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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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 덕망을 곡하면서 [李生德望哭] 미수(眉叟) 허목(許穆) 95)
난리를 피해 가다 양양 길에서 逃亂襄陽道
서로 만나 고생을 이야기 했네 相逢說艱難
은근히 연상으로 찾아와 慇懃漣上訪
나의 어려움 슬퍼했네 哀我遘凶艱
이 깊은 정에 감동되어 感此情意深
만날 때 마다 기쁜 얼굴이었네 逢場開好顔
궁한 처지에도 자주 찾아 주기 에 窮途頻見過
늙어서도 기쁘게 지냈나 했더니 垂老得交懽
뉘 알아서 생사의 나눔이 誰知死生別
겨우 한 달 사이에 있을 줄을 遽在旬月間
아득히 죽음에 돌아갔으니 昧然歸化盡
모든 일이 한 번의 탄식뿐이네 萬事一嗟嘆
평생 품은 뜻 회상해 보니 顧想平生意
가엾고 딱한 마음 아프기만 하구려 惻惻已含酸
한 백년 목메어 우는 곳은 百年嗚咽處
백양나무 쓸쓸한 무덤가로세 墟墓白楊寒
『眉叟記言』
○ 강릉 도중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며 감회를 쓰며 [江陵途中望雪嶽感懷作] 미수(眉叟) 허목(許穆) 96)
설악산 높이가 만 길이나 되어 雪嶽之山高萬丈
봉래산과 강릉까지 그 기운 이어졌네 懸空積氣連蓬瀛
대천봉의 눈빛은 뜨는 해를 맑게 비추니 千峰映雪海日晴
저 멀리 옥경에 상제들 모여드는 구나 縹渺群帝集玉京
매월당 거기에 머물며 東峯老人住其間
거룩한 기 상 하늘까지 이어졌구나 高標歷落干靑冥
비바람도 꾸짖고 귀신을 희롱하며 嘯風叱雨弄神怪
불교에 의탁하여 그 이름 숨겼네 逃空托幻藏其名
도성에서 걸식하며 재상을 멸시하며 乞食都門傲卿相
해학을 일삼아 저자거리 아이들을 놀라게 했네 縱謔飜爲市童驚
미쳐 날뜀이 고결에만 국한 될까 猖狂不獨事高潔
그 마음 영원히 해와 달처럼 빛나리 此心長與日月明
『眉叟記言』 續集
○ 기행(記行) 미수(眉叟) 허목(許穆)
가리파(伽利坡)는 원주(原州) 치악산(雉嶽山) 남쪽 기슭의 큰 재다. 단구역(丹丘驛)에서 산골짜 로 15리를 간다. 재를 넘어 골짜기를 나와서 또 15리를 가면 신림역(新林 驛)이다. 신림의 남쪽은 횡령(橫嶺)인데 호서 제천현(堤川縣)의 경계이다. 횡령 너머는가령(椵嶺)이고 그 남쪽이 의림지(義林池)이다. 본디 영서와 호서의 애초의 경계는 큰못이었으니 제천 너머의 고을에 호서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못 때문이다.
그 동쪽은 유령(楡嶺)인데 영월(寧越)의 경계이고 유령을 넘으면 용정(龍井)이다. 용정은 샘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아나와 그 가운데가 못인데 홍수나 가뭄에 기 도를 올린다.
영월에서 노릉(魯陵)을 물어보니 군(郡)의 서쪽 큰길가에 있었다. 옛적 군의 아전 엄흥도(嚴興道)라는 자가 노릉을 거둬 묻어 주었다고 한다. 현재 군에는 아전과 백성 중에 엄씨(嚴氏) 성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 그 일족이 매우 많다. 오래전 일이라 그 대수는 모르겠지만 필시 후세 자손들이 끊기지 않았나보다. 태수 윤후 순거(尹侯舜擧)와 함께 금강정(錦江亭)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 를 나눈 뒤에 배를 타고 정자 아래석벽을 둘러보았다. 상동(上東)의 골짜기 어귀부터 석령(石嶺)까지는 40리인데 모두 높은 절벽과 푸른 시내였으며 이따금 흰 자갈돌에 깊은 못이 있었다.
