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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낙산사 시문

    남효온(1)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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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남효온(南孝溫)


    백두산이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기원되어 남으로 조선국 해변 수천 리에 뻗혔다. 그산의 큰 것은 영안도(永安道)에 있어서는 오도산(五道山)이요, 강원도(江原道)에 있어서는 금강산(金剛山)이며, 경상도(慶尙道)에 있어서는 지리산(智異山)인데, 수석이 가장 빼어나고 또 특이한 것은 금강산이 제일이다. 산 이름은 여섯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개골(皆骨), 하나는 풍악(楓岳), 하나는 열반(涅槃)인데 방언(方言)이요, 하나는 지달(枳怛), 하나는 금강(金剛)인데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왔고, 하나는 중향성(衆香城)으로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나왔는데 신라 법흥왕(法興王) 이후의 칭호이다.

    내가 삼가 살펴보니, 부처는 본시 서융(西戎)의 태자이다. 그 나라가 중국 함양(咸陽)과 9천여 리가 동떨어져서, 유사(流沙)ㆍ흑수(黑水)의 먼 땅과 용퇴(龍堆)ㆍ총령(葱嶺)의 험산으로 한계하여 중국과 더불어 통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중국을 넘어서 동국(東國)에 이 산이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특히 이 산이 있는 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선국이 있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로써 상고하면 주 소왕(周昭王)의 세대는 우리나라 기자조선(箕子朝鮮)의중엽에 해당되고, 부처는 실로 서방(西方)인 사위국(舍衛國)에서 낳았다. 그 불설(佛說) 의 천함(千凾)ㆍ만축(萬軸) 속에 무한의 세계를 말했으나, 일찍이 한마디 말로 ‘조선국’ 이라 칭한 것이 없은즉, 그가 이 나라 이 산을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정녕 부처가설법할 때 그 일을 과장하여, 바다 가운데 금강ㆍ지단ㆍ중향 여러 산이 있는데, 억만의담무갈(曇無渴)이 그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하여, 어리석은 속인(俗人)을 놀라게 하기를 장주(莊周)의 곤붕(鯤鵬) 천지(天地)의 설과 고사(姑射)ㆍ구자(具茨)의 논과 같이 하여, 까마득한 가운데 말을 붙여 두고 고대(高大)한 지경으로 세속을 놀라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는 무식한 대중을 뒤흔들어 꾀어내자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 참으로 금강ㆍ지단이 이처럼 괴이한 것이 있겠느냐. 부처가 말을 붙여 둔 것이 이와 같은데, 신라 스님으로 부처를 배우던 자도 역시 망령되어 스스로 자기나라를 높이 평가하여 풍악(楓岳)으로써 금강산을 만들고, 담무갈의 상(像)을 추작(追作)하여 망령된 말 실지화한 것임에랴. 동해를 지적한 것인 줄을 알 것이요. 동서남북이 바다 아닌것이 없거늘, 어찌 유독 동해(東海)만이 해중이 되려고 하여 풍악을 금강으로 단정하려는 것인가.

    더더구나, 우리나라를 중국에서 비록 해외(海外)라고 하지만, 서북은 뭍으로 요동(遼東)을 연(連)하고, 그 사이에 다만 압록강 하나가 가로막혔을 뿐이며, 압록강이 결코 바다가 아닌데 우리나라를 지적하여 해중이라 하는 것은 대단히 틀린 말이다.

    그러나 금강의 칭호가 세대를 지난 지 오래라, 졸지에 변경하기어려워서 나 역시 ‘금강산’이라 지칭한다. 대개 산의 모양이 하늘의 남북에 우뚝 솟아 큰 땅덩어리로 누르고 있는데 큰 봉우리가 36봉이요, 작은 봉우리가 1만 3천봉이다. 한 가지가 남으로이백여 리를 뻗었는데, 산 모양이 높고 뾰족하여 대략 금강의 본상과 같은 것은 설악산(雪岳山)이요, 그 남쪽에는 곁따른 영(嶺)과 악(岳)이 있다.

