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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철광산의 문화사 [증보판]

    16. 서문리 광부들의 이야기

    페이지 정보

    조회 239회

    본문


    (서문리: 강교연 74세, 김강래 78세, 오용병 85세, 이용석 76세, 이의삼 76세, 이정헌 75세, 정연덕76세, 최선권 77세)



    사례 1 ◆ 착암공의 하는 일


    56년에 도목항에 바로 들어갔는데, 임시부 없이 바로 고입으로 들어갔다. 막장 들어가니 그맘때는 도목항이 쌍철로 되어 있고 목 구르마로 광석을 옮겼는데, 바퀴는 쇠바퀴이고, 나무로 만든 목 구르마로 운반을 했는데 갱도(坑道)가넓어 쌍철 길로 되어 있어 구르마들이 서로 교행을 했다.

    항 입구에서부터는 수평인데, 고개만 넘으면 내리막 이였고, 움직이다 보면 네루가 흔들려서 어긋나면 탈선도 해서 넘어지면 구루마를 다시 세우고 광석을퍼 담아야 했다.

    구르마 운반은 둘이서 하고 학구 뒤집어 씌워 놓고 빼 낼 때는 왜서 빼 내냐 하면 발파하다 보면 큰 덩어리도 나오고 부스러기도 나오잖아 그럼 학구를 엎어놓고 빼놓고 이런 나무판 대고 굴려서 목 구르마에 싣고 큰 거는 씌워놓고 댓방으로 작은거는 실어 담았다. 상황에 따라 착암공들이 발파를 해놓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에는 광석 싣는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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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4> 당시 근로자들과 대담중인 양동창 문화원장(2011.9)



    사례 2 ◆ TY착암기와 TA착암기


    수평에 들어갔을 적에는 왜정 때, 인공 때 그들이 해놓고, 수복 후 양양광업소 적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1층, 2층식이래요. 위로 구멍을 뚫고 사다리로 올라가지고 막장을 뚫을 때는 자그마한 딸딸이 같은 걸로 싣고 그걸 받아가지고 나오고 그랬으며, 그 맘 때는 TY하고 TA라고 하는 착암기로 굴진을 했다.

    동발 받치는 걸 지지부라고 하는데 그 나무를 갖다 세울 적에는 밑 둥지를 올라가게 하고 꼭대기를 밑으로 내려가게 하고 위를 넓적하게 해가지고 받치고 들어가면서 설치했다.

    이론적으로 막장 뚫을 때는 TY가 가벼워요. 그러면 그 선배들이 할 때에는 꼭대기는 휘어서 집어넣으면 몽땅 터져서 떨어서 나가게 되거든. 그런데 학술적 으로는 맞는데, 우리가 하다 보니, 이게 가벼우니까 힘으로 누르자니 힘이 든다고, 그래서 힘 있게 가운데 뚫는 것 보다 막 집어넣어서 하다 보니 쉽더라고, 그래서 쉽게 하고 한 막장만 잘 뽑아내고 그랬다.

    그때 착암기계 할 때 한 달에 5~6만원 받았고, 공무원들은 그때 2~3만 원 정도 받았으니 웬만한 공무원 옰 옰받았다. 그때 집에서는 5,000원이면 한 달 생활비가 되어 살았다. 그때 돈 모았으면 지금 잘 살고 있을 거예요...



    사례 3 ◆ 학력은 필요 없고 구르마를 잘 밀어야 뽑는다


    이하형씨가 도목항 항장 할 때는 운반하는 사람 고를 때는 경력, 학벌 이걸안 보았다. 선광과에 목구르마 앞에 쭉 세워놓고, 구르마 밀어보라고 하고 그러고 사람을 뽑았어요.

    굴 안에서 쓰면 안 되는 화약을 가지고 발파를 하다가 사람 2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화약을 터뜨리고 났는데, 사람이 안 나와서 우리가 뒤따라서 올라가다보니 올라가던 사람이 휙 쓰러지고 정감독도 휙 쓰러져있다. 그래서 우리가 에어를 확 뿌리고 올라가서 둘을 실어 냈는데 결국 두분은 돌아가셨지요.

    굴 안에 휴게실 시설에 식탁도 해놓고 의자도 놓고, 거기 보면 전기 곤노[일본어: 히터]로 달궈서 위에다 라면도 끓여 먹고 밥 싸온 사람은 밥도 데워서 먹고 그랬는데 그 안에 전기시설이 다 되어 있다.

    착암기를 조립하다가 에어펌프가 터지면서 손을 다쳤어요. 그래서 작업을 못하고 병원에 갔어요. 그래서 이제 착암기에서 일 못한다고 하고 목수 조수로 선광과로 들어갔어요.

