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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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2월 27일(병신) 맑음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하는 자리에 동지경연사 이세최(李世最) 등이 입시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진강하고, 영동(嶺東)에서 해동청(海東靑)을 바치는 폐단 등을 논의하였다.
사시(巳時)에 임금께서 진수당에 나가셨다. 소명을 받고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하였다. 동지경연사 이세최(李世最), 참찬관 채팽윤(蔡彭胤), 시독관 이광보(李匡輔), 가주서 이대원(李大源), 기사관 이철보(李喆輔)‧신치근(申致謹)이 입시하였다. 이광보가 나아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32하편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5년의 ‘춘정월 양이하경용위상서령(春正月梁以何敬容爲尙書令)’에서 대동 8년의 위직합장군(爲直閤將軍)까지 읽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고 하니, 채팽윤이 대동 9년의 춘이월 동위북예주자사고중밀(春二月東魏北豫州刺使高仲密)에서 대동 11년의 무감동자(無敢動者)까지 읽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주서가 읽으라 하니 이대원이 양나라 중대동(中大同) 원년의 양주강불서어동태사(梁主講佛書於同泰寺)에서 불각치락어수(不覺巵落於手)까지 읽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상번(上番)이 읽으라 하니 이철보가 양 태청(太淸) 원년의 춘정월 삭일식(春正月朔日食)에서 환기처자 경불청(還其妻子景不聽)까지 읽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하번(下番)이 읽으라 하니, 신치근이 추칠월 양견정양후연명 독제장 침동위(秋七月梁遣貞陽侯淵明督諸將侵東魏)부터 읽다가 그 아래의 파양(鄱陽)을 번양으로 읽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번양으로 읽는 것이 옳은가 하니 이광보가 음을 정해 읽지 못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파로 읽어야 옳다고 하였다. 신치근이 또 편 마지막의 위경조윤(爲京兆尹)까지 읽었다.
이광보가 글의 뜻을 아뢰기를,
재상들은 모두 문자의 뜻을 논하며 안일하게 지내는데 하경용만은 장부 처리에 부지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장부 처리에 부지런한 사람이 국사를 착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말하면 모두 문의(文義)를 서로 숭상하면서 장부나 문서에 신경 쓰는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신의 종고조(從高祖)인 고(故) 상신(相臣) 경석(李景奭)이 처음에 옥당에 들어갔을 때 옥당의 관원들은 으레 글만 익히고 장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옥당에 예부터 노비안(奴婢案)이 있었는데 경석이 가지고 오게 하여 훑어보자 젊은 아전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그중에 나이가 많은 아전이 비웃지 말라. 이 관리는 장래에 반드시 대관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후에 여러 임금을 두루 섬겼고 끝내는 대신이 되었습니다. 옛사람도 세무(世務)를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나, 근래에는 더욱 심합니다고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하침(賀琛)이 아뢴 말은 크게 저촉한 것이 없는데도 양(梁)나라 군주가 이렇게 크게 화를 내며 자신의 단점을 덮고 장점을 자랑하였으니, 이러고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양나라 군주의 이런 말이 바로 잘못을 얼버무려 덮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하침이 더 이상 말하지 않은 것은 듣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재(守宰)가 탐악하고 잔혹함은 풍속이 사치한 데서 말미암는다고 한 것은 특히 적확한 의견입니다. 근래의 일로 말하자면, 신이 호남에서 돌아올 때 주전(廚傳)을 풍성하게 갖추는 것을 일절 금하였는데도 여전히 사치하는 데 힘썼습니다. 만약 어떤 고을이 사객(使客)을 잘 대접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나면 ‘너무 지나쳤다.’라고들 전합니다. 이 비용은 모두 민간에서 마련해 내기 때문에 수령은 탐욕하고 모질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하경용은 그 임금의 잘못을 보고도 간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사적으로만 말을 했으므로 호씨(胡氏 호삼성(胡三省))의 논의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무제의 일로 말해 보자면, 급암(汲黯)이 어찌 곧은 신하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유독 무제가 신선이 되는 길을 찾았을 때 간하지 않은 것은 대개 무제가 신선에 미혹됨이 몹시 심하여 간해도 따르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군주가 마땅히 귀감으로 삼아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급암이 마음에 욕심이 많다고 말했는데 신선을 좋아하고 장생술을 찾는 것이 바로 욕심이다. 비록 신선에 대해 간하지 않았더라도 간하는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급암이 어찌 그 임금이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간하지 않을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급암이 만약 궁궐에 있었다면 어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지방에 있을 때였으므로 말할 수 없었던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채팽윤이 또 아뢰기를,
