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조침령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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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문헌 속의 조침령
숙종대에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한 양와(養窩) 이세구(李世龜, 1646∼1700년)가 1691년 10월 3일 관동지방의 4개 군을 여행하면서 지은 기행문 「동유록(東遊錄)」이 『양와집(養窩集)』에 실려 전하는데 “조침령의 북쪽은 오색령이다. 그 동쪽은 양양(襄 陽)이고 서쪽은 인제(獜蹄)이며 오색령 북쪽은 미시파령(미시령)을 이룬다.”100)라고 적었다. ‘조침(曹砧)’령이라는 명칭으로는 이 기록이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림 1> 『양와집』12/13책 「동유록」의 조침령 (자료: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림 2> 『여지도서』관애조의 조침령
1757년(영조 33)에서 1765년(영조 41) 사이에 전국 각읍(各邑)에서 작성한 읍지를 모아 관찬(官撰)한 『여지도서』 관애조(關阨條)에도 조침령(阻沉嶺)이라는 명칭 나오는 데, 조침령은 “관아 서쪽 45리에 있으며 소동라령(북암령) 남쪽 줄기로서 기린현 경계 에 접하고 있다”101)라고 기록하고 있다.
1808년(순조 8)에 호조판서(戶曹判書)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副提學) 심상규(沈象 奎)가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102)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 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양양영로(襄陽嶺路)는 오색령⋅필여령. 기린(猉麟)통로는 소동라 령⋅조침령. 구룡령은 강릉과의 경계. 형제현(兄弟峴)⋅양한치(兩寒峙)103) 모두 서쪽 통로다.”104)라 기록되어 있다.
〈그림 3〉 양한치(큰양한치, 작은양한치) 전경
1822년∼1826년에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관애조(關阨條)에도 조침령(阻枕嶺)은 “관아 서쪽 45리에 있으며 소동라령(북암령) 남쪽 줄기로서 기린현 경계에 접하고 있다”105)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1년(고종 8)에 발간된 『관동읍지(關東邑誌)』 양양부 관애조(關阨條)에도 조침령 (阻枕嶺)은 “관아 서쪽 45리에 있으며 소동라령(북암령) 남쪽 줄기로서 기린현 경계에 접하고 있다”106)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조침령은 소동라령과 구룡령 사이에 있으며 춘천부의 기린현 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침령 이름에 대한 고찰
한글 표기로는 문헌 모두 ‘조침령’이지만 한자 표기는 다양하다. 1691년 양와 이세 구(李世龜)의 『양와집(養窩集)』 「동유록(東遊錄)」에는 ‘조침령(曹砧嶺)’으로 되어있는데 “한 덩어리의 모탕 같은 영”이란 뜻이다. 즉 조(曹)는 덩어리나 무리를 뜻하며, 침(砧) 은 모탕을 뜻한다. 모탕이란 도끼로 나무를 팰 때 바쳐 놓는 나무인데 하도 도끼를 맞아서 가운데가 움푹 파인 형태이다.
『여지도서』에는 조침령(阻沉嶺)인데 “지세가 험하며 가라앉은 영”이란 뜻이다. 『증 보문헌비고』는 영조(英祖) 대인 1770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782년 정조(正祖) 대에 보완·증보되어 이어오다가, 1908년에 간행되었는데 조침령(阻沈嶺)으로 표기된 침 (沉)자는 침(沈)자의 속자(俗字)이다.
<그림 4> 『증보문헌비고』 , 『산경표』 의 조침령
영조(英祖) 때 신경준이 편찬한 지리서인 『산경표』와 1750~1768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에는 조침령(曹枕嶺)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양와집(養窩集)』 「동 유록(東遊錄)」의 ‘조침령(曹砧嶺)’에서 침자만 베게 침(枕)으로 바뀌었다. 베게도 역시 가운데가 잘록하니 같은 뜻이라 하겠다.
1737~1776년에 제작된 「광여도」에는 조침령(阻枕嶺)으로 썼는데 “지세가 험하여 자 고 넘는 영”이라는 의미이다. 조침령의 정상이 영의 좌우측(左右側)보다 낮아 말안장 모양의 안부(鞍部)로 보면 한자(漢字)를 해석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 50,000분의 1 지형도에는 조침령(鳥砧嶺), 1919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는 조침령(鳥沉嶺)으로 각각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새가 넘는 잘록한 영”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림 5> 「조선지도」의 曹枕嶺과 「광여도」의 阻枕嶺
백두대간 표지석에는 조침령(鳥寢嶺)으로 표기하였는데 “새들도 자고 넘는 고개”로 다분히 문학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요약해보면 조침령의 한자 표기 과정은 다음과 같다.
○ 曹砧嶺 → 阻沉嶺 → 曹枕嶺 → 阻枕嶺 → 鳥砧嶺 → 鳥沉嶺 → 鳥寢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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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여지도서』 關阨 : 阻沉嶺。 在府西四十五里。 卽所冬羅南枝, 接麒麟界。
102) 비변사(備邊司)를 비국(備局) · 묘당(廟堂) · 주사(籌司)라고도 불렀는데 그 관원 가운데서도 군사에 정통한 4인을 뽑아 유사당상(有司堂上)이라 하였다.
103) 양한치(兩寒峙)는 56번 국도에 위치한 고개로 서면 영덕리 양수발전소 홍보관 동쪽 고개로 큰 한치(大寒峙)와 작 은 한치(小寒峙) 두 고개를 묶어서 양한치라고 한다. 국도로 건설되기 이전에는 개미허리같이 폭이 좁고 고개 아 래쪽 골짜기는 매우 깊어 우마차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에게는 오싹한 기분이 든다고 하여 한치(寒峙)라 하였다 한다.
104)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4(軍政編四) 관방(關防)에 襄陽嶺路 五色嶺 弼如嶺 猉麟路 所冬羅嶺 阻沈嶺 九龍嶺 江陵界 兄弟峴 兩寒峙 幷西路.
105) 『관동지』 關阨 : 阻枕嶺。 在府西四十五里。 卽所冬羅南枝, 接麒麟界。
106) 『관동읍지』 關阨 : 阻枕嶺。 在府西四十五里。 卽所冬羅南枝, 接麒麟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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