    동쪽의 한 가지가 또 하나의 작은 악(岳)을 이뤘으니 천보산(天寶山)인데, 하늘이 장차 눈이나 비가 오려면 산이 저절로 운다. 그러므로 이름을 읍산(泣山)이라 한다. 읍산이 또 양양(襄陽) 고을 후면을 돌아서 바닷가로 닫는데, 오봉(五峯)이 특별히 섰으니 낙산(洛山)이다. 금강의 한 가지는 또 북으로 백여 리를 뻗어 한 고개가 있으니 이름은 추지(湫池)요, 추지의 산이 또 통천(通川) 고을 후면에서 잔산(殘山)과 서로 만나서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북으로 굴러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은 총석정(叢石亭)이다. 산의 동쪽은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군(杆城郡)이요, 서쪽은 금성현(金城縣) 회양부(淮陽府)이다. 산에 벌여 있는 것이 부(府)가 하나, 군(郡)이 셋, 현(縣)이 하나이다. 을사년 4월 보름날에 서울을 출발하여 보제원(普濟院)에서 유숙하였다.

    정묘일에 90리를 가서 입암(笠巖)에서 유숙하였다. 무신일에 소요산(逍遙山)을 지나서큰 여울을 건너 60리를 갔다. 연천(連川) 거인(居仁)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기사일에 보개산(寶蓋山)을 지나고 또 철원(鐵原) 고동주(古東州) 들을 지나고 남으로 머리 돌려 백여 리를 갔다. 금화(金化)에서 유숙하였다. 경오일에 금화현(金化縣)을 지나서 60리를 갔다. 금성(金城) 향교(鄕校)에서 유숙하였다.

    신미일에 창도역(昌道驛)을 지나서 보리진(菩提津)을 건너 78리를 갔다. 신안역(新安 驛)에서 유숙하였다. 입신일에 비에 막혀 신안(新安) 후동(後洞) 백성 심달중(沈達中)의집에서 유숙하였다. 계유일에 우독현(牛犢峴)을 건너서 화천현(花川縣)을 지나고 보리진 (菩提津) 상류(上流)를 건너 추지동(湫池洞)으로 가는데,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일기가매우 차고 산의 나무는 바람을 받아 한 쪽으로 기울어져 연한 잎이 겨우 나오기시작 하였으며, 아가위는 만발하여 진달래는 아직 싱싱하니, 일기가 서울보다 2, 3배나 차운것을 깨달겠다. 추지(湫池)는 보리진에서 나오고, 보리진은 금강산 외두설(外兠率)에 이르러 금성진(金城津)과 더불어 합하고 또 산기슭을 다 지나서 만포천(萬瀑川)과 더불어 합하고, 또 춘천(春川)에 이르러 병항진(甁項津)과 더불어 합해서 소양강(昭陽江)이 된다.

    예를 들면 나무꾼이 우연히 그곳에 갔다가 두 번 다시 찾으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산 아래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선경(仙境)이 되었다고 한다. 재마루에 추지원(湫池院)이 있고 추지원을 지나니 동쪽 가에 하늘빛이 매우 새파랗다. 운산(雲山)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아니고 바로 바닷물이다.” 하므로, 나는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본 연후에야 하늘과 물을 구별하게 되었다. 그 물이 언덕과 동떨어져서 차츰 멀어질수록높아져 아슬하게 하늘과 더불어 서로 맞닿았으니, 평소에 본 물[水]은 모두 이이들 재롱에 불과하다. 재마루에 동으로 내려가니 일기가 점점 따뜻하여 철쭉이 바야흐로 피고, 나뭇잎이 그늘을 이루어 비로소 여름 맛이 난다. 왕왕나무를 깎아 질러 길을 보수 하였으니, 이른바 잔도(棧道)라는 것이다. 때때로 말 위에서 산 살구를 따서 먹었다.