    선광장 건물이 3층까지 있고 거기에는 철광석을 갖다 붓는 슈트가 있어요, 거기에 광석을 슈트에 실어서 보내는 과정인데, 손이 벨트에 잘못 걸려서 끌려 들어가서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

    사고 난 사람은 기본금에 의해 일정부분을 주었고 호프만방식, 게르만방식.

    두 개의 계산 방식이 있는데, 담당자를 제외하고는 내용을 알지 못 했다.

    임시부로 3개월 동안 일하다가 상시부로 안 시켜주면 한 일주일간 집에서 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일주일 뒤에 입사하는 식으로 해서 임시부 6 개월을 일하고 그러다가 3년 동안 임시부로 일하다보면 상시부가 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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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5> 당시 이의삼씨 표창장(197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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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6> 당시 이용석씨 표창폐(1982.7.1)



    사례 4 ◆ 낙반사고


    대한철광시절에는 논화항 도목항 양양항 수항 탑동항 5개 항이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죽은 사람 끌어 묻는 일이었다. 가장 많이 일어나는 사고는 낙반 사고, 광차 추돌 사고였다.

    수항의 수직 굴 지름은 약 4~5m정도 되고, 수직으로 약 450m 정도 내려간다. 우리나라 기술진이 뚫지 못해서 독일 기술진이 와서 뚫었다. 논화항, 탑동항, 도목항, 양양항은 사항(45도 기울어 뚫은 굴)이였다.

    한 50m 이상 돌이 엉켜서 안 내려와요. 그럼 화약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화약을 장전해놓고 발파를 하는데, 중간이 무너져서 피신할 곳이 없어요. 재라찡 (다이너마이트)이라고 그걸 돌돌 말아서 붙여놓고 내려오는데, 뒤에는 무너져서 피신할 곳은 없지, 다이너마이트는 ‘칙 칙칙’ 타 들어가고, 돌은 죽일 듯이 차서 나오고 그러면 참 당황하고 불안했다.

    수항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산산조각이 났죠. 차장이라는 사람이 유족한테 보일 수 없다고 그래서 보여주지도 못했죠.

    천정에서 이슬이 떨어지는데, 거기 아래에 사람이 있었네, 그래서 내가 큰소 리로 “피해” 라고해서 사람들이 다 피하자마자 돌이 떨어지기도 했지.



    사례 5 ◆ 반복되는 정전사고


    처음에 한전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광업소 자체 발전기에서 400마력짜리 2개, 900마력짜리 1개를 돌리면서 광업소 자체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한전이 전기가 들어왔는데, 1971년도에 한전에서 전기료를 올리겠다고 하루 저녁에 정전을 7번을 시키더라고, 그러니 그때는 무법천지죠. 처음 정전이 되었을 때는, 광산 전체가 정전이 되었어요. 그때 문 열고 나가면 발전소에는 밧테리 로다가 비상등이 딱 들어 오길레, 한전 전기 메다를 보니 메다가 안 떠요. 근데 그때 당시 선광 수선부들이 한 40여명이 있었거든요. 아까 말했던 큰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거기에서 광석이랑 폐석이랑 골라내요. 근데 정전이 되어서 올 스톱이니까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키스타임이라고 막 소리를 질러요. 조금 있다가 보면 다시 불 들어와요. 그럼 송전을 해요 제일 급 한데가 선광 여자들 일하고 있는 곳에 공식적으로 제일 먼저 줘야 해요 여자들 건드릴까봐 그리고 각 항 압기실이나 펌프실에서는 차단기 전원을 안 내리면 과부하 걸리면서 다시 전기가 떨어지니까 전기를 송전한다고 전화연락을 취하고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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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7> 당시 발전실 배전판 모습(1957년경)



    사례 6 ◆ 야간에 전기 송전은 여자들이 일하는 선광장이 최우선이다


    3번을 딱 정전되고 나니까 나도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주임한테 연락하면 해서 연락받은 주임은 전기계장한테 연락하고 과장한테까지 전화가 들어가니까 과장이 한 번만 더 그러면 발전기 돌려버려라 그러더라고. 하여 송전되고 나서 5분정도 되니까 또 정전시키더라고요. 그래서 혼자서 발전기 3개다 돌리는데 제일 잘 터지는 발전기는 1호에요. 그래서 1호만 돌려놓고는 한전 에서 자꾸 저러니까 밧데리는 아껴야 되니까 치워버리고 우리 수전으로 집어넣 어요. 한전 스위치 다 차단 시켜놓고 그래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놓으 니까 과장이랑 계장이 막 뛰어오더라고요. 다른 데로 송전하지 말고 여자들이한 50명이 작업하는 선광장에만 먼저 송전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발전실의 작업장은 정전이 30분만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싹 올라오게 되어있어요 비상이니까. 그런데 30분 전에 다 올라 왔더라고요.

