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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동해신묘의 정체성과 복원에 대한 학술대회

    4.동해신묘의 시련과 복원문제(1)

    페이지 정보

    조회 530회

    본문

    동해신묘는 동해을 삶의 터전으로 생활하는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동해묘의 제사(海廟香火)

     

    동해신묘는 부의 동쪽 해변 송림 속에 있으며 봄가을에 제를 올린다.

    東海神廟在府東海邊松林間春秋設祭

     

    울창한 송림 속은 시원하고 고요한데 松林閴森爽 

    신을 모신 신궁은 엄숙하고 밝다 神宅儼明宮

    향을 피우니 하늘하늘 구름이 되고 爐香裊汀雲 

    깃발 날리어 바닷바람 일으키네 旗脚颺海風 

    모든 백성 늘어서서 제를 올리니 蜿蜿享百靈 

    여러 해 풍년 들 효험 있구나 穰穰驗屢豊 

    부끄러운 관리들 명심하고 愧乏吏部銘 

    바다를 맡은 신에게 치성을 드리네 致崇如祝融 

    현산 삼십경을 읊으며[峴山三十詠]

     

    명암(鳴巖) 이해조(李海朝)(숙종 35년, 1709년 2월 도임)

     

     

    관동록(關東錄)    동해묘에서(東海廟)

     

    동해묘 옆 소나무 숲 東海廟傍松樹林 

    짙푸르게 해 가려 낮에도 늘 그늘이네 蔥靑蔽日晝常陰 

    봄에 비바람은 신령한 변화 있고 一春風雨有靈變 

    사철 피리 소리 서로 화음 四節笙竽相和音 

    무당의 말 술자리에 황당하게 전하고 巫語盤筵傳怳怳 

    용왕 거처에 장막 닫힌 채 침침하구나 神居帷幕閉沈沈 

    올 농사 하나도 덕 보지 못했으니 今年穡事渾無賴 

    가을 제사에 감사하는 마음 아프겠네 秋社空傷報賽心 

    報賽: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

    『東州集 』(1679년 출간 추측)

     

     

    이처럼 시에서 보면 많이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설이 구체적으로 등장한 것은 허균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이전설에 대한 내용을 양양문 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들이 오랜 연구와 자세한 고찰을 통해 이전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였다.

     

    만력 갑신년(선조34, 1604) 7월 양양부 동산(洞山)에 사는 어부 지익복(池益福)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중, 바람이 그 배를 몰고 가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일주야 (一晝夜)를 달려 동쪽 한 섬에 닿았는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하여 왕국으로 데리고 갔다. 왕궁에 나아가니 정원에는 창을 든 병사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왕이라는 자가 보라색 옷을 입고 궁전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가 강릉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 천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기어 이곳에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상제께 호소하여 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 으므로 너의 힘을 빌어 관원에게 뜻을 전하고 옛 땅 내 집에 돌아가고자 하니, 너는 목민관 에게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몰아치게 할 것이니, 백성들이 나의 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고는 바람을 몰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하루가 못되어 동해 가에 돌아왔다.

     

    어부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관가에 나아가 스스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향임(鄕任) 이석림(李碩霖)에게 말하여 관에 보고하게 하였다.

    부사 홍여성(洪汝成)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전고(典故)를 들어 상고해 보니 가정(嘉靖-명 세종 연호) 병신년(중종 31년)에 사당이 강릉부 정동촌에서 이곳으로 옮겨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감히 귀신의 말을 인용하지 못하고 폐해기 많다는 이유로 옛 문서를 돌려주 기를 방백(方伯)에게 청하였으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해 을사년(선조 39년, 1536) 7월 관동지방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안변, 통천에서부터 남쪽으로 안동까지 수십 군이 혹독한 수해를 입어 백성과 가축 죽은 수효는 수만에 이르렀는데 강릉이 특히 심하였다.

     

    부사 홍공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여 지방 관리와 백성을 불러 의논하기를 “귀신이 사당을 옮기지 않으면 해를 내린다고 우리에게 경고한지 1년 만에 수해가 이 지경 이니 이는 과연 그 징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의 힘으로는 옮길 수 없으나 그 사당을 보니 퇴락하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지 않고 있다. 어찌 우리가 서로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우리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의 할 일을 수행하고 정성으로 받든다면 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드디어 녹봉을 떼 내어 공장이와 인부를 모아 향임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여 기와를 갈고 벽을 바르고 담장을 둘러쌓고 신문(神門)을 만들고 마당 고르는 일을 두어 달 만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이 몸소 제사를 지내니 이때부터 양양이 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글을 청하기에 나는