    재마루에서 20리를 가니 중대원(中臺院)이 있다. 또 5리를 더 가서 냇가에서 요기하고 비로소 평지를 밟기시작했다. 또 15리를 더 가서 통천군(通川郡)에 당도하였다. 이 날에 산을 걸은 것이 모두 90리요, 평지를 걸은 것이 15리였다. 군수(郡守) 자달(子達)을 찾아보니 자달(子達)이 나를 동헌(東軒)의 별실에 있게 한다. 자달의 춘부장이 나를매우 다정스레 대우하였다. 갑술일에 자달과 작별하고 15리를 가서 총석정(叢石亭)에도착하였다.

    나는 그 아래 이르러 보니 과연 돌산이 바다 굽은 턱으로 들어가 뱀 형상과 같이 칭칭 감았다. 산이 바다에 들어가 그치는 대목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정자에 다다르기 전 3, 40보 거리에서 북으로 한 가닥 길을 넘으니, 네 돌이 바다 속에서 솟아나 자른듯이 석주(石柱)를 묶어놓은 것 같다. 총석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바다 서쪽 변안(邊岸)은 모두 총석의 형태로 되어 1마장쯤 뻗었다. 총석의 곁에 하나의 평석(平石)이 또한 물 가운데 있고, 작은 돌이 잡되게 쌓여 뭍으로 연했다. 나는 운산(雲山)과 더불어 맨발로 기슭을 내려가 평석 위에 앉고, 종놈을 시켜서 석결명(石決明)ㆍ소라(小螺)ㆍ홍합ㆍ미역 등의 종류를 따오게 하였다. 운산과 더불어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서로 희롱하며 고개를 쳐들어 멀리 바라보니, 하늘 끝과 땅 끝이 툭 틔어 유리 명경이 서로 비치는 듯하고, 위언(韋偃)과 곽희(郭熙)가 재주를 다하여 그림을 그려 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뒤숭숭하여 꿈속이 아닌가 의심하다가 한참만에야 밝혀졌다. 나는 사랑스러워서 떠나려고 하지 아니하니, 운산이, “해가 벌써 많이 갔다.” 한다. 나는 비로소 걸어나와 사선정에 오르니, 정사에 손순효공(孫舜孫公)의 현판시(懸板詩)가 있고, 또 중인[僧 人] 석자(釋子)의 이름과 호가 많이 씌어 있다. 나는 그 안에 앉아서 한 바다를 굽어보니 네 총석(叢石)이 더욱더 기이하며, 보이는 것은 아래 평석(平石)에서 보는 것과 같으나 안계(眼界)는 더욱 광활하다. 정자 남쪽에 기울어진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없어져서어느 때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고, 정자 동쪽으로 약 4,50리쯤에 섬 하나가 바다 가운데 있어 완연히 서로 마주 대한 것 같으며, 정자 밑 바위 아래 두어 척 배가 오락가락 하여 고기를 낚고, 남으로 어점(漁店)이 있어 어부들이 그곳에서 그물을 말린다.

    물 가운데 온갖 잡새가 좌우로 날아들어 우짖는데, 어떤 것은 몸이 하얗고, 어떤 것은 몸이 검으며, 어떤 것은 부리가 길고, 어떤 것은 부리가 짧으며, 어떤 것은 부리가붉고, 어떤 것은 부리가 파랗고, 어떤 것은 꼬리가 길고, 어떤 것은 꼬리가 짧으며, 어떤 것은 날개가 검고, 어떤 것은 날개가 푸르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사언시(四言詩) 네 수를 정자 기둥에 쓰고 조금 앉았노라니, 풍랑이 일었다. 그래서 내려와 바닷가 백사장을 따라 나가는데, 모래가 허해서 말발굽이 빠지고, 오직 물가의 추진 땅만이 굳어서 굽이 빠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파도가 칠 때는 간혹 언덕에대질러 말안장에까지 뛰어오르므로, 말이 놀래서 언덕으로 나온다. 종놈을 시켜 말고삐를 끌고 가는데 풍경이 더욱 아름답고 왕왕 모래통이 산을 이루었다. 바다가 뒤집힐 적에 물결에 밀린 것이다. 또 바닷물이 백사장 가에서 혹은 모여서 배설되지 않는 것과, 혹은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있고, 또 조그마한 흰 돌이 뒤섞여서 해안을 이룬 것도 있고, 또 뭇 돌이 쫑긋하게 바닷가에 서서 송곳 같은 것, 채찍 같은 것, 사람 같은것, 짐승 같은 것, 머리는 크되 부리는 뾰족한 것이 있다. 그리고 사석(沙石)가에 해당화가 서로 잇달아 혹은 꽃이 피고, 혹은 망울이 맺고, 혹은 붉고, 혹은 희고, 혹은 단엽(單葉)으로 되고, 혹은 여러 잎으로 되었다.