    그때 과장이 발전기를 분리시켜 주더라고요. 과장도 부애가 났지 계장도 부애가 났지 한전에 전화했더니 광업소 기계가 오작동 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과장이 파워가 있었어요. 그래서 한전전기 쓰지 말자 그러고 발전기 3 대를 완전 풀 가동 했는데, 1,500kw면 되니까 그냥 쓰자고 해서 일주일동안 했어요. 조수와 같이 작업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일했죠.

    하도 이런 곤욕을 반복적으로 치르게 되니 광업소에서는 한전전기 안 쓴다고 하고 다 떼어 가라고 하고 하기도 했다.

    자격증은 계장만 갖고 있었지, 그 외에 사람은 자격증이 하나도 없었어요.



    사례 7 ◆ 광석 선별공정 과정


    선광과에는 상, 중, 하단이 있는데, 상에서는 채광에서 철을 받고, 크게 선별을 하고 난 뒤에, 중단과 하단에서 씻고, 재차 선별하는 작업과 오야삥에서 오함마로 8인치 규격의 크기로 잘게 부스는 작업을 하였다.

    오함마로 부슨 광석이 아래로 빠지고 나면 다음부터는 수작업이 종료되고 기계로 작업을 하는 공정인 쪼크레샤로 조금 작게 돌을 빻고, 그 다음 자이라 라는 큰 맷돌에서 더 잘게 빻은 다음 그 밑에 있는 볼밀기계에 들어가서 분쇄하면 가루는 밑으로 빠지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선별작업을 하게 된다.

    그때 당시에 월급은 공무원들보다 조금 더 낫게 받은 것 같다.

    교대시간은 갑반이 08:016:00 / 을반이 16:00~24:00 / 병반이 24:00~08:00까지 이고 3교대이고 오후 22시부터 06시까지 심야수당은 기본수당의 1.2배 로테 이션 들어가니까 월급의 차이는 없었다. 



    사례 8 ◆ 사고자의 시신을 가족에게 어떻게 보여줘요


    항내는 위험수당이라고 해서 7~8% 더 주었지만. 콤프레샤는 항외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보다 위험수당을 더 주었다.

    압기실의 콤프레샤는 500마력, 350마력, 125마력짜리가 돌아가는데 그 깜깜한 곳에 서 G모씨와 K모씨는 기계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워도 깨지 않고 잘 잤다.

    굴 안이 자연 통풍이 되는데 통풍이 잘 안 되는 곳은 그 안에 또 환풍기가 또있어요. 넓은데도 있고, 2m 되는데도 있는데 사항은 수항보다 직경이 더 적은 4m가 되는 것이 있고 6m가 되는 것이 있어요. 수항은 처음부터 수직으로 들어 가고 사항은 안에서 수직으로 뚫어 있다.

    수항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광석이 오르내리는 광석전용이 있고, 사람이 오르내리는 임차전용 이 있는데, 광석전용 수항에서 떨어진 사람은 광석 오르내 리는 수항에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서 사망하였다.

    광업소가 놀 적에 일요일 같은 날에 가서 일하는데, 권양공이 권양기를 내려야 되는데, 내리다가 올렸지. 그래서 산소통 맨 둘은 옆으로 떨어져서 쓰러지고 하나는 냅다 올라가니까 뛴다는 게 400m 직선인 데에서 빠졌지. 살점이 다 떨어저서 창고에다가 쌓아놨는데, 유족은 그걸 보여 달라고 했지만 그걸 어떻게 보여줘. 전부다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는데.

    양양광업소가 뭐든지 사고가 나게 되면, 높은 사람은 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며 배경이 있는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그걸 알아보고, 좀 높은 사람이면 보상을 좀 더 주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그냥 적당히 보상해주고 말았으며, 회사에서 선임한 변호사가 있어서 상대방과 말싸움 하다가 안 되면 조금 더 주더라도 그렇게 했어요.



    사례 9 ◆ 결혼날짜 받아놓고 일 나 왔던 사람이 ....