    “우리나라는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지리의 중앙을 가려 설치하였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이며 더욱이 고을 한가운데가 상개(爽塏-앞이 탁 트여 밝은 땅)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정동이라 이름하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제사지냈다. 그런데 공희왕(恭僖王-중종) 때 강릉부 사람으로 장원급제한 심언경(沈彦慶), 심언광(沈彦光)형제가 용왕의 사당에 비용이 든다고 하여 방백에게 말하여 상께 글을 올리고 까닭 없이 옮겨버렸다. 근래 편찬한 여지서(輿地書)에는 ‘동해 용왕의 사당은 양양에 있는데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사당 자리는 낮고 더러워 귀신의 영을 평안히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니 귀신의 노여움도 당연하다 하겠다. 언광형제의 몰락도 이것 때문일 것이며 을사년 바람과 비의 변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신이 사람에게 밝게 고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하기 때문이다. 부사의 사당 개수는 예에 들어맞는 처사이니 어찌 그를 덮어 둘 것인가”하고 갖추어 기록하고 이에 송(頌)을 드린다.

     

    바다는 천지간에 海於天地 

    가장 큰 것이다 爲物甚鉅 

    그 누가 왕이 되어 孰王其中 

    바람 불고 비 오게 하는가 以風以雨 

    강하고 강한 용왕신이라 矯矯龍神 

    하늘의 용은 이것 같음이 없네 天用莫如 

    복 내리고 화 내림에 降福降沕 

    신령스러운 응보 매우 진실하네 靈應孔孚 

    그 누가 그 곳 낮은 데에 疇就其庳 

    내 집 옮기게 하였는가 俾徒我宇 

    적은 비용 아끼니 惜其小費 

    신의 노여움 마땅하네 宣神之怒 

    귀신이 계신 곳은 神之所都 

    조개집 구슬 궁궐이네 貝闕珠宮 

    세상의 오두막집 俗之陬居 

    뭐라 연연하여 섭섭해 하겠는가 奚戀以恫 

    아니로다 정성은 不然誠敬 

    신의 흠향하시리라 神所享者 

    불경한 자가 방자하고 不敬者慢 

    불선하면 게으른 법 不誠則隋 

    땅을 쓸고 물 떠 놓아도 掃地酌水 

    정성껏 공경하면 강림하리 誠敬則臨 

    좋은 자리 좋은 음식 차려 놓아도 玉寢瓊饔 

    방자하면 흠향하지 않는다네 慢則不欽 

    옮겨 놓고 더럽힘은 移以汚之 

    게으르고 방자한 일 卽隋則慢

    어찌 제수의 많고 적음에 豈以豊殺 

    기뻐하고 탄식할까 而爲忻歡 

    알려줘도 안 따르니 告以不從 

    홍수피해 마땅하네 宜水之洪 

    온화한 원님이 溫溫邦侯 

    공경으로 신 받드리 事新以恭 

    새로 사당 단장하고 乃新其構 

    제수차려 제 올리오 乃腆其饗 

    신이 돌아보고 기뻐하여 神顧以喜 

    바람같이 와 흠향하네 風來悽愴 

    공경을 다 하여 정성껏 받든다면 克敬克誠 

    어찌하여 강릉, 양양 가리겠는가 奚擇江襄 

    원컨대 이곳이 길이 진정하시어 顧此永鎭 

    해마다 풍년들게 도와주시오 資歲禳禳 

    백성들 상하지 않으며 民無札傷 

    전란이 미치지 못하게 하오 五兵不入 

    길이길이 만년토록 於萬斯年 

    우리 고을 도와주소서 祐我獘邑 

    『惺所覆瓿稿』附錄  

    중수동해용왕묘비(重修東海龍王廟碑)

     

    이상 허균의 기록내용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남공철(南公轍) 찬(撰) 28)

     

    바다는 왕공(王公)과 같은 지위이면서도 망심제(望沈祭)를 지내는 것은 그 덕을 갚으려는 것이다. 주역(周易) 「설괘(說卦)」에 이르기를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물보다 성한 것이 없다. 물이란 뜻은 불어난다는 윤택하게 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글자가 만들어짐에 있어 두개의인(人)이 교차되고 일(一)이 가운데 나온 것이 수(水)이다. 일(一)은 수의 시작이고 두 사람은 남녀를 비유한 것으로 음양(陰陽)이 교차되어 물건은 일(一)에서 시작이 된다.

    주제(周制)에 네 차례를 지내는데 경칩(驚蟄)에 교(郊)를 인하여 제사지내고 입하(立夏)에 영기(迎氣)로 인하여 제사를 지내고 백로(白露)엔 우(雩)로 인하여 제사를 지내고 대한(大寒)엔 향 (蜡)으로 인하여 제사를 지내 한해 모두 네 번 제사를 지낸다. 왕의 양규(兩珪)는 아래로 오촌 (五寸)을 둔다. 희생으로는소뢰(少牢) 를 쓰고 폐백(幣帛)은 방색(方色) 으로 하고 왕(王)과 시동 (尸童)은 모두 취면(毳冕)을 쓰고 음악은 유(蕤賓)를 연주하고 함종(函鐘) 을 노래하고 대하(大 夏)에 춤추기를 다섯 번 한다.