최섬은 극도로 교묘하게 남을 속였으나 고징(高澄)은 내색도 하지 않고 그의 간언을 막았으니, 교묘함이 최섬보다 더 심합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그렇다. 또 최계서는 자신이 아첨하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말하였으니, 어찌 모르면서 그렇게 하는 사람보다 더 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법령에 일관성이 없는 것보다 더 큰 근심은 없습니다. 양 무제가 화폐를 유통시키는 법에 80을 100이라 하기도 하고 70을 100이라 하기도 하여 법령이 어지럽기가 이런 식이었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우문태(宇文泰)가 반포한 육조(六條)의 법은 또한 일리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다만 선후가 뒤바뀐 점이 있습니다. 현량을 발탁하는 것이 어찌 지리적 이점을 다하는 것만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른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에 먼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만을 주안점으로 삼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겠는가. 명령한 것이 자신이 좋아한 것과는 반대였다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과는 다를지라도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 글에 쓰인 것으로만 말하자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자 함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른 일에 확충하지 못한 점이 애석하다. 그러나 그 사람됨 때문에 그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세최가 아뢰기를,
이 역사 기록은 별반 부연하여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때의 호란(胡亂)은 실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승선(承宣)이 막 영읍(嶺邑)에서 교체되어 돌아왔고 옥당 또한 사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왔으니, 도내의 농형(農形)과 각 읍의 민폐에 대해 반드시 보고서 알게 된 것이 있을 것이다. 함께 들어보고자 하니, 문의(文義)를 깊이 논하는 것보다 도리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영동은 양남과 다름이 있어 본래 대동법을 설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민역(民役)에 일정한 수가 없고, 닥쳐서 분정(分定)하여 대부분 민역이 많고 무겁습니다. 양양에서 동래(東萊)로 매 두 마리를 보내는 것은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대개 이전의 규정을 들어 보니 본 읍에서는 설악산에서 매를 잡아 동래로 두 마리를 보내어 왜인의 요구에 응하였다고 합니다. 설악산에서 매를 잡는 일이 철파(撤罷)된 이후로는 그 대신 내는 매 한 마리의 값이 목(木) 30필에 이르렀고, 또 따라가는 말의 반 태(駄)만큼의 값도 주어야 하므로 합쳐서 계산하면 매 두 마리의 값이 거의 돈 130관(貫)이 넘습니다. 이를 봄가을로 나누어 민간에서 징수하는데 백성들이 감당해 내지 못합니다. 전부터 고을 수령이 글을 올리기도 하고 암행 어사가 탐문하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변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세최가 아뢰기를,
이 일은 비단 양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동의 각 읍이 대체로 모두 이러합니다. 본래는 매가 아니라 해동청(海東靑)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값으로 쳐서 동래에 수송한 것은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반드시 매를 사서 왜인에게 주어야 하는가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정확한 해는 모르겠습니다만 값으로 쳐서 보낸 것에 대해서는 자문(尺文)을 받아 옵니다. 그 사이에 필시 곡절이 있을 터인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만약 정상을 참작하여 변통하거나 혹 값을 정하여 동래로 보낸다면 조금이나마 폐단을 없애는 길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만약 매로 준다면 교린(交隣)의 사안이므로 갑자기 없애기 어려울 것이지만, 실제로 지급하지도 않는데 한갓 민폐만 끼치고 있다면 너무나 쓸데없는 일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흥양(興陽)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별성(別星 봉명 사신)의 왕래가 드물고, 수령도 가려 차임하지 않아 무관을 임명하기도 하고 품계가 낮은 사람을 차송하기도 하므로 아랫사람이 관원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신이 금년 가을에 명을 받들어 본읍을 돌아보았는데, 하리(下吏) 중에 죄가 있어 형장을 치고자 했으나 서로 미루면서 몽둥이를 잡지 않았으니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후로는 기개가 있는 명관(名官)을 간간이 차출하여 보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흥양ㆍ보성(寶城)ㆍ낙안(樂安)ㆍ강진(康津) 등의 연해 지역에서는 제방을 쌓는 민역이 백성에게 큰 폐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대개 제방을 쌓아 전답을 만드는 것에는 본래 금령(禁令)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각 궁방과 각 아문이 제방을 쌓겠다고 제언사(堤堰司)에 정소(呈訴)하여 감영에 관문이 도착하면 인근 열읍에서 군정(軍丁)을 제급합니다. 그런데 이삼일 안에 복역(服役)할 고을에 도착할 수 없는 경우는 민간에서 고용하는 값을 거두어 역소(役所)에 보냅니다.
