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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蘘陽의 漢詩

    338. 풍악록(楓岳錄) 백호(白湖) 윤휴(尹鑴) / 한글 번역 3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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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불과 같다고 하는데 불은 다른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혹은 풀에 붙거나 혹은 나무에 붙거나 또 혹은 다른 물건에 붙어야지 만약 그 물건들이 없다면 그 불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희로애락(喜怒哀樂) 의 감정 발동은 없을지라도 잠깐 사이에 얼핏 스치는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인데 그 역 시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노선이 말씀하신 이른바, 거울이 비치지 않고 물이 파도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무엇으로 증험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논리라서 이 노승(老僧)으로서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네요.”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시오. 전인들 화두(話頭)에 얽매이지도 말고 문자(文字)를 가지 고 참조 고증할 것도 없고 다만 내 마음에 얻어진 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와서 내게 말하시오.”

    했더니, 그 중이 그러겠다고 하고 떠나갔는데, 밤이 되어 간찰 하나를 부쳐왔다. 거기에 이르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이라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염려도 없고 형체도 소리도 없는 것이지 요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마음은 있는 것이외다.” 하고, 또 시가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은 언제나 그 빛이요
    점점이 푸른 산은 만고의 모습이어라
    그나 내나 유별나게 다른 것이 뭐 있으리
    불전에 분향하며 종을 치는 거라네

     

    明明白月千秋色
    點點靑山萬古容
    伊我別無竒特事
    焚香佛前打鳴鍾

     

    했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에 모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물론 있기는 있으나 다만 그것은 순간이고 지 속하기란 매우 어렵다.'' 했기에, 내가 이르기를,

    “그대 본 것이 매우 정밀하고 말도 다 좋은 말이오. 나도 시로 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 나 지금 기좌(忌坐)중이어서 내일로 미루어야겠소.” 했는데, 그 중은 그길로 물러갔다.

     

    17일(기미) 맑음. 나도 재계가 끝났고 대옥도 제소(祭所)에서 돌아왔다. 나더러 동해신 묘비문(東海神廟碑文)을 지으라고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작별을 고했는데, 그날 모두 한 번 실컷 즐기고 싶었으나 마침 관사(官事)가 바빠 부득이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에 간성 군수 윤군이 행리 속에서 꺼내 온 술과 안주로 몇 순배 돌리고 각기 파했다. 스님 사눌 이 나를 보러 왔기에 내가 시로 답하였다.

     

    휘황한 해와 달은 오랜 세월 빛나고 輝煌日月千秋色 

    높고 넓은 산과 강은 만국이 모양이네 嵬蕩山河萬國容 

    만약에 모든 것이 고요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若道寂然爲究意 

    불전에서 종을 어찌하여 친단말이오 佛前那用打鳴鍾

     

    스님 사눌은 하직을 고하고 떠났고, 정극가는 강릉(江陵)을 다녀오기 위해 뒤에 머물렀 다. 우리 일행이 서로 헤어지려 할 때 중들이 나와 전송하였는데, 모두 작별하기 아쉬워 하는 빛을 보였다. 동구 밖을 나와 설악산을 바라보며 15리 남짓 가서 신흥사(神興寺)에 들렀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동구 밖까지 환영을 나왔다. 그 절은 설악산 북쪽 기슭 에 있는 절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전각(殿閣)이나 헌루(軒樓)가 역시 규모가 큰 사찰 중의 하나였고, 여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깎아지른 봉우 리와 가파른 산세는 마치 풍악(楓岳)과 기걸함을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여기에 있는 육행(六行)과 쌍언(雙彦)이라는 스님은 다 얘기 상대가 될 만하여 서울에 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외삼촌을 모시고 유군과 함께 견여 로 5, 6리쯤 가 앞 시내의 수석(水石)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날 대옥이 심부름꾼 한 사 람에게 술과 안주를 보내왔기에 편지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극가에게 부탁하여 금강 산에서 얻었던 소마장(疏麻杖) 하나를 허미수(許眉叟)에게 가져다 드리도록 했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금강산중이(許眉는 산마(山麻)라는 것으로 색은 청록색이고 재질은 옹골 지며 매끈하고 가벼워 지팡이 감으로 좋았다. 그런데 그것을 산마라고 하지만 초사(楚 辭)에 이른바, '소마(疏麻)를 꺾음이여, 백옥같은 꽃이로다'라고 한 그것이 아닌가 싶어 드디어 소마로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극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땡땡한 녹색 옥장을 鍧鍧綠玉杖 

