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蘘陽의 漢詩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13. 조신(調信) / 무극(無極) 일연(一然)

    페이지 정보

    조회 31회

    본문

    잠시 즐거운 마음은 이미 가버리고

    근심 속에 남모르게 늙어버렸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노생은 인생이 한바탕 꿈인 것을 깨달았네 

    몸을 다스림에 잘못됨은 먼저 정성인데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어찌 가을날 청야몽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열반에 이르리오 

     

    快適須叟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臧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以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三國遺事』

     

    일연(희종2년, 1206년~충렬왕15년, 1289년)의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임•(睦庵)이다. 경주 장산군(章山郡 : 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彦弼)이다.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禪)수행을 위해 여러 곳을 유력하였고 여러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九山 門) 사선(四選)에의 으뜸이 되었고 22세에는 최고 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가장 우수 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고종 14년(1227년)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급 제한 이후 포산(包山 : 경주 근처 현풍현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무주암(無住庵)•묘문 암(妙門庵) 등지에서 머물렀으며,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 선사(禪師) 가 되었다.

    1249년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南海) 정림사(定林社)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최이에게 반발한 정안이 수선사(修禪 社) 계통의 승려를 기피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일연을 초청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지산문의 승려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1251년에 완성된 대장경 조판 중 남해분사 (南海分司)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원종 2년 (1261년) 원종의 명에 따라 강화도에 초청되어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눌 (知訥)의 법맥을 계승했다. 이는 그가 가지산문에서 사굴산문(闍堀山門)으로 법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원종을 옹위한 정치세력이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해 일연을 이전의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대신한 계승자로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연은 중앙정계와 관련을 맺 은 이후,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雲海社) 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仁弘社)를 중수한 후 왕 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湧泉寺)를 불일사 (佛日社)로 개명했다.

    충렬왕 3년(1277년)부터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곳 에서 『三國遺事』의 집필에 착수했다. 1283년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 (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 인각사(麟 角寺)에서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열었는데, 이는 가지산문이 일연을 중 심으로 고려 불교계의 전 교권을 장악한 것을 뜻한다. 1289년 7월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7월 인각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해 10월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시호 는 보각(普覺)이고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삼국유사』찬술을 위해 1278년에 이미〈역대연표〉를 작성하고, 이후 그의 나이 73~76세에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찬술했다. 저서로는 『語錄』2권, 『偈頌雜著』 3권 『삼국유사』5권, 『중편조동오위』2권, 『祖派圖』2권, 『祖庭事苑』30권, 『禪 門頌事苑』30권, 『大藏須知錄』3권 『諸乘法數』7권 등이 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11년(1285년)에 일연스님이 지은 5권 2책의 역사책이다. 인 종 23년(1145년)에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편사관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50권 10책의 기전체 사서(紀傳體 史書)『삼국사기』이다 이 두 책은 우리 고대사 연구에 가장 귀중 한 보물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기재할 수 없는 내용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 여 그 의미가 크다.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 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으로 항목을 나누어 고조선을부터 후삼국까지의 역人卜 지리, 문학, 종교, 미술, 민속 등 문화 전반인 내용을 기술하였다.

    이 글은 『삼국유사』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조신전의 마지 막에 이 전기를 읽고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면 어찌 조신사의 꿈만 그렇겠는 가. 지금 모두가 세속의 즐거운 일만 기뻐하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쓴 글이다.

    낙산은 불교의 성지이고, 깨달음의 공간이다. 낙산이란 원래 관음보살이 있다는 서역의 보타낙가산(寶陀洛伽寺)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관음보살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 해줄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의 소원을 해결해 주는 보살이다. 낙산의 공간적 배경을 고통 과 슬픔을 깨달음의 세계로 설정하였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함께 하는 자비의 도량으 로, 이곳과 관계된 의상과 원효는 한국불교를 발전시킨 고승으로, 두 고승의 소중한 만 남은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지만 신앙적 형태는 달랐다.

    원효는 관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이 부족해서이 다. 법사들이 만난 여인은 모두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원효 같은 고승이 왜 깨닫지 못했 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대목이다. 논에서 벼를 베던 여인에게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 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농경사회에서 벼는 먹고살아가는 가장 중 요한 양식이었다. 이것을 달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본다면 여인에게 가 장 중요한 것을 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속세의 욕망을 끊어야 할 스님에 대한 경계로 보인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에 정성이나 성의가 부족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인다는 겸손이 부족했던 불자였다.

    다리 밑에서 월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원효가 물을 청하자 여인이 더러운 물을 떠 주자 법사가 엎질러 버리고 다시 깨끗한 냇물을 떠 마신다. 속세의 욕망을 끊어야 할 월 수백을 빨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모습에서 법사의 의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세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파랑새가 '스님 그만 두시오,한다. 그리고는 숨어버 린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소나무 밑에 신 한 짝 있었다. 그리고 법사는 절에 이르러 관 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을 보고 비로소 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 의 진신임을 알게 되었다. 법사는 의상이 만났던 장소에서 관음보살의 진용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풍랑이 심해 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이 이야기에서 두 스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지극한 기도와 불심으로 속세의 욕망을 끊고 불도에 정진했던 의상과 반면에 속세욕망을 끊어야할 불자가 여인을 보고 희롱하 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다.

    조신전 같이 꿈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우리 문학사에서 고대설화에서부터 시가, 수 필,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현해 왔다. 꿈을 소재로 한 작품은 민족의식과 관계있는 것으로 꿈의 서사양식은 인도의 불경 『잡조장경』의 「사라나비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도 깨달음을 주기 위한 서술로 불경 속에 수록되어 중국의 육조시대나 당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불경역경사업이 성행하여 당대 소설인 「침중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 「침중기」를 일연스님이 읽고 조신전 창작 에 영향을 받았다.

    꿈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문학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 신으로, 이 작품은 우리 소설사에서 최초의 소설로 그 배경을 낙산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성지이고 깨달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신라말기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의식반영으로 사회전반적인 모순과 현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