주관하는 자가 헛되이 모두 다 쓴 뒤에는 다시 요청하기 어려우므로 일이 중도에 중지될 수밖에 없어, 폐해를 민간에 끼치고 궁방과 각 관사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게 됩니다. 근래 본도의 감사가 또 제방을 쌓는 일을 장계로 보고하였는데, 이 폐단이 고쳐지지 않으면 연해의 백성이 형세상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후로 백성들이 일할 사람을 모집하여 스스로 제방을 쌓는 경우 외에 각 궁방과 각 아문에서 제방을 쌓는 것은 일절 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세최가 아뢰기를,
“제방을 쌓아 전답을 만드는 것은 본래 좋은 일인데, 지금은 이익이 제방의 주인에게 돌아가고 민간에 폐해를 끼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자치통감강』 역시 제방을 만든 것에 대한 기록이 세 군데 있다. 지금 이렇게 작게 제방을 쌓는 것은 비록 이와 같지 않아도 폐단이 가히 된다. 단 모든 궁방과 각 아문에서 제방을 쌓는 일은 예부터 있어 왔던 일이고, 무너지거나 없어져서 수축하는 것은 자연히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일절 금한다면 목이 멘다고 먹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신축하는 것은 금하라. 고을 수령은 각별히 가려 차임하도록 전조에 분부하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여러 궁방과 각 아문의 차인(差人)이 민간에 끼치는 폐단은 실로 몹시 참혹합니다. 신이 흥양에 들렀을 때 들으니, 수진궁(壽進宮)과 기로소(耆老所)의 차인이 세금을 거두고자 와서는 만약 바로 수량대로 내지 않으면 판옥(板獄)을 만들어 가두었는데 백성이 그 속에 들어가면 잠시도 견디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판옥은 나무판으로 만든 감옥으로, 그 속에 앉거나 누울 수도 없이 겨우 서 있을 정도로 만들어 실로 서서 죽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답이나 재산을 모두 팔아서라도 온 힘을 다해 수량대로 납부하고는 그대로 유망민이 됩니다.
