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 영혈사(靈穴寺)의 영천(靈泉)에 얽힌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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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설악산 관모봉 동남쪽 명당에 영혈사를 세웠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원효는 신라의 경주궁궐 앞 거리에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誰許没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라고 소리 높이 노래하니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를 요석궁(瑤石宮)으로 맞아드려 혼인한 지 사흘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정을 맺게 하였다. 영민한 설총(薛聰)의 아비가 된 원효는 양양의 관음굴에서 관음진신을 친견하지 못하고 명산인 설악산에 들어가 관모봉 동남쪽 기슭의 명당자리에 신라 31대 신문왕 9년(689년)에 영혈사를 짓게 하였다.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원효가 영천을 찾고서 절 이름을 영혈사라 하다.
절을 일으켜 세우고 보니 만물의 생장에 절대 필요한 샘물이 없어 절 근처에 샘이 날 만한 곳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샘을 얻을 방도가 없자 원효대사는 밤낮으로 부처님께 샘이 솟는 곳을 찾아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사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절 근처 한곳을 가르쳐주며“이곳을 파면 물맛이 좋은 샘이 나올 것이다. 이 샘은 그대의 정성이 지극하여 솟는 샘이니 보통 샘과는 다르다. 아무리 가물거나 장마가 져도 이 샘은 물량이 변동 없을 것이다. 만약 그 샘물이 다른 곳으로 갈리어 가면 이 샘의 물도 줄거니와 이 절도 크게 번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꿈에서 깨어난 대사는 백발노인이 일러주던 장소에 가서 샘터를 팠더니 과연 맑은 샘이 솟아났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샘물의 양이 일정하게 솟아나므로 이 샘을 영천(靈泉)이라 이름하고, 이 절 이름도 영혈사(靈穴寺)라 부르게 되었다.
영혈사에 금당에 모셔진 원효대사 진영
원효가 영혈사의 영천을 홍련암(紅蓮庵)에 끌어온 샘터의 설화
원효는 영혈사를 세운 뒤에 낙산사에 가서 한때 홍련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 암자에 식수가 없어 낙산사 본사의 샘물을 길러다가 먹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사는 이곳을 찾아드는 신도와 승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샘을 하나 찾아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며칠을 두고 홍련암 근처를 여기저기 파보았으나 샘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전에 영혈사에서 샘 때문에 고생할 때 찾아왔던 그 노인이 나타나서“홍련암 옆 바른쪽에 샘터가 있다.”라고 알려주면서“그런데 그 샘물줄기는 영혈사의 영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천의 물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라고 일러주곤 어디론지 사라졌다.
대사는 잠에서 깬 그 날 새벽에 일어나 백발노인이 알려준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물맛 또한 영혈사의 영천 물맛과 똑같았다. 이 샘이 지금도 홍련암 옆에 있는 바로 그 샘물이라고 전한다.
영혈사
영혈사의 영천과 낙산사 홍련암과의 역학관계
대사는 지난날 영혈사의 영천을 얻을 때 백발노인이 일러주던 꿈 생각이 뇌리에 스친다.‘ 만약 그 샘물이 다른 곳으로 갈리어 가면 이 샘의 물도 줄거니와 이 절도 크게 번성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일러준 말의 생각에 가슴이 철렁한다.
낙산사는 대찰이니 더 번창하지 않아도 좋거니와 또한 홍련암도 식수의 불편함이 있으나 수고로울 뿐 견딜만하였었는데, 모처럼 세워놓은 영혈사가 번창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고 홍련암의 샘을 막아버리기로 작정하고서 샘이 터져 나온 샘구멍을 막으려고 온갖 방도를 다 썼으나 한번 터져 나온 샘구멍은 막을 수가 없어서 샘터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놓았다.
대사는 영천의 물이 정말로 반으로 줄었는가를 알아보려고 다음 날 행장을 꾸려 달음질쳐 영혈사에 다다르니 영혈사의 중들이 울상이 되어“어제 갑자기 영천의 샘물이 반으로 줄어들어 겨우 우리들의 식수를 이어줄 정도밖에 되지 않겠으며, 예불하러 찾아오는 신도들의 용수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전과 같이 샘이 솟아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영혈사의 미래가 걱정됩니다.”라고들 한다.
대사가 이 말을 듣고 영천에 가보니 과연 샘이 반으로 줄어 있어 뉘우치는 바가 없지 않으나 별도리가 없 다고 홀로 탄식하였다.
매년 석가탄일에는 영혈사에도 등불이 불야성을 이룬다.
영천의 물을 홍련암으로 반이나 보내준 탓일까? 영혈사는 낙산사처럼 크게 번창하지 못한 채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는 듯 한적하나 6·25전쟁 때 설악산지구 전투에서 숨져간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 둔 지장전(地藏殿)이 있어 해마다 석가탄신일에 인근 부대의 국군장병들이 참여하여 호국영령 천도제를 여는 호국의 사찰로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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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영혈사는 사찰 명칭이 영혈(靈穴)이어서“영험한 굴”이 있다는 것인데 이곳에는 영천(靈泉)이라 하여 샘이 솟는 바위가 있어 영혈사라 이름하였다. 숙종 16년(1690) 사승(寺僧) 취원(聚遠)이 영혈사를 중건하고“영천사”라 개칭한 바 있으며, 고종 24년(1887) 사승 지화(知和), 도윤(道允)이 영천사를 중수하면서 다 “영혈사”로 고쳤다. 신령스러운 샘[泉]에서는 깨끗하고 맛좋은 약수가 솟아나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영혈사 합동위령제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설악산곰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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