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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지중추 송공 묘지명 병서(知中樞宋公墓誌銘)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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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지중추 송공 묘지명 병서(知中樞宋公墓誌銘) 幷序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갑신년(1764) 2월 신묘일에 지중추부사 은진(恩津) 송공(宋公) 휘 요화(堯和) 자(字) 춘유(春囿)이다. 83세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일찍이 그 식구들에게 고하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선친 곁에 매장하라. 어길 경우에 비록 명산에 매장했다 해도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회덕(懷德) 학당산(學堂山) 판서공(判書公) 무덤 오른쪽으로 백 보쯤 되는 임좌(壬坐) 언덕에 공을 안장하였다.

     증조는 휘가 준길(浚吉)이고 좌참찬을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어 세상에서 동춘 선생(同春先生)이라 일컫는다. 조부는 휘가 광식(光栻)이고 정랑을 지냈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친은 휘가 병하(炳夏)로 장악원 정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나씨(羅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으며 학생 휘 성원(星遠)의 따님이다.

     공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후덕하며, 여럿이 있을 때 나서지 않고 입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음이 소탈하고 넓으며 속되지 않아 속 좁은 세인(世人)을 볼 때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유독 삼연 선생(三淵先生) 김창흡(金昌翕)을 기꺼이 따라 놀았다. 

     설악산에서 『역경(易經)』을 배웠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돌아와 종신토록 변함없이 암송하여 마음에 담아두었다. 공은 심지를 굳건히 세우고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속이지 않는 것을 주안으로 삼았다. 항상 말하기를, 어두운 방에서 불선(不善)을 행한다면 유독 신명(神明)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평소 진솔하여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질실(質實)한 행동을 독실하게 하는 것은 비록 조행(操行)이 뛰어난 선비라도 혹 따라가지 못할 바가 있었다.

     성정이 매우 효성스럽고 일찍 부친을 여읜 것을 통한으로 여겨 모친을 섬김에 애정을 다 바쳤다. 조금만 편찮아도 반드시 식음을 전폐하고, 매양 밤이 깊어지면 조금 물러나긴 해도 여전히 문밖에서 서성이며 신음소리가 들리면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喪)을 당하자 울부짖으며 통곡하니,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나이가 이미 60세에 달했는데도 3년 동안 소식(蔬食)을 하였다. 

     선조를 받들고 조상을 추모할 때면 반드시 성심과 역량을 다하였고, 제사 때에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며칠 동안 안색을 펴지 못하며 마치 용납될 곳이 없는 듯이 하였다.

     부모를 섬기듯이 형과 누이를 섬겼으며, 자기 자식처럼 조카들을 돌보았다. 효심과 우애가 깊은 사람에 대해 들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추어주고, 그와 반대되는 자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부박하게 여기며 끝내 다시 취하지 않았다. 향당(鄕黨)에서 지낼 때 혼인이나 상사(喪事)라든가 곤란하고 긴급한 일이 있을 때면 공이 있어야 해결이 되기에 물 흐르듯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관직생활을 할 때는 또 너그럽고 청렴하며 대체를 견지하여 사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떠난 뒤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워하여 왕왕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아, 어질다고 할 만하다.

     경술년(1730)에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내직으로는 사산감역(四山監役)‧의금부 도사‧활인서 별제‧장흥고와 사복시 주부‧익위사 익위‧오위장‧돈녕부 도정‧동지돈녕부사‧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외직으로는 청산 현감(靑山縣監)‧진산 군수(珍山郡守)‧선산 부사(善山府使)‧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선산 부사로 재임할 때는 치적이 우수하여 상(賞)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가 더해졌다.

     병자년(1756)에 상(上)이 동조(東朝)에 축수를 올리면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계미년(1763)에 성상의 장수(長壽)로 인한 은전이 시행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규례대로 조부와 부친이 추증되었다.

     공은 평소 잘 보양하여 고령임에도 시력이나 청력이라든지 운신(運身)하는 것이 젊은이와 같았는데, 피로한 기색이 나타나 약으로 치료하는 것도 효험이 없자 “내가 명(命)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임종 때엔 모시는 사람에게 여러 차례 날짜와 시간을 묻는 것이 마치 갈 때를 미리 알고 있는 사람 같았으니, 이 또한 남다르다.

     원배(元配) 김씨(金氏)는 군수 휘 성달(盛達)의 따님이자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선원(仙源) 선생 휘 상용(尙容)의 현손이고, 후배(後配) 박씨(朴氏)는 학생 휘 대석(大錫)의 따님으로, 모두 공의 품계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김 부인(金夫人)은 경사(經史)에 능하고 시를 잘 지었지만 부도(婦道)를 닦는데 더욱 근실하였으며, 늘 시아버님을 뵙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대신 그런 마음으로 계공(季公)을 섬겼다. 계공이 뒤에 돌림병으로 외지(外地)에서 별세하자, 부인은 “여기에 정성을 펴지 않으면 어디에 내 정성을 쏟겠는가.”라고 하고는 곧바로 달려가 곡하고서 염습(斂襲)하는 것을 살피고 돌아왔으니, 그 효심과 의로움이 이와 같았다. 아들 익흠(益欽)은 현감으로, 법도에 맞는 행실로 선비들의 촉망을 받았는데 불행히도 일찍 별세하였다. 딸은 정언 김치공(金致恭)에게 출가하였다. 