혹형은 이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상사(上司)의 차인이라 말했더라도 신이 왕명을 받들었으므로 추문하여 죄를 다스리고자 하니, 차인은 달아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개 궁방 및 각 아문의 절수처(折受處)는 본읍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안 될 것이 없으나 차인이 반드시 가는 것은 궁방에서 세금을 거두는 데 유익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절수(折受)하여 세금을 거두는 규정은 다른 것에 비해 가벼우나 그 뒤에 점점 더 징수하게 되어 1결(結)에 거두는 것이 많게는 쌀 23말에 이르렀으니, 정전(正田)에서 거두는 세금보다 몇 배일 뿐만이 아닙니다. 각종 곡물을 징수하는 것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차인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이전에는 자원하여 절수처에 들었으나 지금은 도리어 폐해가 되어 심지어 한 마을이 완전히 비어 버린 곳도 있습니다. 이후로는 차인을 내려보내는 일을 일절 금하고 본읍의 수령이 거두어들여 세선(稅船)에 덧붙여 싣도록 하며, 만약 혹 제대로 봉납(捧納)하지 못한 자가 있거든 해유(解由)에 구애되도록 하면 잘 봉납할 것입니다. 판옥을 만들어 사람을 가둔 차인의 경우는 본도 감사로 하여금 각별히 추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세최가 아뢰기를,
면세전의 수봉(收捧)에 대해서는 본래 비국(備局)에서 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신이 기영(畿營)에 있을 때에도 더 많이 징수하는 폐단을 금하려 하였는데 끝내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차인의 폐단이 실로 이와 같아서 얼마 전 경연에서 또한 결정한 것이 있다. 만약 수령으로 하여금 봉납하게 하면 감색(監色)이 또 폐단을 일으킬 것이다. 감색의 폐단이 차인과 다를 바 없을 터인데, 장차 누구를 시켜 금하도록 할 것인가. 다만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판옥의 일은 듣기에 놀랍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추문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감색이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수재가 잘하고 잘못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수재가 위엄이 서면 감색이 필시 폐단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차인이 세를 걷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면 이 뜻을 각 읍에 분부하여, 이후에 만약 차인이 폐단을 일으키는 문제가 있으면 낱낱이 영문(營門)에 첩보(牒報)하여 각별히 엄중히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임금께서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채팽윤이 아뢰기를,
“양양에서 바치는 입직 군사의 유의(襦衣)에 대한 일도 몹시 놀랄 만합니다. 바칠 유의가 한 벌뿐인데 그 값은 으레 돈 10관으로 대신 내는 것 말고도 작목(作木) 9필과 부지(負持 짐꾼)에게도 2, 3관이 듭니다. 이것들은 응당 바쳐야 할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마구 징수하니 마땅히 참작하여 정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호남에서 복심(覆審)할 때 도사와 함께 우도의 문서를 보았는데, 전하께서 사저에 계실 때의 작호를 써서 면세전의 세를 상납한 곳이 여럿이었습니다. 지금의 문서에 사저 때의 작호를 쓰는 것이 사체상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작호를 쓰지 말도록 한 일은 이전에 이미 분부했는데 도사가 모르고서 예전 그대로 한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임금이 사저 때 절수한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민간에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자
임금께서 이르기를,
“본래 절수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선조(先朝) 때 획급(劃給)받은 원결(元結)일 것이다. 그 전답은 지난번 연석에서 대신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세최가 아뢰기를,
“인산(因山)이 이미 지났고 우제(虞祭)가 장차 끝나려고 하는데, 왕대비전에 상선을 회복하시도록 지금껏 우러러 청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민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대신이 모두 지방에 있고 신들만 있어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경재(卿宰)를 패초하라는 명이 있어 명패(命牌)를 받들고 와서 모였으나, 빈청의 의계(議啓)와 정청(庭請)은 대신이 아니면 감히 하지 못합니다. 신들은 상소하여 전하께 아뢰는 데 불과합니다. 사체가 정청과 같지 않으니, 삼가 바라건대 각별히 대신을 간곡하게 부르시어 빨리 정청을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대신이 지방에 있고 약원(藥院) 또한 인원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청하지 못하였다. 대내(大內)에서 아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청한 대로 들어주시지 않을 경우에 대궐 뜰에서 호소하는 일은 본래부터 있었는데 지금은 거행조차 못하고 있다. 하루 이틀 지날수록 원기가 점점 사그라지실 것인데,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자전의 마음을 돌이킬 가망이 없고 대신이 언제 조정에 나올지는 막연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승지는 나아오라. 병판과 예판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이미 내리도록 했으니, 이러한 때에 비록 사정이 있더라도 머뭇거려서는 안 되고 약원에서 문안하는 일 또한 오래 빠뜨려서는 안 된다. 패초하라.”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졸곡(卒哭)이 단지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졸곡을 마친 뒤에는 마땅히 경연을 열어야 합니다. 어떤 책자를 진강해야 할지 강관(講官)을 보내 영경연사 및 지방에 있는 대신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심경(心經)』의 강론을 마친 뒤에 『논어』를 다시 강론하고자 하여 이미 영경연사에게 문의하였는데, 지금 다시 문의해야 하는가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일의 체모상 다시 문의해야 할 듯합니다. 졸곡 다음 날 문의합니까 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광보가 아뢰기를,
“경연관은 전에 소대(召對)를 할 때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는 참석하지 말도록 합니까?”라고 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경연이 아직 열리기 전에 혹 물을 일이 있을 듯하여 격식을 무시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경연을 설행한 이후에 소대할 때는 경연관은 참석하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이어 모두 파하고 물러 나왔다.
