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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철광산의 문화사 [증보판]

    Ⅱ. 철광산의 개요

    페이지 정보

    조회 274회

    본문


    1. 연 혁


    양양철광의 연혁 


    1933. 일본 석정(石井)광업소에서 개발 착수 

    1937. 8. 일인에 의해 광업권 설정등록 

    1938. 7. 일본 종연(種淵)공업주식회사에서 매수(2,000만원)채굴 

    1939. 3. 일본 종윤 실업(주) 이전등록 

    1945. 8. 해방 후 북한에서 채굴 

    1948. 한미협정에 의한 권리귀속 

    1953. 국유편입 

    1955. 8. 수복 후 제1군사령부 공병부에서 개발 

    1955. 12. 양양철광공사로 발족(정부와 보광계약) 

    1956. 7. 삼화철광(주)와 합병(6천만환) 대한철광 양양광업소로 개칭 

    1961. 8. 자력 선광장 준공(처리 용량 1,000t/일) 

    1963. 11. 대한철광개발(주) 이전등록 

    1964. 12. 대한철광 개발주식회사로 발족(자본금 473,202,000원) 

    1965. 2. 한전 수전시설 준공(수전용량 2,400KVA) 

    1966. 6. 기술연구소 개소 

    1966. 7. 수로변경 터널 및 댐 공사 준공 

    1967. 2. 국영에서 민영화 (삼미광업개발주식회사) 

    1968. 6. 선광장 쇄광 및 마광시설 확충보완(처리용량 1,500T/일) 채광 시설 기계화(쇼벨로더, 장공착암기 도입)

    1971. 9. 심부 광체 개발 착수 

    1973. 6. 제 1수갱(인원 자재 운반용)준공. 포항제철에 납품시작 

    1974. 10. 제 2수갱(광석 운반용)준공 

    1976. 10. 수항 심부 개발착수 

    1977. 4. 수항 심부 개발준공 

    1982. 6. 삼미광업개발(주) 명칭변경 

    1985. 1. 주(삼미) 양양광업소로 명칭변경 

    1987. 2.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로 창립 

    1994. 생산량 급 감소(32,324톤) 

    1995. 생산 중단으로 폐광



    2. 위치 및 교통


    양양광산은 북위 38°05′ 동경 128°33′으로 행정구역상 강원도 양양군 서면 장승리에 소재하며 양양읍에서 약 5.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철도는 일제 강점기에 개설되었는데 동해북부선(안변∼흡곡)은 1929년 9월 11일, 양양역은 1937년 12월 1일, 양양(송암리에 위치)역에서 광업소까지는 1942∼1943년경에 각각 개설 철광석을 운반하였는데 해방과 동시에 중단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광석운반은 광산∼속초항 간 26km 국도를 이용 자동차로 운반하였으며 속초항에서 포항까지 147해리(海里)를 해송운반(海送運搬) 하였다.



    3. 일제강점기


    양양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이다. 일제는 1933년부터 시험 채광을 하여 오던 중에 이곳에 자철 함유량이 50∼80%인 양질의 철광석이 다량으로 매장되었음을 발견하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부터 전쟁 무기의 조달을 위해 본격적인 채광에 착수하여, 매일 평균 210톤 규모의 철광을 속초항을 통해 일본 야하타(八幡)제철소로 반출하였다.(강원문물편찬실,『강원문물(江原文物)』,대경출판사, 1973, 142쪽)



    4. 정부수립 이후


    8.15광복과 더불어 남북분단으로 공산치하에 있다가 한국전쟁 이후 행정수복이 되자 국유화되어 1955년부터 다시 가동되었다. 그 후 1955년 말에 설립된 양양철광공사가 경영하다가 1964년에 대한철광회사에 합병되었으나 1967년에 삼미광업개발주식회사가 인수하면서 민영화되었고 1987년에는 대한철광개발주식 회사의 양양사업소로 이관되었다. 1961년에 자력 선광장이 준공되고 1962년에는 대형의 발전기 및 컴프레서가 도입되는 등, 기계설비가 크게 확충되자 생산 량도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즉, 철광 생산량은 광복 후 처음으로 생산이 시작된 1956년에는 8,914톤, 그 다음해인 1957년에는 74,842톤에 불과하였으나

    1963년에는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319,060톤 이었다.(강원도기획관리실편, 『강원총람(江原總攬)』, 1975, 572쪽) 양양광산에서 생산된 철광은 1973년에 포항제출에 납품하기 전까지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1965년에 양양군의 철광 수출액은 우리나라 전체 수출 액의 10%를 점하는 등, 1960년대에는 주요 외화획득 원이었다.(권혁재,『한국지리 지방편(韓國地理 地方編)』법문사, 1995, 136쪽) 철광생산은 1963년 이후에도 1차 국제 석유파동이 일어났던 1973년을 제외 하면 1980년대 중반까지 30만 톤 대 전후의 실적을 꾸준히 유지하여 왔다. 특히 1982년에는 362,000톤을 생산하여 피크를 이루었다. 그러나 값싼 외국산 광물의 수입증가와 인력 부족으로 채산성이 악화되자 생산량이 1987년부터 현저한 감소세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1990년 188,267톤, 1993년 96,572톤, 1994년

    32,324톤으로 급감하고, 결국 1995년에는 생산이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