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양회사 및 덕대 운영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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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양회사
(1) 개 요
① 양양광업소와는 별도의 회사로 양양갱 골짜기와 탑동 골짜기의 하천 주변에 산적(散積) 산재(散在)되어 있는 노천에서 선별을 함.
② 작업은 철판[속칭:일본 말로 댓방], 괭이[속칭:홉빠], 삼태기[속칭:어레이, 방언;삼태미], 질통 등으로 수(手)작업을 하며 선별, 운반, 계량[나무상자 속칭:일본 말로 학고띠기] 하여 1일 작업량을 책정함.
③ 노천에서 이동식 벨트인 콘베이어를 설치하기도 함(기계선광장 가동 이전의 양양광업소 노천 채굴모습도 동일 하였음)
④ 경영진이나 관리직 보다 유감독이라는 분이 작업장을 성실하게 관리감독 하였다.
(2) 업무현장 내용
천양회사에서는 철광석을 캐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항골에서부터 장승 리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철광석이나 폐석더미에 가루가 하천으로 흘러 내려온 모래와 흙을 채로 쳐서 철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회사로 1960년 초부터 1970년초까지 큰 현장은 수상리 들떡거리에서 부터 탑동 전체에 걸쳐 있었는데 채금한 것을 모아 놓으면 질통으로 져서 채우는 학구 띠기로 일을 하였다. 하루에 목표량을 채우고 더 일을 하면 그 만큼 임금을 받았다. 학구는 2톤씩 들어갔 으며 4~5명이 조를 편성하여 10학고를 하면 1일 목표량이었다. 그러므로 힘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힘이 달리는 사람은 버티지 못하였다.
작업 방법은 철광석을 자성 있는 선별기를 통해서 광석은 선별되고 나머지는 흘러 보내는 방식이다.
광석이 학구에 가득 차게 되면, 다른 통에 넣고 다 찬 통은 차에다 싣고 속초로 반출을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질 좋은 철광석을 생산할 수 있었다.
사장 밑에 과장이 4~5명이 있었고 현장 감독은 5명이었다. 탑동 현장에는 그골짜기가 꽉 찰 정도로 약 200여명 정도가 일을 했고 들떡골에도 인부가 많았 는데 양양사람들은 거의 다 일을 할 정도였다. 전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대 없이 주간에만 일을 했다.
철광석은 8톤 트럭 10대에 실려 속초로 운반되어 배편으로 팔려 나갔다.
당시 감독의 보수는 70~80만원이었고 광부는 30~40만원 정도여서 일은 힘들 지만 보수는 높았다.
2) 덕대
① 덕대(德大)란 광주(鑛主)와 계약을 맺고 채광하는 사람을 덕대라 한다. 광주는 계약된 광구 내의 광물채굴권을 덕대에게 부여하고, 덕대는 광주에게 보증금 및 분철(分鐵 : 광물권의 일부를 배당)을 납부하거나 이에 상당하는 대가를 지급하고 계약기간 중 덕대 자신의 채산으로 광업을 경영하는 방식이다
② 직영체제에서 작업하는 곳 보다 다소 열악한 작업환경(광량 또는 품질)이거나 직영에서 손이 모자랄 때 넘겨주는 생산 작업체제이었다.
③ 주(主)로 논화항에서 생산을 한 작업 체제였다.
④ 윤성혁[흔히 尹덕대로 불렀음]씨가 맡아서 했다.
⑤ 직영부분은 채광(採鑛), 선광(選鑛)의 관리감독자가 작업량 또는 광석(鑛石)의등급 측정에서 투서(投書)나 오해(誤解)를 받기도 하였음.<1978년 광업소 간부회의 자료에서 발췌〉
<사진 4-11> 덕대 논화 출하항(2012년 12월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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