『英祖實錄』
甲辰十二月二十七日巳時, 上御進修堂, 召對入侍時, 同知經筵事李世最, 參贊官蔡彭胤, 侍讀官李匡輔, 假注書李大源, 記事官李喆輔·申致謹.李匡輔進讀綱目第三十二下編, 梁武帝大同五年春正月, 梁以何敬容爲尙書令, 至大同八年爲直閤將軍.上曰, 承旨讀之.蔡彭胤讀自九年春二月, 東魏北豫州刺使高仲密, 至十一年無敢動者.上曰, 注書讀之.李大源讀自梁中大同元年梁主講佛書於同泰寺, 至不覺巵落於手.上曰, 上番讀之.李喆輔讀自梁太淸元年春正月朔日食, 至逐其妻子, 景不聽.上曰, 下番讀之.申致謹讀自秋七月梁遣貞陽候淵明, 督諸將, 侵東魏, 其下鄱陽, 讀以番音.上曰, 番陽讀可乎 匡輔讀之未定音.上曰, 讀作巴音, 可矣.致謹又讀至終篇, 爲京兆尹.匡輔奏文義曰, 宰相皆以文義自逸, 而敬容獨勤簿領, 蓋勤於簿書者, 着實做國事者也.以我國言之, 皆以文義相尙, 而留意簿牒者甚鮮.臣之從高祖故相臣景奭, 初入玉堂, 玉堂之官, 例習文字, 而簿書則不知.玉堂舊有奴婢案, 景奭推入看過, 少吏皆笑之, 其中年老之吏謂之曰, 勿笑也.此官將來必做大官, 其後歷事累朝, 終爲大臣.古人亦多不以世務經心, 近來則尤甚矣.彭胤曰, 賀琛所陳之言, 亦無大段觸諱者, 而梁主大怒, 護其所短, 矜其所長, 如此, 何以爲國乎 上曰, 梁主此言, 乃是文過飾非之言也.匡輔曰, 琛不敢復言者, 知其不聽, 故不言也.至於守宰貪殘, 由於風俗侈靡者, 尤是的見之論也.以近來言之, 臣自湖南還歸時, 切禁廚傳之豐備, 而猶以侈靡爲務.若聞某邑不能善待使客, 則相傳以爲太過, 此皆出於民間, 其勢自不得不貪殘矣.上曰, 此言是矣, 所當存戒者也.匡輔曰, 何敬容見其君有過而不諫, 但私言於人, 故胡氏之論如是, 而第以漢武事言之, 汲黯, 豈不直臣乎 獨不諫武帝求仙, 蓋武帝惑於神仙滋甚, 知其諫之不入, 故不言, 此乃人君之所當鑑戒者也.上曰, 汲黯之言曰, 內多慾, 夫好神仙求長生, 乃是慾也.雖不諫神仙, 諫在其中矣, 汲黯, 豈以其君不改, 而不諫者乎 彭胤曰, 汲黯, 若在禁闥, 則豈不言乎 似是在外時, 故不得言耳.彭胤曰, 崔暹極爲巧詐, 而高澄不假顔色, 以防其諫, 其巧甚於崔暹矣.上曰, 然矣.且季舒自知其侫, 而猶爲之, 豈不甚於不知而爲之者乎 彭胤曰, 爲國之患, 莫大於法令之無常.梁武帝行錢之法, 或以八十爲百, 或以七十爲百, 法令之乖亂如是, 何以爲國乎 上曰, 此言是矣.匡輔曰, 宇文泰六條頒布之法, 亦不爲無見矣.彭胤曰, 但未免先後倒置, 擢賢良, 豈可在於盡地利之下乎 上曰, 所謂淸心, 非不善矣, 而但其心, 先以彊國富民爲主, 則何能淸心乎 所令反其所好矣.匡輔曰, 淸心, 雖與正心有異, 若能淸心, 則何事不可做乎 上曰, 只以此文所書者言之, 則欲爲淸心者, 非不好矣, 而他事不能充之, 可惜, 但不可以其人廢其言矣.李世最曰, 此史別無可以敷演奏達之事矣.