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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시기 양양군의 군정 통치에 대한 고찰

    32. 강현국민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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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강현국민학교 교감


    김남하 (남, 88세, 양양읍 남문3리, 당시 교사)

    면담일 : 2015. 8. 16


    19.jpg


    - 21 세 어린 나이에 강현국민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났다 .
    1945 년 8 월 15 일 해방되었을 때 강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 년 놀다 평강농업학교 2 학년에 다녔다 . 당시에는 춘천에 농업학교가 있고 고성 금강중학교 , 강릉에 중학교가 있었다 . 해방이 되면서 북한 인민공화국에서 교사를 뽑는다고 하여 응시하여 합격하여 고성 공현진인민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 그때 청년들을 인민군으로 뽑아 가는데 교사는 제외하였다 .


    1951 년 봄 국군이 양양군을 탈환하여 군정이 실시되어 당시 민정관 아래 학무 계장을 두었는데 인공 때 민주당 원이던 함종악씨가 맡아했다 . 그는 왜정 때 서울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한 분이었다 . 군정 하에서 교사를 뽑는다고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하여 냈더니 나는 당시 21 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현국민 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났다 . 교사들은 인민공화국 때 교사 , 피란 나온 학생 , 고급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교사로 15 명이 뽑았고 , 학교는 1 개면에 1 학교씩 있었다 .

    군청 학무계로 발령이 나서 군청에 가보니 직원 3~4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 업무는 학교를 감독하고 교재를 알선하고 교사들은 민정관의 발령으로 이동하였 다 .


    - 시멘트 포대로 공책을 만들었고 , 책상은 집에서 만들어 지고 다녔다 .

    학교들은 화재를 입어 불타지 않은 큰 건물에서 공부하고 바닥은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했다 . 시멘트 포대로 공책을 만들었고 , 책상은 집에서 만들어 지고 다녔다 . 강현국민학교는 회룡리 동사에서 공부했는데 책상이 없어 군인들이 포사격을 하고 남은 빈 상자를 모아주어 책걸상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학생들이 집에서 책상을 만들어 지고 와서 사용하고 집에 갈 때는 또 지고 갔다 .

    교과서는 학생들은 없고 교사만 가지고 있어 칠판에 쓰면 학생들은 베껴서 공부했다 . 종이도 없어 누런 종이나 시멘트 포대를 가위로 잘라 공책을 매서 사용 했다 . 군청에 1 년간 근무하다가 대포국민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났다 . 교장은 김교욱 , 김진익씨가 맡고 있었다 .

    군정이 정착되면서 교원정리가 있었다 . 조건은 북에 협조한 자등은 정리 대상이 되어 그만두고 군청에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시험을 봐서 정규직으로 5 급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