    저 금강대에서 다듬었지 斲彼金剛臺 

    그대 통해 노인께 드렸지만 憑君奉老子 

    돌아올 때 풍뢰 조심하게나 歸路愼風雷

     

    유군도 대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극가가 시와 함께 이름을 그 밑에다 적었으나 그 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날 밤 최간이(崔簡易)의 낙산시 운자로 절구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주었다.

     

    동쪽 태산 남쪽 형산 나라가 명산이라東岱南衡海內奇

    공자도 주자도 마음 같았으리仲尼元晦共心期

    그 뉘라서 알았으랴 천 년 후에 이 땅에서誰知千載東溟外

    그 풍경 구경하고 짧은 시를 읊을 줄을無限雲波屬短詩

     

    이렇게 쓰고서 내 말이 “이 시는 표현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아 손질을 좀 해 달라는 것이네.” 하였다.

     

    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뒤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 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 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 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 중 하나 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 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다가 침침해서 멀리 볼 수는 없었다. 그 절 벽상에 기(記)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기를 보니,

     

    “이 굴은 의상(義相)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부상(扶桑)을 바라보면 망망한 큰 바다 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하고,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 안에 죽 들어온다. 안개 낀 동정호(洞庭湖)의 물결이 제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고, 여산(廬山)이 비록 도인(道人)들이 앞다투어 찾는 곳이라지만 역시 만경창파는 없는데, 여기는 그 모두를 다 겸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승경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비좁고 암자 모양도 왜소하여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중들 말에 의하면 몇 해 전에는 수계(守戒)하는 중이 하나 있 었는데 어느 포악한 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장주(莊周)가 이른바, '안으로는 수련을 쌓아도 겉은 표범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이학(異學)의 무리들은 인간과 유리되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당해 마땅한 것이다.

    그 굴 뒤로는 지상에서 몇 천 길 높이로 석부용(石芙蓉)이 치솟아 있는데 서쪽에서 달려온 것으로서 기기교교한 형상의 봉우리가 40여 개나 되었다. 어떤 것은 검극(劍戟) 같 고, 어떤 것은 규벽(圭壁) 같고, 어떤 것은 종정(鍾鼎) 같고, 어떤 것은 기고(旗鼓) 같고, 어떤 것은 불꽃이 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아 모양이 제각기 형형색색이고, 중간의 한 봉우리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풍악의 혈망봉(穴網峯)처럼 생 겼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비 바람이 있으려면 미리 울기 때문에 천후(天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그렇다 면 계조(繼祖)라고 한 것도 아마 이 산의 조산(祖山)이 풍악을 닮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견여를 타고 산에서 내려와 미시령(彌時嶺) 아래 계시는 외삼촌 뒤를 좇아왔다. 재에 와서 재 아래 있는 여러 고을들을 내려다보며 내가 유군에게 이르기를,

     

    "영동(嶺東) 한 구역을 옛날에는 창해군(滄海郡)이라고 불렀다. 장자방(張子房)이 이르기 를, '동으로 가 창해국 임금을 뵙고 거기에서 역사(力士)를 만나 진시황에게 철퇴를 던지 게 됐다.‘고 했다 하니, 아마도 그가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했었다. 또 견여를 타고 재를 넘어오는데 재가 높고 험해 걸음마다 마치 사다리와 같은 가파른 바위가 거의 30리나 뻗쳐 있었다. 난천(煖泉) 가에 와서 말을 쉬게 했는데, 이른 바 난천이란 겨울에도 얼지 않아 길 가는 사람들이 눈에 막히고 해가 저물면 반드시 거 기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연도에는 꽤 아름다운 수석들이 있었으나 이미 풍악과 낙가 (洛伽)의 승경을 구경한 우리들 눈에는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큰 바다나 높은 산을 구경한 자에게는 어지간한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인(聖人)의 문에 서 노는 자에겐 도술(道術)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재 위에 군데군데 옛 성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고장성(古長 城)인 것으로 금강산、설악산 정상에도 그러한 곳들이 더러 있었다. 우리나라 삼국(三國) 시절에 피란 나온 이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모여 있으면서 서로 버티던 곳이 아니겠 는가. 우리나라가 3백여 년 태평을 유지하는 동안 성 단속을 하지 않았다가 중간의 왜놈 난리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도망만 치다가 결국 문드러지고 말았다. 지 금도 병진(兵塵)이 일어나지 않은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 태평 뒤에는 비운이 반드시 오는 법이어서 염려가 안 될 수 없다.