上曰, 此時胡亂, 固無可言, 而承宣纔自嶺邑遞歸, 玉堂亦奉使南還, 道內農形, 各邑民瘼, 必有見知者, 欲爲參聞, 此與强論文義者, 反復勝矣.彭胤曰, 嶺東與兩南有異, 本無大同設立之事, 故民役未有定數, 臨時分定, 率多煩重, 而至於襄陽之所送東萊鷹子二連, 尤爲難堪之弊.蓋聞前規, 自本邑, 捕鷹於雪嶽山, 入送二連于東萊, 以應倭人之需索, 而自雪嶽捕鷹之撤罷後, 以價折定一連之直, 至於木三十疋, 且給從馬半駄之價, 摠以計之, 二鷹之價, 殆過一百三十貫錢.春秋分徵於民間, 民不支堪, 自前或邑倅陳章, 或繡衣廉採, 而尙未變通矣.世最曰, 此事非但襄陽爲然, 嶺東各邑, 大抵皆有之, 本非鷹也, 乃是海東靑也.上曰, 以價輸送於東萊者, 自何年始, 而必買鷹以給倭乎 彭胤曰, 年數則不知, 而以價送之, 則受尺文而來, 其間必有曲折, 而未得詳知.今若參酌變通, 或定價錢入送東萊, 則庶爲一分除弊之道矣.上曰, 若以鷹給之, 則交隣之事, 猝難停廢, 而實無所給, 徒貽民弊, 則事甚無謂, 令廟堂稟處, 可矣.出擧條 李匡輔曰, 興陽, 僻在海邊, 別星, 罕有入去者, 守令亦不擇差, 或以武弁, 或以秩早之人差送, 故下人不知官員之可畏.臣今秋奉命歷過本邑, 下吏有罪欲施刑杖, 則相推而不爲執杖, 實爲可駭.此後則以有風力名官, 間間差送, 則好矣.且興陽·寶城·樂安·康津等沿海之地, 築堰之役, 爲民巨弊.蓋築堰作畓, 本無禁令, 故諸宮房各牙門, 以築堰, 呈訴於堤堰司, 到付於監營, 則題給軍丁於旁近列邑, 而二三日程不能赴役之邑, 則民間收合雇價錢文, 送于役所, 則主管者浪費旣盡之後, 又難更請, 故未免中廢棄之, 害及民間, 而無益於宮房及各司.頃間本道監司, 亦以築堰事狀聞, 而此弊不革, 則沿海之民, 勢難支堪.從今以後, 民人輩募軍, 自築堰之外, 諸宮房各牙門築偃者, 一切防禁, 何如 世最曰, 築偃作畓, 本是好事, 而今則利歸堰主, 害及民間矣.上曰, 綱目, 亦書堰成者三矣.今此小小築堰處, 雖與此不同, 爲弊則可見矣.但諸宮房各衙門之堰, 當自古有之, 因其毁廢而修築, 自不容已, 一切禁斷, 則有若因噎而廢食, 而自今新築處禁斷, 可也.邑守各別擇差事, 分付銓曹, 宜矣.出擧條 匡輔曰, 諸宮房各衙門差人之作弊民間, 誠爲孔慘.臣過興陽時, 聞壽進宮及耆老所差人, 以收稅來到, 若不趁卽備納, 則作板屋囚蟄, 民入其中, 頃刻難堪.蓋板屋者, 以板爲獄, 其中僅容起立, 不得坐臥, 實有立死之慮.故民人輩, 盡賣田土資産, 竭力備納, 仍致流散, 如此酷刑, 曾所未有.雖曰, 上司差人, 臣旣奉命, 故欲爲推治, 則差人避而不見矣.大抵宮房及各衙門折受處, 自本邑收稅以納, 未爲不可, 而差人必往者, 非爲有益於宮房之收稅, 於渠有利故也.且折受收稅之規, 視他差輕, 而厥後漸致加徵, 一結所納, 多至二十三斗之米, 比之正田收稅之數, 不啻倍蓰, 而各樣穀物徵捧者甚多, 此則歸於差人矣.