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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1.양양의 정체성

    페이지 정보

    조회 529회

    본문

    양양은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談論을 간직한 고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문화가 미래인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유적과 이야기가 우리의 삶과 생활, 그리고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양양의 풍속과 성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務農桑 恤喪葬 喜遊宴 尙文學 貴禮義 1)

     

    ‘농업에 힘쓰고,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놀이를 좋아하며,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귀하게 여긴다’는 기록에서 양양인의 面貌를 알 수 있다. 양양의 유가(儒家)사회는 문학을 숭상하고 예와 의를 소중히 하였다.

     

    문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숭하며 함께 즐겁게 생활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양양인의 풍속과 성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전통적으로 품위와 멋의 고을이다. 2)

    역사적으로 본다면, 삼국시대 신라 3) 가 강성해지면서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은 통일을 위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신라의 정책 때문이다. 예부터 양양은 접경구역으로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불교를 통한 一心과 佛國土를 통해 이 지역을 관리해 왔다. 삼국시대 양양의 불교는 불교의 聖地답게 우수한 문화유적이 전해 오고 있다. 삼국시대 양양은 불교의 성지이고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이었다.

    양양의 역사를 말하면서 불교와 화랑의 역사를 제외하고 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교의 성지고, 화랑들의 중심수련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화랑은 그 명예에 어울 리는 교육방법이 있었다.

     

    - 相磨以道義 

    - 相悅以歌舞 

    - 遊娛山水 無遠不至

     

    이상의 기록을 통해 중심순례지인 양양이 도의(道義)를 중시하는 의리의 고장, 문화예술 의 고을이다. 이러한 화랑의 전통이 오늘날 양양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擇里志』 山水條에 의하면, 산수의 승지는 당연히 강원의 영동이 제일(山水之勝 當以江原嶺 東第一)일 했고, 『新增東國輿地勝覽』 樓亭條 形勝條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我東韓 山水之勝 關東爲最)라고 기록하고 있다.

    儒家사회에서 연암이 景觀祿俸論을 언급하기 이전부터 선비와 문인들이 風光 좋은 양양을 찾아 은둔하거나, 유람하며 심회를 표현한 시와 山行記는 양양의 역사이고 문화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양양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림사회 4) 이다. 양양의 유림들은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조선왕조는 양양을 外親이라 하여 부로 승격하고 특별히 관리해 왔다 5) . 그 증거가 조선조 ‘양양도호부’건물 6) 이다. 이로 인해 양양의 유림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선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고 만세운동을 통해 조선왕조에 대한 의리와 충절, 그리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유림의 고장답게 

    3.1독립만세운동이 치열 7) 했던 것은 양양의 역사와 문화에서 기인한다.

    기록에 의하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민은 9 개면 132 리 중, 6 개면 82 리에서 6000 명이 참여하였다. 다른 지역 8) 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문화가 미래인 시대에 양양의 우수한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지역발전에 중요한 地 域學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서 襄陽學은 역사, 인문, 지리, 교육, 문화, 관광, 환경, 산업 등을 연구하여 미래발전을 탐색하는 학문이다.

    오늘의 양양문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양양의 문화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襄陽學의 正立은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학술대회는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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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輿地圖書』

    『關東誌』

    『關東邑誌』

    『峴山誌』(동국여지승람 인용)

    2)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저서 서애선생문집권지19)의 비갈(碑碣)에 고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배공신도비명 병서 (裵三益, 1581년 5월 양양부사 도임. 저서로는 시문집인 『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 6권이 있다) 퇴계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심경』과 『시전』을 전수받았다.

    바닷가 고을의 양양은 풍속이 순박하여 다스림도 풍속을 따르니 고쳐하지 아니했다. 그러니 마음이 너그럽고 까다롭지 아니하여 쇠잔함 없이 생기 있어 선정의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더욱 제사에 관한 사항을 중시하고 석전, 사직, 성황, 여제를 내 몸같이 모두 아끼며 제사를 중시하였다. 매년 동해신에 제사하는데 서울로부터 축문과 칙령이 내려오면 공께서는 경건히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아 하였다.

    數年 邑中稱治 去後多遺愛 襄陽 濱海之邑 土俗淳樸 公因俗爲治 乃更御之以寬簡 蘇殘起廢 政聲尤藉 重祀事 釋菜社稷 城隍厲祭 率皆以身親之 每年祭東海神 祝冊自京師至 公虔肅將事

    3) 양양은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격전장이 되었으며, 5세기 말엽에서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영향력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양양은 신라의 영역에 편제되었으니 익령으로 수성군의 속현으로 편제되 었다.

    4) 유교문화의 유적으로 향교, 서원, 사우, 루정, 효렬각, 신도비 등이 있다. 양양의 유교문화유적은 향교 1개, 서원 1개,

    사우 4개,누정 19개,기적비 19개, 선정비 20개, 효렬각 42개가 있다. 양양의 유교문화 유적은 영동지방 중에서 다양 하게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고 유실되었지만 기록을 토대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5) 『太祖實錄』권 11, 6년(1397)1월 24일(정축)

    본조 太祖 6년(1397)에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府로 하였으며 太宗 13년(1413)에 예에 따라 都護府로 하였고, 태종16년(1416)에 지금의 명칭인 襄陽으로 고쳤다.

    6) 양양도호부 건물은 동서남북 성 위에 루(樓)가 있다. 부의 문루는 醉山樓, 동쪽 성문 루 漢水樓, 남쪽 성문 루 峴山亭,

    객관 동쪽 언덕 通遠樓, 객관 남쪽에 太平樓, 성 안 臥遊軒 앞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愛蓮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루(樓)나 정자에 관한 시가 전해오고 있다.

    ·객사 35간, 아사 108간, 향청 10간, 훈련청 14간, 군기청 10간 총 177간(관동읍지),

    ·관원 부사, 교수 외 88명(현산지), 

    7) 만세운동으로 12명 순국, 수형자가 87명. 유공자 64명 

    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712면작일, 강릉시장에서 8,9명이 구한국기를 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20여명이 화창 하였으며 타 군중은 참가하지 않고 해산. 주모자 취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