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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철광산의 문화사 [증보판]

    5. 공작실 및 선광수리실

    페이지 정보

    조회 306회

    본문


    (구술자 상평리 강춘명 72세)


    사례 1 ◆ 공작실의 하루일과


    67~88년까지 재직했고 처음부터 공작실에서 임시부로 일했다. 광산 내에서 필요한 모든 기계 제작. (광차, 권양기) 수리부에서 수리하지 못하는 기계를 연말에 수리를 하였다.

    당시 임금은 6000원(지금 100만 원 이상) 정도 받았다. 기술력과 성실성을 보고 고입 여부를 결정하였다.

    공작실은 교대 근무가 없고, 업무가 많을 경우에는 연장근무를 했다. (오후 5

    시 이후 12/1시 정도) 농가에서 필요한 기구는 공작실에서 쓰고 남은 자재를 이용해서 만들어 반출하기도 하였다. (연탄집게, 불삽, 곰배, 불집게, 절구 등) 자제는 많이 부족했으나, 필요한 자재가 나오는 경우 감추어 두고 차후에 사용해서 만들었다.

    공작실에서 선광장 지원(기계 고장 수리) 등을 해주었으며, 그 당시에 많은 부탁을 받았다.

    자재 조각을 모아두었다가 노무자들의 가정에 필요한 기구 등을 만들어 주었는데 입소문이 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례 2 ◆ 영국기술자에게 욕을 했더니


    항내 150마력짜리 권양기는 메다를 빼 낸 후에 재조립하였다.(혼자빼지는 못함) 그 안을 바베트라는 것을 부어서 선반에서 따로 빼낸 후 맞지 않지만 샤우 트라를 이용해서 맞춤. 컨베어 벨트, 로우러, 200마력짜리 메다를 수리하려면 힘들었다.

    쪼크라샤, 콩그라샤, 볼밀기계는 독일제로써 매우 비싸다. 라이너 같은 건 교환하지 않았다. 양양광업소 자체에서 하지 못하는 것은 외국인 전문가가 와서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제2선광장 위에 2수항 권양기 설치할 때와 00마력짜리 콤프레샤를 설치할 때영국 또는 독일 사람들이 와서 설치해 주었다.

    수항으로 기억되는데 얼굴 모양이 좁고 길죽하게 생긴 영국 기술자가 와서 기계를 설치하는데 얼굴이 xxx못 생겼다고 우리말로 했는데 나중에 그 기술자가 어께를 툭 툭 치면서 “그러문 쓰나 ?”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았는데.... 무안해서 혼이 났는데 나중에 그 영국 기술자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외국 기술자들이 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내에서 주로 탐사하는 조사과에도 간혹 외국인(독일)이 일 하였다. 기술자라고 특혜는 없었으나 곤조는 있었다.

     

    186_1.jpg

    < 사진 11> 당시 공작실 선반 모습(1956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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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 장승리 이규삼 62세)


    사례 1 ◆ 한평생 광산에 몸담고 지금도 다니고 있다.


    양양광산은 1971년 5월 24일에 이사하였고 1994년 5월 30일 폐광한 후 이갑수 소장님과 임철혁 과장과 함께 미지막까지 정리하고 퇴사하였습니다. 그 후일양레미콘을 거쳐 2011년 대한광물이 다시 재개발되면서 입사하여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으니 거의 한 평생을 양양광업소에 몸답고 있는 셈입니다.



    사례 2 ◆ 학업보다 먹고 사는 것이 급해 고등학교를 중퇴 했지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니다 가정형편이 워낙 어려워 월사금을 낼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업보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했지요. 그러나 미성년이라고 광업 소에는 정식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천양회사에 임시부로 들어갔지요. 그 후 나이가 먹으면서 선광장 오와삔에서 2년, 조사과에서 1년, 선광 수리실에서 용접공 으로 있다가 1991년부터 선광수리실 관리책임자인 감독으로 근무했습니다.



    사례 3 ◆ 주로 막걸리 힘으로 일을 했다.


    1973년부터 조사과에서 일했는데 조사과는 주로 철 광맥을 찾는 일입니다.

    그런데 산에는 전기가 없으니 자동차 엔진을 끌고 산에 올라가서 시동을 걸고 시추기를 돌려야 하자나요. 그런데 나는 기술이 없으니 엔진을 끌어 올리는 잡부인 셈이죠. 그땐 주로 막거리 힘으로 올리는데 막걸리를 챙기는 직원이 별도로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지 지금도 어깨에 뼈가 튀어나온 자국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어린나이에 너무 힘들어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선광수리실로 옮겼습니다.



    사례 4 ◆ 입사 후 3년 만에 국가 공인 용접기술 자격증을 취득


    선광수리실에서 용접공 조수를 하다가 1974년에 춘천기술고등학교에서 국가 공인 용접기술자 자격증을 땄습니다. 크라사와 조크레샤를 수리했는데 현장에 가서 하기도 하고 수리실로 가지고와서 수리를 했는데 조크레샤 수리를 하다가 끼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잘못하면 컨베이어에 감겨 죽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일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부의 아내가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나무 땔감을 구해서, 집에서 불을 때기도 하고 이웃집에 팔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 한 순간 지나간 듯합니다. 이 모두 지난 날의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그 덕택에 지금도 대한광물 재개발회사에서 용접 일을 한답니다.

     

    188_1.jpg

    <사진 12> 당시 사진을 설명하는 이규삼( 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