바로 가까이 있고 龍宮正鄰近
인어의 집 또한 나란히 있어 鮫室且比並
아침저녁으로 조수가 일고 早潮與暮潮
출렁이는 물은 태초의 기운과 통하네 潏潏通溟涬
단향목에 부처를 새기었는데 栴檀刻金仙
향기는 어찌 그리 그윽하게 퍼지는지 香氣何幽迥
선조께서 신령스러운 산에 기도를 하여 烈祖禱山靈
이에 하늘이 성인을 내시었네 聖人乃天挺
만년토록 왕위를 보위하고 萬年負黼扆
칠묘가 제사를 받게 되었도다 七廟饗烝鼎
누가 일렀던가 이 산신의 공이 孰謂嶽神功
위로 하늘과 같다고
『江漢集』
· 또 준 상인이 낙산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又送俊上人往洛山]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상인께서 박연에서 막 돌아와서 上人朴淵來
박연폭포 모습 내게 전해 주었네 傳我朴淵瀑
박연폭포 그 기세는 웅장하고 웅장하여 朴淵瀑布氣雄哉
유월에도 하얀 눈이 절벽에서 뿌려지고 六月白雪洒石壁
돌 절벽은 하늘 닿아 아득 높이 서리어서 石壁參天鬱穹崇
폭포의 물 은하와는 서로 간에 통했으며 瀑布水與銀河通
고모담은 물 깊어서 그 깊이가 만길이라 姑姆之潭一萬丈
파도 물결 내뿜어져 용왕궁을 만드는데 波濤噴作龍王宮
그 소리에 천 바위와 만 골짝이 울리어서 聲動千巖與萬壑
동천에는 벽력 치지 않는 날이 없다 하네 洞天無日無霹靂
내가 이 말 들었는데 말 다 끝나기도 전에 我聞此語語未已
흥 일어나 다시 구름 산을 향해 가려 하네 逸興却向雲山起
스스로가 말하기를 다시금 또 영동에 가 自言又作嶺東行
낙산에 가 푸른 바다 바라보려 한다 하네 將往洛山觀滄溟
낙산 동남쪽에서는 하얀 해가 오르는데 洛山東南白日出
첫닭 울 때 뜨는 해를 볼 수 있다 말 전하니 人傳鷄鳴見出日
상인이여 거기 갔다 속히 다시 돌아와서 上人速宜歸來乎
날 찾아와 삼족오의 모습 내게 말해 주게 須語我來三足烏
『東溟集』
양양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영랑호와 청초호가 양양군에 속해 있을 때, 황룡과 청룡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청초호에는 수룡이 살았고, 영랑호에는 암룡이 살았는데 서로 땅속으로 통하는 물길을 따라 오가며 살았다. 어느 날, 한 어부가 실수로 큰 불이나 청초호 주변의 솔밭을 태우게 되어 그 연기와 불길로 수룡이 죽고 말았다.
이때, 영랑호에 살던 암룡이 크게 노하여 이 지역에 가뭄과 흉어로 벌을 내였다. 이로 인해 어민들이 용을 달래고 흉사를 없애기 위해 정월 대보름이면 무당을 청하여 용신제를 지내여 암룡을 달래고, 수룡의 죽음을 위로하는 민속놀이가 거행되면서 놀이로 정착하였다.
나룻배 싸움은 결국 화합을 강조하기 위한 놀이로 두 마을이 하나로 어울릴 수 있는 놀이 구성이 흥미와 즐거움을 준다.이 호수와 관련된 많은 놀이가 전해져 오고 있다.
만천동 나룻배 싸움놀이
유래
속초의 양대 호수인 청초호와 영랑호에는, 각각 수룡과 암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만천동은 옛 지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청초호에는 수룡이 살았고, 영랑호에는 암룡이 살았는데 서로 땅 속으로 통하는 물길을 따라 오가며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어부의 실수로 큰 불이나 청초호 주변의 솔밭을 태우게 되어 그 연기와 불길로 인해 수룡이 죽고 말았다. 이 때, 영랑호에 살던 암룡이 크게 노하여 이 지역에 가뭄과 흉어로 벌을 내렸다. 만청동과 청대리 사이의 소야천(청초천)을 왕래하던 나룻배도 자주 사고가 났다. 이로 인해 어민들은 용을 달래고 흉사를 없애기 위해 정월대보름이면 무당을 청하여 용신제를 지내 암룡을 달래고, 수룡의 죽음을 위로 하였다. 그리고 이 때 만천동과 청대리를 왕래하는 나룻배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뜻으로 한 쌍의 나룻배로 힘을 겨루는 민속놀이가 거행되면서 놀이로 정착하였다. 만천동과 청대리 사이의 소야천(청초천)을 왕래하던 나룻배도 자주 사고가 났다. 용을 달래야 이런 흉사가 없어질 것이라 믿은 마을 사람들이 용제(龍祭)를 지내게 되었다.