재를 넘으면 평창(平昌) 경계이고 또 30리를 올라가면 마차령(摩嵯嶺)인데 정선(旌善)의 경계이며 산골짜기가 깊고 험했다. 재를 내려오면 큰 시내가 골짜기 어귀를 지나가 는데 이것은 태백산 살내(薩奈) 앞쪽 시내의 하류이다. 큰 시내의 산길을 따라가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데 깊은 산은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고 바위로 된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 모여 있어 한낮에도 해가 비치지 않는다. 석동(石洞)에는 이따금 깊은 못이 있고, 나무는 자단(紫檀)과 황양(黃楊)이 많으며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렸다. 역탄(易呑)에이르면 삼척(三陟)의 경계이고 백전(栢田)이 있다.
울탄(蔚呑)을 오르면 큰 재인데 산에는 회나무가 대부분이어서 관동 지역의 배를 만드는 재목이 나는 곳이다. 울탄을 내려가면 평탄(坪呑)이다. 울탄의 물은 삼(蔘)ㆍ조탄 (助呑)ㆍ갈전(葛田)을 지나 임계(臨溪)의 평탄에 이른다. 서남쪽 황지(黃池)와의 거리는 30리이다.
삼의 남쪽이 건의(巾衣)인데 삼의 남쪽에서 재를 오르기까지는 불과 1리 남짓이다. 재에 올라 내려다보면 그 너머는 수많은 골짜기 와 중첩된 봉우리여서 굽어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서남쪽으로 태백산(太白山)을 바라보면 눈 덮인 산이 하늘을 막은 채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볼 수가 없다. 구름 아래로 유령(楡嶺)이 보이고 그 너머는 백석평(百 石坪)이다.
역탄의 동남쪽부터 건의이고 건의의 동북쪽은 죽령(竹嶺)이니 그 곳이 두타산(頭陀山)이다. 그 가운데의 갈전과 삼은 산속의 매우 살기 좋은 마을로 장수하는 노인이 많다. 그곳 백성들은 자단으로 만든 활의 몸체를 위시하여 진기한 목재와 인삼ㆍ복령ㆍ무명ㆍ삼〔麻〕 등을 조세로 낸다.
8월에 낙산사(洛山寺)를 구경하며 경숙(京叔 강호(姜鎬)의 자)과 『주역』(周易)에 대해 얘기 를 나누었다. 경숙이 말하기를 “초연수(焦延壽)의 ≷역림≸(易林)은 상(象)에 따라 말을 붙인 것으로 괘의 변화가 매우 괴이하다. 후세에 기이하다고 인정받고 싶었겠지만 그 문장은 사실 천근하여 알기 쉽다.” 하였다. - 이때 경숙은 양양 부사(襄陽府使)였다.
저녁에 의상대(義相臺)에서 놀고 밤이 되어 월출을 구경하였는데 그날은 8월 18일이 었다. 해상에는 항상 비가 잦아 구름이 감돌며 금세 걷혔다 다시 끼곤 하였는데, 달이 떠오르자 그 빛이 환히 비춰 바라볼 만하였다. 아침이 되자 날이 흐리다 잠시 갰는데, 바다 빛에 광채가 빛나더니 햇빛이 번쩍이며 자줏빛 기운이 뒤섞여 황홀한 광경이 매우 기이하였다. 예전에 내가 피난하여 관동 지역으로 왔었는데, 1월 15일에 금양(金壤 회양(淮陽)의 옛 이름)의 통자원(通慈院)에서 월출을 구경하였다. 그해 3월 우계(羽溪)에서 일출을 구경하였는데 광채가 불빛 같아 눈이 부시고 자줏빛 기운이 바다에 가득하여 이번에 구경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해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고 올해는 비가 많이 내렸으니 태양의 빛도 홍수나 가뭄에 따라 변하는 듯하다.
천후산(天吼山)은 설악산(雪岳山) 동쪽 기슭의 다른 산인데 수성(䢘城 간성(杆城)의옛 이름) 남쪽 경계에 있다. 돌산이 신기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운데 아홉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너른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산이 크게 울면 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후라고 하였는데, 산에 풍혈(風穴)이 있다. 남쪽에는 석달마(石達麻)가 있고 북쪽에는 선인대(仙人臺)가 바라보인다. 선인대 위에는 선인정(仙人井)이 있다. 바닷가에서 영랑호(永郞湖)까지는 10리인데, 호숫가는 다 흰모래에 소나무 숲이고 이따금기이한 바위가 있으며 그 너머는 바다이다. 바닷가에는 큰 못이 많이 있는데 영랑호의경치가 가장 빼어나다.
