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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105. 증낙산사승(贈洛山寺僧) / 송운(松雲) 석 유정(釋 惟政)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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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한양 남도에 남은 꽃마저 지니 

    홀연히 가는 가절 어찌하리오 

    내일이면 봄도 가고 그대도 가고 

    헤어지는 서운함 견딜 수 없으리오

     

    漢陽南道落殘花 

    佳節忽忽不奈何 

    明日春歸君又去 

    不堪相送過天涯

     

    『金剛山詩集』下篇

     

    유정(중종 39년, 1544년〜광해군 2년, 1610년)의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속명은 임응규(任 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峰)이다.

    7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 를 배웠다. 선조 8년(1575년)에 선종 승려의 여론에 의해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 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1578년에 휴정에게 하직하고 보덕사(普德寺)로 가서 3년간 머문 후 1581년부 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 당했다가, 강릉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榆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기응변으로 인근 9개 촌락의 백성을 구출했으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 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 으며, 그해 3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1594년 4 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 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 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05년 4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 국했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 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한다. 묘향산으로 가서 휴정의 영정을 참배한 다음 원주 치악산에 머물렀다. 그 후 병이 들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던 중 1610년 8월에 입적했다.

    불교승려로서의 독창적이며 체계화된 사상은 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병장(僧兵將) 이나 외교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불교억압책으로 인하여 몰락한 승려의 사회적 신분을 일반민과 같이 해줄 것을 건의했다. 임진왜란 중에 이미 가토와 4차례의 회담을 가진 바 있는 그는 난이 끝난 직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성공적인 강화를 맺고 귀국했으며, 입적하기 직전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종의 지(宗義智)에게 우호를 강조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시문에 능하여 저술이 많았으나 임진왜란 때 거의 불타버렸고, 『四溟大師集』7권과 『奮忠紆難錄』1권, 기타 상소문•발 문(跋文)•서장(書狀) 등이 전한다. 문도들이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탑과 비를 세웠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 濟尊者) 이다.

    이 시는 낙산사 찾아갔다 승려에게 준 글이다. 고승이지만 아름다운 계절에 꽃이 지고 세월이 흘러감을 아쉬워하며 무상함을 느낀다. 또한 이 밤을 자고 나면 지인과 헤어짐 을 아쉬워하며 인생무상을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