    헌기(獻器)는 가지런히 하는 것은 조천(朝踐)을 드리는 것이고 청주(淸酒)는 궤식(鐀食)을 드리는 것이다. 후세에 또 동해(東海)에 왕의 작호를 더하여 광덕왕(廣德王)이라고 하였고 서해 (西海)를 광윤왕(廣潤王), 남해(南海)를 광리왕(廣利王), 북해(北海)를 광택왕(廣澤王)이라고 하여 제후(諸候)의 예로 지역안의 악독(嶽瀆)에 제사를 받았다. 우리나라도 동해신묘(東海神廟)가 양양부(襄陽府)의 다스리는 동쪽 10리에 있는데 성상(聖上) 정종(正宗) 24년 어사(御史) 권준(權 晙)이 언신(言臣)으로 군현(郡縣)을 갔다가 동해신묘제사(東海神廟齊舍)의 담장이 허물어져 마땅히 다시 수리를 해야 하는데 민가(民家) 여덟 집이 묘(廟)근처에 살아 모두 철거하여 닭이나 개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게 하여 악독(嶽瀆)의 제사에 엄숙하게 하니 사방의 홍수와 가뭄, 질병 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매우 숭상하고 높이는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법식을 지어 금지하게 하는 날 관찰사(觀察使)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臣) 공철(公轍)이 마침 관동(關東)에 순찰사(巡察使)로 삼가 예부(禮部)가 되어 거행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급히 향축 에서 알아서 하라는 말을 받들고 일을 거행하는 일에 대하여 듣고 향축(香祝)이 서울에서 와 준(晙)이 차헌관(差獻官)으로 제사를 지냈다.

    아! 질병으로 아픈 사람은 반드시 호소하는 것은 사람의 정(情)으로 백성들 중 해신(海神)을부모처럼 여기고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비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제사에는 항상하는 제사가 있으니 저 우리석은 남녀들이 금백(金帛)을 가지고 온자들이 장차 신에게 아첨을 구하는 것은 복을 맞이하려는 예가 점점 불어나면 불어 날수록 넘쳐나 한층 더 고집함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금지시키는 것은 바로 신을 지극히 높이고 바른대로 백성들을 인도하 려는 것이니 일거양득(一擧兩得)이다. 마침내 이 일을 기록하고 돌비석에 새겨 그 느낀 것을 푸니 묘우(廟宇)가 때에 따라 보수하는 것들에 대하여서는 유사(有司)를 두었다. 명(銘)하기를,

     

    궁(宮)은 훤칠하고 

    담장을 펼쳐졌네.

    제기(祭器)는 아름답고 

    옥과 비단 

    환히 술을 따르고 청소를 하여 

    자리를 펴 사람들을 기쁘게 하네.

    신은 모두 취하고 배불리 먹어 

    신은 이미 안정이 되었네.

    어사가 동쪽에서 에서 와서 

    돌아가 왕께 아뢰네.

    악독(嶽瀆)에 제사를 드리니 

    심제(沈祭)와 망제(望祭)라네.

    어리석은 것은 백성들 

    잠깐이라도 복을 구하려 

    곡식을 쥐고 돈을 던져 

    오랫동안 신의 수치를 만드네.

    예는 점점 태만해져 

    신은 돌봄은 대적할 길 없네.

    왕께서 방백(方伯)에게 명하여

    그 다스림 지금부터 시작이라네.

    부사(府使)에 칙명을 내려

    늘 제사를 드리게 하고 

    축책(祝冊)을 베풀어 

    이에 어사(御史)에게 명하였네.

    크게 우리 왕 드러나 

    예로서 신을 섬겨 

    바른대로 백성들 인도하고 

    사랑은 수 많은 백성들에게 미쳤네.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신은 마땅히 보답하네.

     

    보답함이 어떠한가 

    우리 동쪽 종족에게 은혜롭네.

    많은 물고기 

    풍요로운 곡식 

    이미 풍성하고 많고

     노인들 장수하고 

    만억년이 지나도록 

    바다가 조용하고 황하가 맑아지도록 

    만년토록 

    태평하게 하소서.

    숭정(崇禎) 기원(紀元) 경신(庚申) 윤(閏) 4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남공철(南公轍)은 찬(撰)하노라.