용제 후에 두 마을 사람들이 나룻배 싸움을 하면서 힘을 겨루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기 시작하면서, 놀이로 정착하였다.
특색
음력 정월보름이 지나 날씨가 풀리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용제를 올릴 제일(祭日)을 택한다. 제주와 제관을 뽑고 마을에서 건장한 청년들을 뽑아 배에 태우고 용제를 올린다. 풍년과 풍어, 그리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린 다음 나룻배를 타고 상대마을로 찾아가서 전체 주민들에게 음복을 권하며 인사를 올린다. 제사와 상대 마을을 방문, 인사가 끝나면 나룻배를 몰고 자기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로 돌아온 나룻배에 신주(神主)와 메를 싣고 다시 호수로 나가 음식을 뿌리며 나룻배의 무사고를 기원한다.
이런 의식이 끝나면 양쪽 마을에서는 자기 마을이 우세하다고 시위를 벌인다. 마을에서 만든 음식과 술로 흥을 돋운다.
마을의 부잣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온다. 흥을 돋우면서 마을끼리 힘을 겨루는 놀이가 시작 된다. 양편 나룻배로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나룻배끼리 부딪쳐 밀고 나간다. 노를 젓던가 선정된 도구로 나룻배를 밀어 붙여 각기 상대 마을로 밀고 나간다. 상대 힘에 밀려 나룻배가 자기 마을에 닿게 되면 지고, 밀고 간 편이 승리하게 된다. 나룻배 싸움놀이가 끝나면 두 마을이 흥을 돋우는 놀이마당을 벌여, 서로 내년에 다시 힘을 겨루어 꼭 이길 것을 결의한다.
나룻배 싸움에 승리한 마을에서는 청년들에게 새경을 올려주고 도선료를 면제해주며 푸짐한 대우를 하게 된다. 나룻배 싸움은 혼례 때 나룻배에서 만나도 행해지고, 특별히 물건을 운반할 때도 행해진다.
나룻배 싸움은 전래의 어촌 생활에서 가뭄과 흉어를 용제(龍祭)를 지내어 극복하는 삶의 부활에 상당한 뜻을 두었다. 나룻배에서 싸워 이긴 신부는 첫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전해 진다.
구성과 놀이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마당 : 용제두 마을의 제관과 마을 청년들이 수룡과 암용을 위무하는 용제를 지낸다.
제2마당 : 음복 상대 마을을 찾아가 음복을 권하며 인사를 나눈다. 이후 각기 차기 마을로 되돌아온다.
제3마당 : 뱃놀이 장정을 뽑아 배에 태우고, 이들이 나룻터를 왕래하며 노래와 춤으로 나룻배의 무사고를 비는 의식을 행한다. 나루터 행사가 끝나면 마을로 되돌아 와, 힘 겨룰 준비를 한다.
제4마당 : 뱃싸움 징이 울리면서 마을사람들의 환성이 울린다. 장정들은 나룻배를 서로 밀어붙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제5마당 : 놀이마당 승패가 결정되면 이긴 쪽은 환호하고 패한 쪽은 한숨 짓는다. 이어 흥을 돋우는 놀이마당을 벌인다.
청초호 용갈이(草湖龍耕) 이해조(李海朝)
쌍성호 일명 청초호라고 한다. 부의 남쪽 사십 리에 간성과 경계에 있다. 둘레가 수십 리고, 매년 겨울 얼은 후에 얼음이 갑자기 물결을 일었다. 북쪽 기슭에 남쪽 기슭까지 마치 쟁기질로 물결을 갈라 엎은 것 같은 형상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이르기를 용갈이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이것으로 한해의 점을 쳤다고 한다.