壬寅正月記行
伽利坡. 原州雉嶽南麓大嶺. 從舟丘驛. 山谷行一十五里. 踰嶺出谷. 又一十五里. 新林驛. 新林南橫嶺. 湖西堤川縣境. 橫嶺外椵嶺. 其南義林池. 自嶺西, 湖西初境. 大澤. 堤川以外. 有湖西之名. 以此澤故也. 其東楡嶺. 寧越境. 逾楡嶺則龍井. 龍井者. 泉出巖竇. 其中潭水. 水 旱祈禱.
寧越問魯陵. 在郡西官道上. 古時郡小吏嚴興道者. 收葬魯陵云. 今郡有吏民. 嚴姓者族類甚衆. 舊遠不知其世. 必其後世子孫不絶耶. 與太守尹侯舜擧. 同登錦江亭酌話. 乘舟過亭下石壁. 從上東谷口. 至石嶺四十里. 皆高壁靑溪. 往往白礫深潭.
逾嶺則平昌境. 又三十里上摩嵯嶺. 旌善境. 山峽深阻. 下嶺則大川過谷口. 此太白薩奈前川下流. 從大川山逕. 或高或低. 深山沍陰. 巖巒巑合. 白日不照. 石洞往往有潭水. 其木多紫 檀, 黃楊. 聞怪鳥. 至易呑. 三陟境. 有柏田.
登蔚呑爲大嶺. 山木多檜. 東界舟材所出. 下蔚呑則坪呑. 蔚呑之水. 過蔘, 助呑, 葛田. 至臨 溪坪呑. 西南去黃池三十里.
蔘南爲巾衣. 自蔘南登嶺上. 不過里餘. 登臨則其外萬壑層巓. 俯瞰杳冥. 西南望太白. 雪山塞空. 絶頂埋雲霧. 不可見. 雲霧下. 見楡嶺. 其外百石坪.
自易呑東南爲巾衣. 巾衣東北竹嶺. 其山頭陀. 其間葛田蔘最山中佳村. 多壽耇. 其民供紫檀 弓幹. 凡瑰材蔘苓布麻之賦.
八月. 觀洛山寺. 與京叔談易. 京叔曰. 焦延壽易林. 因象寓言. 變易深怪. 欲見奇於百代. 其文實淺近易見云. 時京叔爲襄陽.
日夕遊義相臺. 夜望月出. 此八月十八日也. 海上常多雨有雲霓. 乍開乍合. 月上光影. 透出可望. 至朝陰曀少晴. 海色騰曜. 日光閃爍. 紫氣轇軋. 慌惚尤奇. 昔時吾嘗避亂. 出東界. 正月十五日. 金壤通慈院. 觀月出. 其三月. 至羽溪. 觀口出. 光曜如火. 矚目炫煌. 紫氣滿海. 與今日觀望尤異焉. 其年久旱. 而今年多淫雨. 太陽之光. 亦水旱隨變云. 天吼山. 雪岳東麓別山. 在䢘城南境. 石巒神秀. 爲九峯. 東臨大海. 山大鳴則大風. 故山名曰 天吼山. 有風穴. 南有石達麻. 北望仙人臺. 臺上有仙人井. 海上永郞湖十里. 湖上皆白沙松林. 往往有奇巖. 其外大海. 海上多大澤. 永郞湖最絶勝.
『記言』
○ 산수기(山水記) 동계(東界) 동유박물(東遊博物) 미수(眉叟) 허목(許穆)
동계에 있는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과 금란굴(金幱窟)의 석문(石文)과 습계(習溪)의 천도(穿島)는 바위 구멍이 남북으로 통해 있어서 파도가 드나든다. 바람이 고요해지면 천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총석정에 이르기까지의 8, 9리와 총석정으로부터 바다를건너 금란굴에 이르기까지의 10여 리에는 바위굴과 기이한 암석들을 볼 수 있는데, 기괴한 모습을 이루 다 기 록할 수 없다.