     

    『江原道誌』(1940년 9월), 단사(壇祠) 

    동해신사(東海神祠): 군 동쪽에 있다. 봄가을로 향축을 내여 제사 지낸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신사(神社) 

    신명신사(神明神社): 양양면 남문리에 있다. 대정(大正) 12년(1923) 계해에 건립되었다. 조황대신(照皇大神)을 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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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 江原道觀察使南公轍撰 海與王公同位望沈之祭報其德也 易說卦曰潤萬物者莫盛於水水之爲言演也 故其立字兩人交一以中出者爲水一者數之始兩 人譬男女言蔭陽交物以一起也 周制四次驚蟄因郊而祭立夏因迎氣而祭白露因雩而祭大寒因蜡而祭歲凡四祭王兩珪有邸五寸 牲用少牢幣視方色王及尸皆服毳冕樂奏蕤賓歌函鐘舞大夏用五獻器齊是朝踐之獻也 淸酒是饋食之獻也 後世又加王爵東海 曰廣德王西海曰廣潤王南海曰廣利王北海曰廣澤王曰禮諸候得祀方內嶽瀆我國亦有東海神廟在襄陽府治東十里聖上正宗二 十四年御史權晙言臣行郡縣見東海神廟齊舍墻垣多頹廢宜修治民家之八居近廟者一倂撤去毋使鷄犬相聞肅敬於嶽瀆之祀而 四方之以水旱疾苦祈禱者聚焉 甚非所以致崇極之道諸著爲式以禁敎日可命觀察使主其事臣公轍適按關東謹作禮部知▨擧行 事說驛聞香祝自京師至以晙差獻官而祀之噫疾痛必呼人之情也 民之視海神如父母不護者祈禱焉 固宜然祀有其常祀彼遇夫 遇婦執金帛而來者將以求媚于神而徼福禮滋甚漫則層執甚焉 朝廷之禁之乃尊神之至而導民於正也 一擧而兩得矣 遂述其事 刻石碑解其感至於廟宇之隨時修補者有有司存銘曰有宮變變有墻翼翼邊豆▨嘉維珪及帛於粲酒掃肆筵說凡神具醉飽神旣安 正御史自東歸奏于王岳漬有祀曰沈曰望蚩蚩者珉凡有假求握粟擲錢久爲神羞禮滋益慢神顧不敵王命方伯其始自今勅其府使 袛存常祀迺宣祝冊乃命御史丕顯我王以禮事神導率土之正愛及衆民民皆稽首神宜酬蕙酬之維何惠玆東裔▨有魚矣 多黍多稻 旣富而庶黃髮壽考維萬億年海晏河淸維萬有▨偕我太平28) 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 江原道觀察使南公轍撰 海與王公同位望沈之祭報其德也 易說卦曰潤萬物者莫盛於水水之爲言演也 故其立字兩人交一以中出者爲水一者數之始兩 人譬男女言蔭陽交物以一起也 周制四次驚蟄因郊而祭立夏因迎氣而祭白露因雩而祭大寒因蜡而祭歲凡四祭王兩珪有邸五寸 牲用少牢幣視方色王及尸皆服毳冕樂奏蕤賓歌函鐘舞大夏用五獻器齊是朝踐之獻也 淸酒是饋食之獻也 後世又加王爵東海 曰廣德王西海曰廣潤王南海曰廣利王北海曰廣澤王曰禮諸候得祀方內嶽瀆我國亦有東海神廟在襄陽府治東十里聖上正宗二 十四年御史權晙言臣行郡縣見東海神廟齊舍墻垣多頹廢宜修治民家之八居近廟者一倂撤去毋使鷄犬相聞肅敬於嶽瀆之祀而 四方之以水旱疾苦祈禱者聚焉 甚非所以致崇極之道諸著爲式以禁敎日可命觀察使主其事臣公轍適按關東謹作禮部知▨擧行 事說驛聞香祝自京師至以晙差獻官而祀之噫疾痛必呼人之情也 民之視海神如父母不護者祈禱焉 固宜然祀有其常祀彼遇夫 遇婦執金帛而來者將以求媚于神而徼福禮滋甚漫則層執甚焉 朝廷之禁之乃尊神之至而導民於正也 一擧而兩得矣 遂述其事 刻石碑解其感至於廟宇之隨時修補者有有司存銘曰有宮變變有墻翼翼邊豆▨嘉維珪及帛於粲酒掃肆筵說凡神具醉飽神旣安 正御史自東歸奏于王岳漬有祀曰沈曰望蚩蚩者珉凡有假求握粟擲錢久爲神羞禮滋益慢神顧不敵王命方伯其始自今勅其府使 袛存常祀迺宣祝冊乃命御史丕顯我王以禮事神導率土之正愛及衆民民皆稽首神宜酬蕙酬之維何惠玆東裔▨有魚矣 多黍多稻 旣富而庶黃髮壽考維萬億年海晏河淸維萬有▨偕我太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