    나는 도중에서 요기하고 60리를 가서 동자원(童子院)을 지나 등도역(登道驛)에서 유숙하는데, 밤에 큰 바람이 불어서 지붕이 걷히고 나무가 뽑혔다. 을해일에 등도역을 출발하여 만안역(萬安驛)을 지나는데, 경유하는 곳마다 방죽이 많고, 바닷가의 보이는 것은 전날과 같았다. 옹천(瓮遷)에 당도하니, 쌓인 돌이 언덕을 이뤄 대략 총석(叢石)의백분지 일이나 된다. 옹천을 다 지나니 조그만 돌벼랑이 있어 푸른 독을 깎아지르듯 하고 냇물이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위 밑을 빙 둘러 거위알처럼 툭 틔었다. 종놈을 시켜 미역을 따서 국을 끓이게 하고, 석결명(石決明)을 따서 소금에 구워 점심을먹었다. 장정(長井)의 해변(海邊)을 지나서 고성(高城)의 온정(溫井)에 당도하니, 온정은 바로 금강산의 북동(北洞)이다.

    이날 60리를 걸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두견새 소리를 들었다. 병자일에 바람이 불어 돈정에서 머물렀다. 정축일에 금강산에 들어가 5,6리를 걸어서 한 고개를 넘어 남으로 신계사(新戒寺)에 들어갔다. 고개의 동쪽에는 관음봉(觀音峯)이 있고, 북쪽에는 미륵봉(彌勒峯)이 있다. 서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미륵봉에 비하면 더욱 빼어났으나 그이름은 무엇이지 알 수 없다. 또 그 서쪽에 한 봉우리가 멀리 구름 밖에 있으니, 비로봉(毗盧峯)의 북쪽 가닥이다. 신계사는 곧 신라 구왕(九王)이 창설한 것인데, 중 지료(智了)가 고쳐 지으려고 재목을 모으고 있다. 절 앞에 지공백천동(指空百川洞)이 있고, 그 남쪽에 큰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보문봉(普門峯)이다. 그 봉우리 앞에는 세존백천동(世尊百川洞)이 있다.

    동 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향로봉 동쪽으로 큰 봉우리 일곱이 서로 연하여 큰산 하나를 이루었는데, 관음봉ㆍ미륵봉에 비하면 몇 십배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비로봉의 한 가닥이요, 하나는 원적봉(元寂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 위가 평평한 것은 안문봉(雁門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는 계조봉(繼祖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는상불사의(上不思議)요, 또 하나는 중불사의(中不思議)요, 또 하나는 하불사의(下不思議)다. 불사의라는 것은 암자 이름인데, 신라 중 율사(律師)가 지은 것이다.

    일곱 봉의 아래에는 대명(大明)ㆍ대평(大平)ㆍ길상(吉祥)ㆍ두솔(兜率) 등의 암자가 있어 세존천(世尊川)의 곁에 있다. 나는 지공천(指空川)을 걸어 보문암(普門庵)을 넘어 산으로 5ㆍ6리 가니 솜대[綿竹]가 길을 이루었다. 암자 아래 도착하니 사주(社主) 조은(祖 恩)은 바로 운산(雲山)의 친구라 나를 대접하는 것이 자못 정의가 있었다. 암자에 올라앉으니 동북은 바다가 바라뵈고 동남은 고성포(高城浦)가 보인다. 암자 앞에 나옹(懶翁) 근선사(勤禪師)의 자조탑(自照塔)이 있다.