    도중에 천후산 흔들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賦)를 지었다.

     

    천후산 앞에 큰 바위 하나 어디에서 떨어져 계조암(繼祖菴) 가에 있을까. 한 명이 흔들 어도 흔들리지만 옮기려면 천 명 가지고도 안 될 바위. 어찌보면 우(禹)가 구독(九瀆)을 뚫고,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택(九澤)을 쌓고, 사경(四逕)의 물길을 낸 다음, 구주의 쇠붙이를 모아 만들어놓은 솥 같기도 하고, 또 진시황(秦始皇)이 이주(二周)를 삼키고 육왕(六王)을 죽이고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오랑캐까지 제어한 다음, 천하 병기를 모두 녹 여 주조한 종(鍾)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솥이라고 해도 상제(上帝)께 술 한 잔 올릴 수 도 없고, 종이라고 해도 꽝꽝 울지도 못한다. 기껏 중들만 이곳을 이용하여 절로 꾸며 두고, 구경꾼들만 그를 두고 별소리 다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월출산(月出山) 꼭대기에 바위 아홉 개가 있었는데 중화 도사(中華道士)가 서에서 와서 그 중 여덟 개를 쳐 없애버렸다고 들었지만, 나도 두보(杜甫)가 말했듯이 맹사(猛士)의 힘을 빌려 그를 들어다가 저 하늘 밖에다 던져버림으로써 사특한 말 편벽한 행동이 판 치지 못하게 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찢어지고 귀신 들이 울부짖고 미워하면서 갱혈(坑穴) 속에 가만히 있지 못할까 봐서 머뭇거리며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탄식만 한다. 장자방을 데리고 창해군(滄海君)을 찾아가서 역사(力士)를 만나 300근 철퇴를 옷소매에 넣고 있다가 그를 저격하여 혼비백 산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아, 신력(神力)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날은 남교역(嵐校驛)에서 잤는데 마을 앞에서 한계산(寒溪山)을 바라보니 그다지 멀 지 않고 또 그 골이 깊고 수석도 기괴하다고 들었으나 가는 길목이 아니고 또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주인의 성명은 함응규(咸應奎)라는 자였는데 우리에게 꿀차 를 대접하였다. 또 문자를 꽤 알고 있었으며 점도 칠 줄 알았다. 내가 집을 떠나온 지 오 래 되었기 때문에 집 안부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걱정 없다고 하면서 옥녀상봉 (玉女相逢)의 점괘가 나왔다고 하였다.

    19일(신유)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를 무릅쓰고 일찍 출발하여 인제(麟蹄) 원 통역(圓通驛)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인 성명은 박윤생(朴潤生)인데 꿀차를 대접 했고, 역리(驛吏)들은 술과 과일을 대접했다. 춘천(春川)의 청원(淸源)을 보려고 홍천(洪 川) 가는 큰길을 좌로 하고 굽은 시내를 건너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과거보기 위해 떼 지어 걸어가고 있는 선비들을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서로 읍을 했는데 그렇게 하기 를 두 차례나 했다. 시내 하나를 열여섯 차례나 건너 산골의 민가를 찾아 잤는데 아주 궁벽한 곳이었다. 주인의 말이, 자기 나이는 70이고 아들이 셋, 딸이 넷인데 금년 봄에 굶고 병들어 모두 죽었으며 집안 간에 죽은 자들이 30명도 더 되는데 아직 땅에다 묻지 도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버리고 떠돌이로 나서고 싶어도 자기 자신은 그 고을의 토착 민이고 아들이 또 어궁졸(御宮卒)이어서 쉽사리 옮겨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이 불쌍했고 산골짜기의 백성들 생활상이 그렇게도 맵고 고통스러워 장초지탄 (萇楚之歎)이 없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땅은 인제 땅이었고 마을 이름은 가음여리(加 陰餘里) 였다.