고성(高城)의 단혈(丹穴)과 삼일포(三日浦)에는 석감(石龕)과 단서(丹書)가 있고, 수성(䢘城)에는 세 개의 큰 호수가 있다. 열산(烈山)의 북쪽에 있는 명파(明波)의 해안은 모두 명사(鳴沙)로, 밟으면 모래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은 옛날 우리 익조(翼祖)가 이곳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설악산은 양양의 바닷가를 따라 서북쪽으로 50리 지점에 있는데,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다.
중추(仲秋)에 눈이 내리기시작하여 하지가 되어서야 녹는다. 설악산 서쪽은 한계산(寒溪山)으로 남쪽 봉우리는 아슬아슬한 절벽인데, 그 맨 끝이 정상이며 그 아래는 깊은 못이다. 바위가 신기하고 수려하며 높게 이어져 있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으며, 폭포가 300척이나 된다. 시냇물이 구불구불 돌아서 원통(圓通) 계곡 입구를 나와 36개의돌다리를 건넌다.
강릉(江陵)은 옛 예국(獩國)으로, 한(漢)나라 원삭(元朔 무제(武帝) 연호) 연간에 처음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고, 한사군(漢四郡) 때 임둔군(臨屯郡)이 되었다. 바닷가에 경포대(鏡浦臺)와 한송정(寒松亭), 한송정 아래에 술랑정(述郞井)과 석조(石竈)ㆍ석지(石池)가 있고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가 있다.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는 하나의 섬인데,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바다가 쾌청하면 산의 나무를볼 수 있으며, 산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매우 멀리 뻗어 있다. 옛날 우산국(于山國)이지형의 험고함을 믿고서 복종하지 않자 신라가 계략을 써서 항복시켰고, 고려에 이르러 백길토두(白吉土豆)가 토산물을 바쳤다. 이는 모두 동계의 고사이며 고적이다.
늙은 내가 일찍이 나그네로 유람할 적에 이 지역에 들렀으므로, 특별히 상세하게 알고 있기 에 나열하여 기록해서 동유박물 287자를 짓는다.
東界 東遊博物
東界. 通川. 叢石, 金幱石文, 習溪穿島石竇. 通南北. 風濤相拍. 風靜則自穿島絶海. 至叢石八九里. 自叢石絶海. 至金幱窟十餘里. 巖窟奇石. 怪狀不可記.
高城丹穴, 三日浦石龕丹書. 䢘城三大湖. 烈山北明波海岸. 皆鳴沙. 躡則沙鳴. 襄陽洛山寺 觀音窟. 昔我 翼祖禱嗣於此云. 雪嶽. 從襄陽海上西北行五十里. 山極高峻. 中秋始雪. 至夏至雪消. 其西寒溪南峯危壁. 其極絶頂. 其下深淵. 山石神秀崴磈. 不可名狀. 懸瀑三百尺. 川流盤廻. 出圓通谷口. 渡三十六石梁. 江陵. 古獩國. 漢元朔間. 初置滄海郡. 四郡時. 爲臨屯郡. 海上鏡浦, 寒松, 下述郞井, 石竈, 石池. 平海之越松浦. 于山鬱陵一島. 望三峯岋嶫. 海 晴則山木可見. 山下白沙甚遠. 古于山國. 負固不服. 新羅以計降之. 至高麗. 有白吉土豆獻方物.
皆東界古事古跡. 老人嘗客遊過此. 特詳之. 列書. 以爲東遊博物二百八十七言
『記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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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허목(1595,선조28~1682,숙종8)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이다. 모친은 임제(林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7) 정언옹(鄭彦)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60년(현종1)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 년 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귀향 했다. 이듬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허목이 복상문제로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가다 강릉길에서 설악산을 보고 지은 시로 보인다. 설악산의 웅장함과 그 기운이 금강산과 강릉까지 이어졌고, 대청봉의 눈빛이 뜨는 해를 비추자 하늘나라 상제들이 모여들 정도로 승경이다. 이곳에 단종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방랑하였던 김시습이 이곳에 머물며 자신의 세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시습의 절개가 하늘까지 이어졌다. 방랑 생활을 하며 뜻 없는비바람을 꾸짖고 귀신의 세계를 희롱하면서 속세에 살아가기 힘들어 불가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96) 도성에서는 벗이었던 영의정 정창손과 재상들을 욕하고 희롱하며 일탈된 모습으로 저자거리의 아이들이 놀라기도 하였다. 거짓 미친 체 하며 절의를 지켰던 김시습의 고결함이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해와 달 처럼 빛날 것이라고 칭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