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로 이어진 미륵신앙(彌勒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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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 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쳐 오고 있 다. 우리나라 지명이나 산, 절 이름 등에 미륵(彌勒), 용화(龍華), 도솔(兜率)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彌勒殿)이 흔히 있는 것도, 상당수의 미륵불상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 미륵신앙의 영향이다.
신라의 화랑(花ㅍ)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의 신라적 수용의 한 특징 이었다.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 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 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기 때 문이다.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미륵신앙은 주로 하층민(下層民)의 희망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 접어들면 전반적인 불교학의 발달과 함께 미륵 사상에 대한 학문적 논리체계를 세우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미타(彌陀)신앙, 관음신앙과 함께 하나의 전통으로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 살아남아 있다.
다만, 고려 초기 이후 특별히 미륵신앙에 관심을 가진 승려가 많지 않았고, 미륵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 (法相宗)이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의 세력에 밀려났으므로 신라 시대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함 께 갖춘 미륵신앙은 다시 꽃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미륵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광종 때 혜명(慧明)에 의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논 산시 은진면 반야산의 관촉사에는 1006년(목종 9)에 완성된 미륵불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 미륵불상에 얽힌 영험 설화는 당시 사회에 미륵신앙이 폭넓게 유포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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