     현감의 아들은 기연(起淵)이고, 딸은 장녀는 심건지(沈健之)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도사 신광온(申光蘊)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김치묵(金峙默)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이륵(李玏)에게 출가하였다. 기연의 아들은 계래(啓來)이다. 정언의 아들은 종최(鍾㝡)‧종건(鍾健)‧종순(鍾純)‧종부(鍾溥)‧종걸(鍾杰)이다. 김 부인은 공에게 합부(合祔)하여 안장하고, 박 부인은 판서공의 무덤 아래쪽에 안장하였는데, 따로 지(誌)가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공이 자신에 대해 서술한 글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다. “고인으로는 장주(莊周)와 소옹(邵雍)을 흠모하고, 금세(今世)에선 삼연 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네. 대체(大體)를 보고 자잘한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다네. 비루한 풍속에 영합하고 휩쓸리는 것이 마치 외물에 대해 두루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인자(仁者)를 가까이하고 악인을 미워하는 것이 마음속에 뚜렷하게 구별되었다네.”

     이 글을 보면 공의 심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행동을 고찰해 보면 신실하고 후덕하며 인륜에 독실하여 춘옹(春翁 송준길)의 가풍을 잃지 않고 깊이 간직하였으니, 아, 공이여! 뜻은 풍속에 영합하는 것처럼 가장했지만 행실은 고인을 따랐으니, 어찌 위선을 미워하고 참됨을 온전히 한 분이 아니겠는가. 공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명문(銘文)을 보라.


    『渼湖集』




    「知中樞宋公墓誌銘 幷序」  


    甲申二月辛卯. 知中樞府事恩津宋公諱堯和字春囿. 壽八十三而卒于第. 嘗告其家人曰. 我死必埋先人側. 有違者. 雖埋之名山. 非寧我也. 至是遂葬公于懷德學堂山判書公墓右百武壬坐之原. 公曾祖曰諱浚吉左參贊.  贈領議政謚文正公. 從祀文廟. 世稱爲同春先生. 祖曰諱光栻正郞 贈參判. 考曰諱炳夏樂正 贈判書. 妣曰羅氏 贈貞夫人. 學生諱星遠女也. 公爲人和易善厚. 羣居退然. 口不言人過. 然其襟懷疎曠不俗. 視世之齷齪. 無足當其意. 獨喜從三淵先生遊. 受易于雪嶽山中. 久而後反. 終身誦服不衰. 其立心持己. 以不欺爲主 常曰爲不善於暗室. 獨不愧神明乎. 故平居任眞. 若不甚拘束. 而其質行之篤. 雖脩士. 或有所不及. 性尤孝. 自痛早孤. 事其母. 能致其愛. 雖遇微恙. 必廢食. 每夜深少退. 猶彷徨戶外. 聞呻吟則涕泣祝天. 喪而號哭. 人不忍聞. 時年旣及耆. 而蔬食盡三年. 奉先追遠. 必盡其誠力. 當祭不得所嗜. 則累日不怡. 若無所容. 事其兄姊. 如事父母. 視其子如己之子. 聞人深於孝友. 輒垂淚而奬. 其反是者. 雖不顯斥而心薄之. 終不復取. 處鄕黨. 凡有婚喪窘急. 莫不待公而濟. 歸之如水. 居官. 又寬淸持大體. 使人人樂業. 去則久而益思 往往有出涕者. 嗚呼可謂仁矣. 庚戌. 始蔭仕. 於內爲四山監役, 義禁府都事, 活人署別提, 長興庫司僕寺主簿, 翊衛司翊衛, 五衛將, 敦寧府都正, 同知敦寧中樞府事. 於外爲靑山縣監, 珍山郡守, 善山府使, 光州牧使. 其在善山. 以治最賞加通政. 丙子.  上上壽 東朝. 用優老恩陞嘉善. 癸未. 以 聖壽覃恩陞資憲. 爲知中樞. 追 贈祖禰如例. 公完養素厚. 旣大耋而視聽起居如少年. 及示憊. 不聽藥治曰. 吾知命矣. 臨終. 數問侍者日時. 若前知者. 其亦異矣. 元配金氏. 郡守諱盛達之女. 右議政文忠公仙源先生諱尙容之玄孫. 後配朴氏. 學生諱大錫之女. 皆從 贈貞夫人. 金夫人通經史能爲詩 然治婦道愈謹. 常以不逮其舅爲至恨. 移事其季公. 公後以癘歿于外. 夫人曰. 不於此自伸. 烏乎用吾誠. 卽奔哭視襲斂而歸. 其孝而能義如此. 有子益欽縣監. 以經行有士望. 不幸早世. 女適金致恭正言. 縣監子起淵. 女長適沈健之. 次適申光蘊都事. 次適金峙默. 其季適李玏. 起淵之子啓來. 正言之子鍾㝡, 鍾健, 鍾純, 鍾溥, 鍾杰. 金夫人祔公而葬. 朴夫人葬在判書公兆下. 別有誌. 銘曰. 

    余讀公自叙之文. 曰於古慕莊邵. 於今師淵翁. 見乎大體而不拘小節. 合汚同流. 若汎愛於其外. 而親仁嫉惡. 亦明辨於其中. 觀於此可以想公之心胸. 然而考其所爲. 恂恂仁厚. 篤於人倫. 藹然不失春翁之家風. 嗟乎公乎. 志詭乎流俗而行追乎古人 豈嫉其僞而全其眞者歟. 有欲知者. 視此銘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