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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이경석

    페이지 정보

    조회 449회

    본문

     

    ○ 낙산사제영(洛山寺題詠)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29)


    사찰을 살펴보니 관동의 절승이니 寺壇關東勝

    쓸데없는 나라 근심만 깊었네 吾深杞國憂

    일찍이 그림 쫓아 그 안을 보았는데 曾從畵裡見 

    지금이 바로 꿈속에서 노는 것 같네 今似夢中遊

    창해에서는 먼저 뜨는 해 보고 滄海先觀日 

    건곤은 홀로 다락에 의지하였네 乾坤獨依樓

    한 밤중에 나는 한 줄기 피릿소리 三更一聲笛

    만 리에 떠 있는 조각구름 걷는 구나 萬里片雲收


    『峴山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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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 이경석(1595,선조 28~1671,현종12)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쌍계(雙磎) 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7년(광해군 9) 증광별시에 합격했으나, 다음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삭적(削籍)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검열·봉교·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 등을 지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승문원주서로서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했다.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했고, 정언·교리 등을 거쳐 1626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강원도 지방의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썼다. 양주목사·승지를 거쳐 1632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부제학으로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을 찬진(撰進)했다. 1638년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1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로 심양(瀋陽)에 갔으나 1년간 봉황성(鳳凰城)에 구금되었다.

    귀국한 뒤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49년(효종 즉위) 영의정이 되었다. 1653년에 풀려나영중추부사를 지냈으며, 1668년(현종 9)에는 궤장(几杖)을 받았다. 남인이라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아 유임되었다. 저서로 『백헌집』이 있으며, 조경(趙絅)· 조익(趙翼) 등과 함께 『長陵誌狀』을 편찬했다. 남원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