以此之故, 前則願屬, 今反爲弊, 至於一村盡空處有之, 此後則差人下送事, 一切禁斷, 令本邑守令收捧, 而添載稅船, 如有不能捧納者, 或拘解由, 可以善捧.若板獄囚人之差人, 則令本道監司, 各別推治, 何如 世最曰, 免稅收捧, 自有備局折定矣.臣在畿營時, 亦爲禁斷加徵之弊, 而終不施行矣.上曰, 差人之弊, 誠有如此者, 而頃於筵中, 亦有定奪者.若令守令捧納, 則監色又將作弊, 監色之弊, 無異差人, 將誰使禁之 但令各別申飭, 板獄事, 聽之可駭, 令本道監司推治, 可矣.匡輔曰, 監色之作弊, 在於守宰之善否, 守宰若有威令, 則監色必不能作弊, 而差人收稅, 若不可罷, 則以此意, 分付各邑.此後若有差人作弊之事, 則這這牒報營門, 以爲各別重治之地,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彭胤曰, 襄陽所納入直軍人襦衣事, 亦甚可駭矣.所納襦衣, 只是一領, 而其價則例以十貫錢折定外, 作木九疋, 負持亦數三貫錢, 此是應納之外, 而濫徵如此, 宜有酌定之道矣.上曰, 令該曹稟處, 可也.出擧條 匡輔曰, 臣於今番湖南覆審時, 與都事見右道文書, 則以殿下在私邸時, 爵號免稅上納者屢處矣.卽今文書, 以私邸時爵號書之, 事體豈不未安乎 上曰, 爵號勿書事, 前旣分付, 而都事想不知而因循矣.匡輔曰, 臣意則以當當千乘之君, 私邸時折受, 不可仍存, 若給民間則善矣.上曰, 本無折受處, 似是先朝時劃給元結耳.其田畓則向來筵席, 已有言及大臣之事矣.世最曰, 因山旣過, 虞祭將終, 而王大妃殿復膳, 至今不得仰請, 臣民之心, 當如何 大臣俱在外, 只有臣等, 不知所爲矣.今有卿宰牌招之命, 故承牌來會, 而賓廳議啓及庭請, 非大臣則不敢爲之, 臣等則不過以上疏陳達於殿下而已.事體與庭請不同, 伏望各別敦召大臣, 以爲從速庭請之地, 何如 上曰, 大臣在外, 藥院亦不備, 尙今不得陳請, 自內非不仰達, 而未得準請庭籲, 自古有之, 而至今不能擧行, 一日二日, 元氣漸敗, 緣此誠淺, 無望感回, 大臣造朝, 一向漠然, 不勝鬱抑矣.上曰, 承旨進來, 使兵禮判疏批旣下, 此時雖有所遭, 不可撕捱, 藥院問安, 亦不宜久曠, 牌招, 可矣.出榻前定奪 匡輔曰, 卒哭只隔數日, 過後則當開經筵, 進講冊子, 送講官, 問于領事及在外大臣, 何如 上曰, 心經畢講後, 論語欲更爲進講, 曾已問於領事, 而今當更問乎? 匡輔曰, 事體似宜更問, 卒哭翌日, 當爲問議乎 上曰, 依爲之.出榻前定奪 匡輔曰, 經筵官, 從前則無召對時入參之事, 此後則當令勿爲入參乎 上曰, 經筵未開之前, 似或有可問事, 故破格爲之矣.經筵設行後, 召對時則經筵官使之勿入, 可矣.出榻前定奪 諸臣, 仍皆罷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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