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 조침령로 쇠나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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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옛 조침령 입구 서림 삼거리
현 조침령로(418지방 도로)가 포장되기 이전의 옛 조침령(쇠나드리)은 양양군 서면 서림리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로 넘어가는 백두대간의 고개로 진동리와 방동리 일대 주민들이 양양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진동리에서 정상의 바람부리 쪽에서 쇠나드리를 넘어 옛길을 통하여 서림으로 내려가는 계곡은 온갖 산나물과 야생화 군락지로 봄에 는 계곡 전체가 꽃밭이 되며 야생화가 만개하면 선경(仙境)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름답 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몇 군데 축대가 남아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목재 반출을 위해 만든 산판(山坂)길 흔적이라고 한다.
과거 영을 넘나드는 선질꾼 1명의 짐은 대략 100근(60kg) 정도의 짐을 지고 영을 넘 어 다녔으며 힘이 좋은 선질꾼은 한 번에 고등어 100마리나 소금 한 가마를 지고 다녔 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양양 서림에서 인제 기린까지의 약 6~7군데의 주막에서 묶는데 밥값 은 당시 화폐로 10~15전(9,600원~14,400원)을 받았다고 한다.
서림리에서 옛 조침령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입구에는 마꾼이 말과 함께 묶을 수 있는 마방터(구룡령로 2081 일대)가 있었으며 조침령 정상인 쇠나드리에도 마방이 있었다. 마 꾼이나 선질꾼은 취급하는 품목이 같지만 마꾼은 말 한 마리에 선질꾼의 약 3배가 넘는 짐을 싣고 다닐 수 있었다. 콩과 팥을 각 10말씩 총 20말을 싣고 다녔다. 마꾼 행렬이 많은 경우에는 한 번에 20여 명이 약 25필 정도의 말을 몰고 다녔다. 이들은 선질꾼보 다 더 많은 물건을 운반하기에 우월감이 있었으며 평지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기에 빠른 이동이 가능하였다. 마꾼은 8.15해방 전후로 모두 없어졌다.
당시 인제로 통하는 영로(嶺路) 중에서는 주로 조침령과 박달령을 많이 넘어 다녔다.
조침령은 말은 다니기 쉬우나 거리가 멀었고, 단목령(박달령)은 말이 다니기에는 험하지만 거리가 짧아서 바꾸미들이 이 영을 넘나들었다. 특히 진동리(설피밭)는 한때 약초 재배가 성행하면서 약초를 판매하려는 농장주가 많이 넘어 다녔다.
〈그림 9〉조침령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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