    공작명이라는 운반부가 집에서 결혼날짜가 나왔는데, 하루라도 더 벌겠다고 나왔는데 잔치 할 사람이 뭐 하러 나와 가지고 막장에서 딸딸이라고 있는데 한쪽에서 하면 이쪽으로 떨어지거든 근데 이 사람이 뭔 생각을 하는지 슈트 쪽으로 돌았어. 이쪽으로 가서 둘이 넘겨야 하는데 이 사람이 거기에 없잖아. 아니 이게 뭐 어떻게 되었는지 거기다가 대고 그 사람이 또 쏟아서 떨어져서 죽었다.

    그래서 잔치 지내기로 한 사람이 사람 죽어서 장사를 지냈으니 얼마나 기가 맥히는 일인지...

    압기실에서 내다보면 하룻밤에 둘씩 죽어나가요, 그럼 경찰서장, 소장, 경비원들 오면 “아 오늘 또 사람이 죽었구나” 어느 날은 둘이 죽어나가고 또 어느 날에도 하나가 죽어나가고. 감독도 사다리를 타다가 죽고 그랬다.

    어떤 사람이 출근 중에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여자들이 눈이 보였다 그러면 기분 나쁘니까 그 사람 일하러 나오지 말라고 그래요. 그래서 사원들이 살던 사택에서도 아침에 여자들이 나오질 않았어.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항장 할 때 유난히 사고가 많았어. 그래서 선광장에서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으면 좋게 보이기도 했다.



    사례 10 ◆ 눈칫밥 먹는 임시부들


    그때 밥도 못 먹을 때인데 광산을 다니니 밥을 먹으니 별천지지. 임시부들은 밥 먹을 때가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는데, 임시부 대표와 싸움도 많이 했어요. 밥도 상시부 먹는 시간 따로 있고, 임시부는 저 땅 끝에서 빌빌 놀다가 하나 들어와서 먹던가, 아니면 저 구석에서 하이바 깔고 앉아서 먹다가 상시부 들이 다 먹으면 거기서 먹고 그랬지요. 물도 임시부들이 물통에 물 받아서 갖다 놓고 그랬다.

    그 당시에는 차별이 엄청 심했는데, 상시부는 트럭이나 버스타고 출근을 했지만, 임시부들은 걸어 다녔으며, 또한 임시부들에게는 쌀도 주지 않아 나중에 임시부들이 하도 항의하니까 그때부터 옷 도주고 그랬으며, 상시부들은 작업복을한 벌씩 내 주었는데, 임시부는 바지하나 줄때 있고 윗도리 하나 줄 때 있었다.

    광업소에는 영업하는 식당은 꽤 많았으며, 정육점이 있었는데, 그래서 사는 것이 좀 풍족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채광부만 한 달에 고기 두 근 나누어주고, 임시부들은 고기 전표도 안 나왔다.

    경비를 하다가 돈 차이가 나니까 직종을 바꾸고 채광과 항내인 도목항에 들어가서 일을 했던 그 북한 땅굴 발견한 사람은 수더분하게 일은 잘했다.

    광부사택, 영화관, 목욕탕, 병원, 이발소, 약방(개인 약방), 당구장이 있었으며, 공급소는 노무자들의 직번이 있었는데, 1번 2번. 직 번만 대면 공급소에서 돈이 없어도 물건을 외상으로 살 수 있었고, 쌀도 직 번만 있으면 계속 받을 수 있고 임금에 일정부분 쌀을 신청하면 그 금액을 제외하고 월급과 쌀을 함께 받았지만, 임시부들에게는 그러한 혜택이 없었다.

    체육행사는 1년에 한 번 있고, 개광기념일(매년 7월 1일)에 장승분교 학교 운동장에서 했으며. 광부들을 위한 특별한 위로 행사는 없었고, 체육행사 때 사은품 없이 경기 상품을 주었으며, 막걸리는 회사에서 많은 지원을 했다.

    체육 행사는 축구, 씨름, 배구, 육상 마라톤 등을 했고, 가족 단위로 했다.

    노동조합에 문화부라고 있어서 연극을 초가을에 많이 했다.

    광부들이라든지 관리부서에 의한 행사로 광부들의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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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 서문리 화안식 70세)


    사례 1 ◆ 직장예비군 훈련


    1968년 1월 21일 청와대에 무장공비가 침투하자 국가에서는 국민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자 1968년 4월 1일 예비역 장병들로 하여금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 는데 평시에는 사회생활을 하고 유사시에는 향토방위를 전담할 비정규군 조직인 예비군을 편성하였고 국가에서 산업현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직장민 방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양양광업소의 예비군중대장은 경비주임이 담당하였으며 동원예비군은 군부대에서 실시하는 훈련을 별도로 받지 않았으며 광업소 일반예 비군과 마찬가지로 광업소야외사격훈련장에서 년 2회 사격훈련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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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9-28> 당시 사격훈련중인 황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