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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철광산의 문화사 [증보판]

    Ⅰ. 개 설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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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양양철광은 1980년대까지 국내 최대 철광산업지로 알려져 있었다. 철광산업은 매우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제153권 강원도 양양(도호부)의 특산물편에 “쇳돌이 부(府)의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철굴산에서 난다(石鐵産府西十里鐵掘山)”라고 하였고, 신동국여지승람 제44권 강원도 양양(도호부)의 토산편에도 “철(鐵)이 서선사(西禪寺) 동쪽 봉우리 밑에서 난다.(鐵出西 禪寺東峰下)”라고 기록하였다. 또 장승리(鐵山村) 사항골 골짜기에서는 예전에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냈던 철의 잔해〔(殘骸)똥〕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철을 생산하여 이용 되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오래전에 철광석을 캐내어 인간이 필요로 한 농기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쉰 패랭이’란 지명은 장승리(광산촌)의 탑동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연대 미상)에 50여 명의 광부들이 철을 캐러 항내로 들어갔다가 굴이 무너졌는데 구조작업을 할 수 없어 모두 사망하였다고 한다. 사망자의 정확한 인원은 알 수없으나 그들이 쓰고 다니던 패랭이(모자)를 벗어놓고 들어갔는데 그 수가 50여개가 넘게 남아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광업소가 전성기일 때 50인총 으로 관리하여 철광석을 채광 하였다.

    양양광산이 본격적으로 채광을 시작하면서 근로자들이 모여들어 집터가 부족 하게 되자 골짜기 마다 가옥을 신축하는 등 조용하였던 마을에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당시 골짜기 마다 있던 자연부락 명은 사항골, 흑간리, 들떨골, 미나밋골, 복상나무쟁이, 쉰패랭이, 양짓말, 아리랑고개, 탑골 등이다.

    철광은 서면 장승리와 서면 갈천리에 각각 위치한 양양광산과 구룡광산 두곳에서 일제강점기에 채광에 착수 생산되었다. 8.15광복 이후에는 남북분단으로 공산치하에 있다가 한국전쟁이후 국유화되어 1956년부터 다시 가동되었다. 생산 량이나 규모 면에서 국내 최대의 자철광산이었다. 지질은 광구 주변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편마암류와 변성퇴적암류를 주로 하여 이를 후기에 관입한 성장암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체(鑛體)는 변성퇴적암류 내에 좁게 발달하고 있으며 지표면에 가까운 상부 광체는 거의 개발이 완료된 상태이다.

    1967년에 삼미광업개발주식회사가 인수하면서 민영화되었고 1987년에는 대한 철광개발주식회사의 양양사업소로 이관되었다. 그 후 값싼 외국산 광물의 수입 증가와 인력 부족으로 채산성이 악화되자 생산량이 현저한 감소세로 돌아서게 되자 1995년에는 완전히 중단되어 폐광되었다.

    양양군은 2011년 1월 양양군과 대한광물(주)간 철광산업의 ‘국내부존 자원개 발을 위한 철광석 광산개발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뒤늦은 감은 있으나 잊혀 져 가고 있는 양양철산이 채광이후 폐광되기까지 숨겨진 애환과 풍속을 재조명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향토사로 보전코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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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1> 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