雙成湖一名靑草湖在府北四十里杆城界周數十里每冬月合凍後氷忽鱗起自北岸至南岸有若犂破狀 村人謂之龍耕以此占年云
눈 속의 아름다운 풀은 雪裏種瑤草
용과 신선의 부름임을 아네 知有呼龍仙
긴 호수가 밭이 되어 長湖爲十畒
얼음 갈이가 연기 갈이 같구나 耕氷如耕烟
서릿발이 갑자기 햇살에 번쩍이고 霜鱗乍閃暎
하늘의 쟁기는 어찌 빙빙 도는가 雲耜何蹁躚
스스로 갈이 하고 또 비가 오는데
自耕又自雨 어찌 풍년이 아니라고 근심하는가 何憂不豊年
명암 『鳴巖集』
청초호의 용갈이(草湖龍耕)
김창흡(金昌翕)
잠용은 변화에 익숙하여 潛龍變化熟
연못에 밭이 있는 것 같네 在淵若在田
몸을 보존할 여력이 있어 存身有餘力
밭갈이 마치니 얼음이 단단히 얼었다 耕罷氷腹堅
쟁기질 흔적은 강하게 나타나 犂痕隨闊狹
호수기슭에서 점을 친다 湖岸占來年
몹시 더운 날 또 비를 내리니 炎天又行雨
용은 어느 때 쉬는가 龍兮幾時眠
잠룡(潛龍)-승천할 때를 기다리며 물속에 잠겨 있는 용
삼연집 『三淵集』
이상의 기록에서 고찰해 보면, 예부터 양양은 동해용왕의 상주처로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사 실을 인지할 수 있다. 조선조를 건국하고 초기에 신사(神祠)에 대한 이전 논의가 있었다. 즉, 고려조는 개성을 중심으로 정동인 양양을 선정하였는데, 방위가 어긋나기 때문에 강릉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양성지가 세조에게 건의 했지만 실행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즉, 세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16) . 남해신사 또한 이전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전설의 문제는 성종 27년(1490)강릉 안인포에 있던 수군만호영을 조산으로 옮기고 대포영 이라 칭한 것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수군영에는 신묘는 아니지만 신단(神壇)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함께 옮기면서 잘못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동해용왕의 상주처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은 고대사회부터 인간의 생명이고 미래이다. 동해안처럼 거친 파도와 삶 때문에 신앙이 더욱 강화되었다.
양양의 동해신묘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봄과 가을로 향축(香祝)을 보내어 중사(中祀)로치제하였다. 동해신묘는 고려조와 조선조에 통치이념으로 매우 중시하며 왕이 직접 관리하며 강화하였다.
동해신묘는 동해안 주민과 어민들에게 중요한 신앙적이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하지만 일제강 점기 일본의 한국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신묘를 부서지고 비석은 반으로 갈라지고 방치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민족사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동해신묘의 제대로 된 복원은 양양의 정신을 회복하고 미래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양양인의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동해안 주민들의 신앙적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동해신묘의 역사적, 문화적 연구와 고증을 통해 양양인과 동해안의 주민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명칭문제부터 정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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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三國史記』,卷三十二,雜誌,第一
10) 『三國史記』,卷三十四,眞平王五十年條,夏大旱移市畵龍祈雨
11) 『高麗史』,世家,四十二
12) 『高麗史』7 권11 세가 권11에는 고려 제15대 숙종 3년(1098년) 4월 21일 다섯 해신에 기우제를 지냈다.
『高麗史』33 권54지권8에는 고려 제15대 숙종 7년(1102년) 6월 20일 재상에게 명 하여 오방(五方)의 산과 세 곳의 海神에게 祭祀하게 하였다.
13) 『新增東國輿地勝覽』
14) 종장(宗丈): 집안 어른이라는 말이다.
15) 이식의 문장은 한문이 함축성과 살리면서 간결하고도 품격이 높았고, 5언율시를 잘 썼다.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풍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고 소설의 폐단을 강경하게 지적하고 소설배격론을 주장하며 허균을 공격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 시는 이식이 간성부사로 부임하여 낙산사를 지나면서 쓴 시이다. 첫 수는 낙산에서 바다를 바라보자 눈 내리는 모습을 용왕이 옥가루를 뿌려 은백색의 포말이 선궁 같고, 은백색의 포말을 뒤집어 쓴 푸른 바다, 너무나 아름다움에 모든 구속을 떨쳐버리고 술이나 마시면서 걱정 없이 살고 싶음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수는 낙산은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자비로움을 이야기 하며 의상대사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셨던 고사응 인용하고 있다. 세 째 수 에서는 안견의 수목화와 임억령의 시가 천년토록 아름다우며 전란으로 스님들이 모두 떠나 큰 변화로 폐허가 되었다며 심회를 표현하였다.
16) 『세조실록』 권38, 12년(1466) 윤 3월 13일, 세조가 낙산사에 거동하다.
『성종실록』 권208 18년(1487) 10월 5일에 의하면 정희왕후(세조의 비)가 일 년에 쌀 백 섬씩 낙산사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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