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휴 상인이 낙산으로 떠나려 하면서 / 계곡(谿谷) 장유(張維)
페이지 정보
본문
휴 상인이 낙산으로 떠나려 하면서
시권을 가지고 와 보여 주기에 차운하여 시를 지어 주면서
[休上人將向洛山携詩卷來示次韻以贈]
남능북수를 논하지 마오
사람마다 마음속에 등불 하나씩 있는 것을
병중에 만난 스님 서로들 말이 없이
밝은 모습 근심 대하는 듯하네
맑은 가을 관동으로 석장(錫杖)을 날리나니
그 옷자락 만 골짜기 바람을 불러일으키네
듣자니 낙가산(洛伽山)에 다시 건립하였다고
포금 속에 절이 있음을 알겠네
休論北秀與南能
箇箇人心有一燈
病裡逢僧兩無語
炯然如對玉壺冰
淸秋飛錫向關東
一衲行披萬壑風
聞說洛伽重建立
祗園知在布金中
『谿谷先生集』卷之三十三,七言絕句
장유(선조 20년, 1587년~인조 16년, 1638년)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지국(持國), 호 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비 인선왕후(仁宣 王后)의 아버지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선조 38년(1605년) 사마시를 거쳐 광해 군 1년(1609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고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 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후 대사간대사헌•대사성을 지내고 인조 2년(1624년) 이괄(李 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다음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다. 그 후 대제 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다. 1631년 딸을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에게 출가시켰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공조판서로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 했다.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母親喪)으로 끝내 사직했으며 장례 후 과로 로 죽었다.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 다. 저서로 『谿谷漫筆』•『계곡집』•『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 이전글
- 138. 낙산사제영(洛山寺題詠) / 취미(翠微) 수초(釋 守初)
- 25.03.02
-
- 다음글
- 140. 수몽 정 선생의 양양 부사 부임을 전송하며 / 계곡(谿谷) 장유(張維)
- 25.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