    20일(임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광치(廣峙)를 넘는데, 재가 매우 가파르고 길이 전부 돌 뿐이어서 사람이나 말이나 힘들고 괴롭기가 미시령에 버금갔다. 원화촌(遠花村) 윤동지 (尹同知) 옛집에서 조반을 먹었는데 윤생 천민(尹生天民)이라는 자가 술과 과일을 가져 와서 대접했다. 재를 넘고 골짜기를 벗어나니 들판이 매우 넓고 민가 수십 호가 여기 저 기 살고 있었으며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었는데 그 모두가 선비들 집이라고 했다.

    윤생의 말에 의하면 윤동지라는 자는 이름은 수(洙)이고 관향은 파평(坡平)인데 그의 증조부가 처음으로 그 곳에 들어와 농사에 주력하여 재산을 이루었고 그 고장에 삼(蔘) 이 생산되는데 한 근 한 냥이 아니라 캐면 섬으로 캐기 때문에 가세가 매우 요족하고 곡 식도 1만 석을 쌓아 두었다가 병자년 난리에 싸우러 가는 북로군(北路軍)이 모두 그 곳 을 지나게 되어 그 군대들 먹을 것을 전부 그가 대었고,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그에게 가 선(嘉善)의 품계를 내렸다고 하였다. 난리로 인하여 세상이 그렇게 어지러울 때 자기 사 재를 털어 국가의 다급함을 돕는다는 것은 복식(卜式)과 같은 사람인데 국가에서 그에 게 보답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영직(影職)이나 공함(空啣)뿐이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 떻게 충성을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할 것인가. 더구나 그 사람으로 말하면 자기 자력으로 치부하여 그 고을에서 우뚝하게 솟았고 또 자기의 힘이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였으 니 그만하면 재질로나 힘으로나 기릴 만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사람 쓰는 것은 꼭 쓰일 사람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쓰였다고 해서 꼭 쓸 사람도 아니어서 그 역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날 수인천(水仁遷)을 지났는데 매우 땅으로 위험한 길이 거의 10여 리나 되었다. 수 인역 마을에서 잤는데 그 곳은 양구(楊口) 그날은 70여 리를 온 셈이다. 내가 역리 한 사 람과 얘기해 보았는데 내가 말하기를,

     

    “이 고장은 지대가 궁벽하고 산이 깊어 산삼이 날법하다.” 했더니, 그 역리 말이,

     

    “이 고장에 물론 산삼이 나지요. 그러나 근년 들어 유랑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는 바람에 산택(山澤)이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고 또 남아난 재목도 없어 옛날 과는 딴판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다가 내가 말하기를,

     

    “내가 산중을 다녀 보니까 금강산도 내산 외산 할 것 없이 모두 황무지 개간한답시고 아 무리 높은 데도 다 올라가고 아무리 깊은 곳도 다 들어가 초목도 자라지 못하여 새 짐승 도 붙어 살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서는 고기 못 먹고 가죽 옷 입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집도 잘 지을 수 없고, 생활의 변화를 도모할 수도 없고, 의약(醫 藥)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죽어서는 널마저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어, 그로 인한 재해 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부역(賦役)과 형벌을 피 해 다니며 국가로 하여금 저들을 기속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단 무슨 경급(警急)이라도 있으면 서로 모여 도둑으로 변해버리고 마니, 참으로 국가의 간민(姦民)인 것이다. 고을 수령들이 그 피해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이 원적(元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 에, 조세 이외의 수입을 노려 그들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그들 요구대로 내버려 두는 것 이다. 그 폐단이 자꾸 번지고 있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