    자리가 정해지자 조은이 생생한 배[梨]와 잣을 대접하고 다음에 밥상을 드리는데, 목이(木耳 버섯)와 석이(石耳)도 있고 산나물이 없는 것이 없었다. 때마침 두견새가 낮에우니 밑은 깊은 산중임을 알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조은과 작별하고 산으로 5ㆍ6리를 가서 발연(鉢淵)을 지나고, 거기서 또 반 마장을 더 가서 발연암(鉢淵庵)에 이르렀다. 중이 전하기를, “중 율사(律師)가 이 산에 들어오니 발연의 용왕(龍王)이 살 수 있는 땅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절을 짓고 이름을 발연암이라 하였다.” 한다. 암자 뒤에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보문암에서 바라보던 일곱 봉우리의 맨 끝 봉이다. 암자 위로 조금 가면 폭포가 있어 수십 길을 드리우고, 좌우에는 모두 흰 돌이 있어 다듬은 옥과 같이 미끄러우니 앉을 수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나는 행장을 풀어 놓고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입을 축인 다음 꿀물을 마시었다. 발연의 고사(故事)에 “유희(遊戱)를 좋아하는 중들이 폭포위에서나뭇가지를 꺾어 놓고 그 위에 앉아 물 뒤에 놓아 물결을 타고 순류로 내려간다. 그러면 교(巧)한 자는 순하게 내려가고, 졸(拙)한 자는 거꾸로 내려가는데, 거꾸로 내려가게되면 머리와 눈이 물에 빠져서 한참 허우적거리다 도로 나오니, 곁의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 돌이 미끄럽고 윤택해서 비록 거꾸로 날아와도 몸이 상하지 아니하므로사람들이 희롱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운산으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게 하고 뒤를 이어 따라갔는데, 운산은 여덟 번을 해서 여덟 번을 다 맞히고, 나는여덟 번 해서 여섯 번 밖에 못 맞혔다. 그리고 바위 위로 나오니 손뼉을 치고 모두 웃는다. 이에 책을 베고 돌 위에 누워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사주(社主) 축명(竺明)이 와서 나를 끌고 사(社)로 들어가 사의 뒤뜰에 있는 비석을 보게 하였다. 비석은 바로 율사(律師)의 뼈를 저장한 비로서, 고려 중 형잠(瑩岑)의 소작이요, 때는 승안(承安) 5년기미 5월이었다. 비 곁에 마른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율사의 비가 섬으로부터 5백여 년에 세 번 마르고 세 번 번성했는데, 지금 다시 말랐다고 한다. 구경을 다하고 도로 암자로 내려와 밝을 적에 저녁밥을 먹고 또 폭포에 갔다가 밤이 깊고 찬기 가 들어서야 비로소 들어왔다.

    무인일에 발연을 떠나 폭포 하류를 건너 소인령(小人嶺)을 올라가는데, 재가 험악하고 준급하여 걸음걸음이 쳐다보고 올라가기만 하니, 소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겠다. 나는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어서 바야흐로 첫 번 고개를 올라가니 유점산(楡岾山)이 왼편에 있고 불사의봉(不思議峯)이 바른편에 있으며, 동해(東 海)가 뒤에 있고 환희점(歡喜帖)이 앞에 있다. 소인령(小人嶺)이 무릇 여덟 고개인데, 점점 나아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일곱 번째 고개에 당도하면 세 불사의봉과 더불어 나란하고, 그 나머지 여러 산은 다 눈 아래 있다.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杆城) 등 세 고을이 산 밑에 벌여 있고 아득한 바다를바라보면 하늘과 더불어 가이 없다. 여덟 번째 고개를 오르니 불사의봉이 이제는 아래있다. 여기 서 서쪽으로 돌아 산그늘을 따라가는데, 길은 너무도 험준하며 측백(側柏)은길에 비껴 있고 동청(冬靑 사철나무)은 섞여서 나고, 쌓인 눈은 골짝에 가득하고, 송라 (松蘿 소나무 겨우살이)는 나무를 칭칭 감았다. 나는 호표(虎豹)에 걸앉고 규룡(虯龍)에오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가게 되어, 몹시 피곤하기에 눈을 가져다 꿀을 타서 마시니 갈증이 문득 풀린다.